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의료, 간호

보구녀관의 첫 간호선교사 엘라 루이스

lutheroak 2025. 6. 15. 23:46

루이스는 펜실베이니아 포츠빌의 퀘이커 집안에서 태어나 퀘이커 교도로 성장했으며, 1888년 뉴욕의 감리회여집사요양소에 입학하여 간호원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사감으로 있을 때 로제타 셔우드 의사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한국에 간 셔우드가 간호원을 요청하자 자원하여 189218일 내한했다. 건강을 회복한 후 보구녀관에서 일했다. 서우드가 결혼하고 평양에 임명된 후 커틀러 의사를 도왔으며 이화학당 학생 간호도 담당하며 생리학을 가르쳤다. 1894년 콜레라 유행 때 왕실과 궁녀의 간호를 맡았다. 1895년부터 동대문시약소에서 일했으며, 1897년부터 의료 사역을 중단하고, 정동제일교회 여성과 어린이 전도 사역에 전념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유치원 사역을 시작했다. 1901년 안식년 휴가 후 1902년부터 상동교회 여성 사업과 수원 등 경기도 남부 지역 여성 전도 사역을 전개했다. 1905년에는 병에 걸린 커틀러 의사를 간호하고 이화학당 학생들을 검진했다. 1904년 루이스는 북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를 은퇴하고 독립 선교사로서 동대문 밖에서 여자 고아원을 운영했다. 1912년 동대문부인병원이 설립되자 병원의 간호 사업도 도왔다. 1927년까지 35년간 한국 선교에 헌신하고 별세하여 양화진에 매장되었다.

엘라 안토니 루이스(1862.10.27-1927.9.14) [출처: Diary of Rosetta S. Hall , Nov. 10, 1893.] 홀 부인은  “베이비 셔우드에게 첫 목욕을 해 준 루이스 간호원" 이라고 쓴 이 사진을 일기에 붙였다 .

보구녀관의 첫 간호원 루이스, 1892~1904년 근무

셔우드 의사는 선교부에 졸업 간호원 파송을 요청했다. 안식년으로 뉴욕을 방문한 스크랜턴 대부인이 선교부에 그 요청을 강력하게 전달했다. 뉴욕 루즈벨트진료소와 여집사요양원에서 셔우드 의사와 함께 일했던 간호원 루이스(Ella Anthony Lewis 劉義善, 1862~1927)는 셔우드의 요청을 받고 선교사로 자원하여 북감리회 해외여자선교부 볼티모어 지부의 파송을 받아 18921월 보구녀관에 부임했다. 보구녀관의 첫 간호원 선교사였으며, 제중원의 엘러즈 이후 내한한 첫 공식 간호원 선교사였다. 루이스는 1904년까지 13년간 보구녀관의 간호원으로 봉사했으며, 1904년 해외여자선교부를 은퇴하고 서울에서 독립 선교사로 활동했다.

루이스는 한국인 간호보조원 세 명을 훈련하고 그들에게 병원 간호를 맡기고, 자신은 입원 환자를 돌보면서 일손이 부족한 동대문과 정동의 전도사역에 종사했다. 필요한 경우 선교사를 간호했는데, 예를 들면 1893년 11월 10일 셔우드 의사가 아들 셔우드 홀을 낳을 때 커틀러 의사와 함께 해산을 돕고 아이의 첫 목욕을 해주었다.

"로스와일러 양은 귀중한 도움을 주었고, 한국인 여학생들에게 자원봉사자도 요청해서 얼마 후 나는 12세에서 14세의 밝고 자발적인 소녀 3명을 훈련했다. 하지만 그들은 진료 시간 외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약 1년 후 루이스 양이 나를 구조해 주기 위해서 파견되었을 때 매우 기뻤다. 우리는 또한 나이가 너무 많아서 외국 방식을 배울 수 없었던 기존의 한국인 사감을 대신할 기혼 여학생 황메리 부인의 봉사도 확보했다. 메리는 병든 자매를 대상으로 하는 이 사역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겼고 사랑스러운 전도부인이 되었다. 루이스 양과 메리는 대기실에서 진료소 환자와 찾아올 수 있는 입원 환자들과 함께 매일 기독교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예배를 드렸다."  [Rosetta S. Hall, “Woman’s Medical Work, Seoul, Korea,” CRMJ (Sept. 1893): 403.]

