6월의 선교사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 해리슨 부인

Mrs. Selina Fulkerson “Linnie” Davis Harrison (16 June 1862-19 June 1903, aged 41)
서울, 군산, 전주에서 사역 10년만에 순직했다. 남장 선발대 7인 중 처음으로 서울에 왔고, 7인 중 처음으로 순직하여, 호남 지방 기독교의 첫 밀알이 되었다. 묘지는 전주 외국인 묘원에 있다. 묘지를 방문하면 묘비의 네 면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해리슨 부인의 묘비도 중요한 정보 몇 가지를 간직하고 있다. 먼저 그녀의 생애를 살펴보자.
서울 정동과 인성부재에서, 1892-96
내한 첫 남장 선교사인 존슨(Cameron Johnson)과 함께 서울에 도착한 날이 1892년 10월 18일 밤, 남대문 성벽을 넘어 정동으로 들어왔다. 나머지 6인 선발대는 11월 4일 서울에 도착했다. 7인 선발대(존슨 제외)는 11월 11일 남장로회 한국선교회(the Korea Mission of the PCUS)를 조직했다. 회장 레놀즈, 회계 테이트, 서기에 전킨이 선출되었다. 7인 중 미혼 여자 선교사는 샐리나 데이비스(30세)와 메티 테이트 두 명이었다. 데이비스는 서울 정동과 인성부재에서 어린이와 부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북장로회 도티와 함께 여학교(정신여학교로 발전)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895년 여름에는 관악산의 한 사찰에서 피서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1896년 가을부터 레놀즈가 인성부재에 예배처소를 개설하자, 데이비스는 그곳에서 여성들을 가르쳤다. (인성부재 예배처소는 남장로회가 서울에서 철수하면서 북장로회에 인계되었다.)
군산 구암에서, 1896-98
1896년 11월 3일에서 6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제5회 남장로회 한국선교회 연례회의 결정에 따라 4년동안의 서울 생활을 뒤로 한 채 그해 11월 12일 군산 구암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데이비스는 즉시 여성과 어린이 사역에 착수했다. 한편 1896년 2월 20일 윌리엄 해리슨(W. B. Harrison 하위렴, 1866.9.13-)이 서울에 도착했고, 9개월 간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운 후, 전주에 파송되었다. 군산에서 일하던 전킨 목사와 드루 의사가 여러 가지 업무로 서울에 머물게 되자, 해리슨은 1896년 12월 10일부터 1897년 3월 5일까지 군산의 선교지부에 머물면서 사역했다. 군산에 드루 부인 루시와 데이비스 두 명의 여성만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리슨은 전주에서 사역하는 틈틈이 군산을 방문하여 데이비스와 교제했고, 1897년 11월 데이비스에게 청혼하여, 1898년 6월 9일 목요일 오후 4시 30분 서울의 도티 사택에서 레놀즈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데이비스의 나이 36세였다. 한국 현지에서 결혼한 남장 선교사 첫 부부였다. 해리슨 부부는 신혼여행으로 일본에 갔고, 요코하마의 존슨(Cameron Johnson) 목사의 집에 머물며 교제하기도 했다.
전주에서, 1898-99
1898년 10월 전주에서 열린 제7회 남장로회 한국선교회 연례회의는 데이비스의 임지를 전주로 배정했다. 데이비스는 해리슨 목사의 부인으로 전주에서 여성과 어린이 사역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데이비스의 건강이 점점 나빠졌는데, 내한 후 7년 동안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선교에 진력한 결과였다.
안식년으로 켄터기에서, 1899-1900
1899년 9월 제물포에서 열린 제8회 선교회 연례회의는 데이비스에게 안식년 휴가를 권했다. 데이비스는 건강 상태가 더 나빠져 회의에 참석치 못하고 서울에서 요양해야 했다. 일본에서 존슨이 방문하여 해리슨 부부는 1899년 10월 한국을 떠나 1년 동안 켄터키주 레바논에서 안식년을 보냈다.
전주에서, 1900-03
해리슨 부부는 1900년 10월 8일 캐나다의 밴쿠버를 떠나 11월 5일 제물포에 도착했고, 군산과 송지동교회를 거쳐 전주에 도착했다. 11월 10일 전주 서문교회 교인들이 해리슨 부부 환영 만찬을 베풀었다. 레놀즈와 테이트 남매가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전주에는 잉골드 의사만 남아있었다. 해리슨 부부가 돌아오자 전주 사역은 활기를 띄었다. 1901년 전주 교회가 성장하고, 화산으로 이전하는 공사도 시작되어, 잉골드의 진료소와 해리슨 부부의 사택이 건축되었다. 해리슨은 1901년 7월 남장 최초의 교육기관인 전주 남학교(신흥학교)를 개교했다. 리니는 남편의 사역을 지원하는 한편 여성과 어린이 사업에 매진하였다.
별세, 1903.6.19
하지만 해리슨 부인은 결핵에 걸려 결국 1903년 6월 19일 4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한국 선교 11년, 결혼 5년 만이었다. 추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이 부인은 온유하고 겸손하며 모든 사람의 모범이라서 사람을 감동케 함이 많음으로 우리 전도국 위원들이 칭찬하기를 '이는 참으로 우리 선교사 중 제일 아름다운 자라' 하였나이다."
묘지와 묘비
영혼을 사랑하는 선교적 열정으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헌신을 실천한 리니의 무덤는 지금 전주 선교사 묘역에 있다. 가장 안쪽 왼쪽에 전주에서 가장 일찍 별세한 세 선교사와 세 자녀의 무덤과 묘비가 자리 잡고 있다.

셀리나 해리스 부인, 전킨 목사(+세 자녀의 묘비), 데이비드 랜킨 남장 선교부 부총무의 묘지와 묘비 ⓒ옥성득 2025
선교사의 묘지에 세워져 있는 묘비를 볼 때 4면에 새겨진 글씨와 묘비의 모양, 묘비 아래 부분의 기석,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작은 묘비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위의 세 묘비에서 별세일을 보면 랜킨 목사(1902.12.28)이 가장 앞서고, 해리슨 부인(1903. 6. 19), 전킨 목사(1908.1.2) 순이다. 모두 1900년대에 돌아가셨지만 묘비 모양은 전킨 목사의 것만 전통적인 입석으로 얇고 긴 돌에 윗부분만 약간 원형인 oval top으로 되어 있고, 해리슨 부인과 랜킨 목사의 비석은 영원한 천국을 상징하는 오벨리스크(obelisk) 모양으로 비슷하게 생겼다. 작은 오벨리스크 모양의 비석은 미국 남부에서 유행하던 묘비 형태였으므로, 아마도 1958년 이장 때 특별히 그 모양으로 주문해서 만든 듯하다.
두 묘비가 유사한 이유는 이들을 세운 날짜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두 비석 모두 한 쪽 옆에는 "군산 영명고등학교에서 세움"이라고 되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그 비석을 세운 날짜로 랜킨은 1958년 4월 일, 해리슨 부인은 1958년 4월 일로 되어 있다. 그 묘비를 1959년 합동 통합 분열 후에 이장한 후에 세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엄연히 그 전해 1958년 4월에 세웠다.



전킨 목사의 묘비 앞에는 작은 돌 세 개가 있는데, 많은 분들이 지적했듯이 전킨 목사의 요절한 세 자녀의 묘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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