1893년 초 셔우드 홀 의사의 보고서를 보면 간호원 루이스, 간호보조원 에스더와 루시와 다른 이화학당 여학생이 간호에 임했는데, 홀은 이들에게 초보적인 약물학과 치료학도 가르쳤다.그러나 이화학당 여학생 2명은 조혼으로 인해 병원을 떠났다. 대신 어린이 병동을 맡을 수산 노(Susan Noh)를 확보했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루이스 양 아래에서 진료소 사역을 훈련받으면서 어린이 병실을 맡아줄 젊은 과부를 원했고, 마침내 필요한 자를 확보했다. 그녀가 찾아왔을 때 그녀는 한글을 읽거나 쓰지 못했지만, 여학교에서 몇 달 만에 두 가지를 다 배웠다. 그녀는 기독교인이고 세례명은 ‘수산’이다. 자신이 하는 사역이 사실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일임을 알고 난 후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는 일전에 그녀가 큰 종기에 드레싱하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그녀는 외과 의사처럼 해냈다. 각 소녀는 처음에는 자연히 병원의 광경에 겁을 많이 먹지만 아주 용감하고 유익하게 성장하여, 어떤 면에서도 기대를 저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얼마 전에 당신이 우리 수술실을 잠깐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유방암을 잘라내고 있었다. 루이스 양이 스펀지로 피를 닦고 도구로 도왔다. 나의 첫 한국인 조수인 에스더에게 마취제 투여를 훈련했다. 루시(Lucy)는 어떤 식으로든 필요한 일을 도왔다. 그때 메리가 아파서 우리는 수산을 호출하여 스펀지에 묻은 피를 씻어서 루이스 양에게 건네주도록 했다. 수산은 이런 일을 처음 경험했기 때문에 그녀는 바로 밖으로 나가서 아침에 먹은 것을 토했지만 돌아와서 수술이 끝날 때까지 용감하게 도왔다." [Rosetta S. Hall, “Woman’s Medical Work, Seoul, Korea,” CRMJ (Sept. 1893): 404-405. ]

보구녀관 입원실은 22x 20자 크기의 온돌방 하나였다. 그곳에 요 32개를 빈틈없이 깔고 한국인 환자를 수용했는데, 수산노는 입원환자들을 돌보았다. [The First Annual Meeting of the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in Korea, Seoul, May 13-19, 1899 (Methodist Publising House, 1899), 24.] 그 외에도 에스더와 루시 두 여학생이 조수로 일했다.

"현재 병원에는 루이스 양과 황메리가 함께 있고, 에스더와 수산과 루시가 약제실과 진료소를 돕기 위해 훈련을 받았다. 나는 일 때문에 한국어를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다. 나는 첫해보다 더 적은 시간에 훨씬 더 많은 일을 수행할 수 있지만, 늘어난 사역, 왕진, 한국인 소녀 조수들에게 생리학과 약물학을 가르치는 일 때문에, 필요한 한국어 공부를 할 시간이 없고, 하고 싶은 환자들과의 개인적인 사역도 할 수 없다." [Rosetta S. Hall, “Woman’s Medical Work, Seoul, Korea,” CRMJ (Sept. 1893): 404-405.]

루이스의 땅에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세우다, 1928-1933 

1925년 동대문부인병원장으로 일하고 있던 로제타 셔우드 홀 의사는 여자의학교 설립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홀은 1926년 자신의 회갑연에서 여의사 교육기관 설립 구성을 구체화했다. 1928년 3월 31일 14명의 여성 의료인들이 회합을 열어 조선에 여자의학교를 설립하는 것에 뜻을 모았고 4월 14일 명월관에서 발기인대회를 가진 후 5월 19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 자리에서 전문학교 설립 전단계로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장소는 창신동의 고(故) 루이스씨 집을 빌려 임시 사용하기로 하였다. 루이스가 남긴 창신동 땅에 강습소를 세웠다. 고려대학교 의대의 전신이다.

Ella Anthony Lewis(1862.10.27.-1927.9.14.),  양화진  C-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