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신사참배 (1935-45)

신사참배로 가는 길

lutheroak 2019. 12. 3. 03:18

옥성득, "신사참배로 가는 길," <기독교사상> (2019년 11월호)

1938년 장로교회의 신사참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38년 9월 10일 평양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에서 참배를 결의하고 부총회장과 노회장 전원이 평양 신사에 가서 절한 것은 대세를 따라간 교회와 일제의 압력에 지치고 굴복한 노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1938년 9월 10일 오전 9시 반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 제2일째 회의가 열렸다. 27개 노회 대표 171명(목사 86명, 장로 85명)과 선교사 22명, 총 193명의 총대가 참석했다. 일제 수뇌부는 미리 친일파 이승길, 평북노회장 김일선 등과 신사참배를 결의하기로 합의했으므로, 이시다 센타로(石田千太郎) 평남도지사, 경찰부장, 고등과장, 경무과장, 평양서장, 고등계 주임 등이 동석했다. 일반 방청은 금지되었다. 문밖에는 30여 명의 경관이 경계를 섰고, 총대들 사이에 경찰관들이 앉아서 반대표 이탈을 막았다.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채정민 등 신사참배 반대 지도자들은 예비검속 상태였다.​

설교 후 10시 40분부터 안건 심의에 들어가자, 계획대로 평양노회의 박응률 목사가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요 국가의식”이라고 결의하고 성명서를 채택하자는 안을 발의했다. 평서노회장 박임현 목사가 동의하고, 안주노회 길인섭 목사의 재청으로 표결에 들어갔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선천 출신 총회장 홍택기(?-1950) 목사가 동의안에 대해 “가(可)하시면 예라고 답하시오.”라고 했으나, 소수만 대답했다. 다수가 침묵하자 당황한 홍택기는 경찰들이 일어나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자 부(否)는 묻지 않고 안이 통과되었다고 선언했다. 방위량(Blair), 한부선(Hunt) 선교사가 “불법이오!”를 외치며 항의했으나 경찰들이 밖으로 끌어냈다. 항의 차원에서 선교사 일동은 퇴장했다. 장로교회사에서 가장 수치스런 결정이 강요와 각본대로 이루어졌다. 전북 김제 출신의 서기 곽진근(1897-1941) 목사가 성명서를 낭독했다.

성명서: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치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고 또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勵行하고 追하야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銃後 황국신민으로서 赤誠을 다하기로 기함.
    우 성명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회록, 1938


성명서 채택 후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와 노회장들은 전차를 타고 평양 신사로 직행하여 참배했다. 9월 12일 자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 참배 사진이 실렸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닌 군대, 문명, 물질, 힘, 돈을 가진 일본 천황과 신들에게 절했다. 그것을 욕망하는 지위 유지와 생존을 위한 참배였다. 신사참배로 가는 과정을 살펴보자.

| 1935년 이전
총독부는 주요 도시에 국체(천황숭배)를 확립하기 위해 신사를 건립했다. 평양 신사는 1917년 5월 7일에 건립되었다. 1925년에 완성된 서울의 조선신궁에 비해 적은 규모이지만, 을밀대 아래 높은 언덕에 세워진 평양 신사는 도시를 압도했다. 평양 신사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Sun Goddess)와 15대 오진(品陀別命) 천황을 모셨다.

일제는 신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교육했다. “나라가 부강하고 발전하는 것은 이 신들의 덕이다. 따라서 신사참배를 할 때 이 신들의 뜻을 받들고 신들의 공적을 본받아 우리도 황국을 돕는 일념을 가지는 참된 경지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때 신을 뵙는 묘경에 나아갔다고 하겠다. 단지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한 기도만 한다면 신을 뵐 수 없다. 옛날부터 우리나라 일본 제국은 社政일체이다. 신사와 정치는 분리되지 않는다. 신사참배는 시민의 의무이다. 신사참배는 정치 행위이다. 신사는 나라를 위해 존재한다.”(「매일신보」 1941. 3. 19.) 신사참배는 제국의 충량한 신민을 만드는 도구였다.

1925년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교육체제 확립 차원에서 기독교 사립학교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갈등이 시작되었다. 평양에서는 1931년 9월 만주사변 후 학생들의 참배가 거론되면서, 1932년 2월부터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의 불참이 문제되었다. 정부는 신사 의식은 국가 의식이며 공적 의식 때는 불승의 참여를 제외한다.”(「동아일보」 1933. 2. 8.)라며 기독교계 학교의 참여를 유도했다. 총독부는 내선일체를 위한 ‘정신교화 운동’을 위해 사회과를 내무국에서 학무국으로 이전시키고, 학무국 종교과 업무를 흡수하여 사회 교화를 위해 국가 신도를 적극 이용했다. 9월 18일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에 참여하라는 학무국의 통첩에도 불구하고 10개 기독교계 학교가 불참하자 갈등이 고조되었다. 1934년에는 다양하고 거대한 선교 희년 행사로 기독교계는 세를 과시했다. 평양은 ‘기독교 중심지’, ‘조선의 예루살렘’, ‘제2의 예루살렘’이라며 자만했다. 그러나 핍박의 칼날이 곧 다가왔다.

| 1935년
1935년 1월부터 우가키 총독은 정신교화를 위한 심전(心田) 개발 사업을 추진했다. 4월에는 모든 공사립 학교 교장에게 신사참배를 지시하는 훈령이 내려졌다. 미션 스쿨을 굴복시키고 이어서 교회를 항복시킬 심산이었다. 평남도지사 야스타케 타다오(安武直夫)는 11월 14일 중등학교장 회의 전에 기독교 학교 교장들에게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한 후에 개회하자고 제안했다. 매큔(G. S. McCune) 등 교장들은 거부했다. 25일 북장로회 선교회는 긴급 회의를 열고, 서울의 홀드크로프트(James G. Holdcroft)를 평양에 파송했다. 야스타케는 뉴욕의 선교부 스피어 총무가 조선에 오는 7월까지 기다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대신 관내 교장들에게 서면으로 입장 제출을 요구했다.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으면 최후 수단(폐교 조치)을 취하겠다고 밝혔다.

평양에 있던 선교회 계통 학교는 전문학교 1곳, 중학교 12곳, 소학교 60곳으로 재학생은 10만 명이 넘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평양노회는 12월 13일 장대현 예배당에서 200여 목사와 선교사들을 모아 신사참배 문제를 토론하기로 했다. “목사와 선교사의 태도는 강경하여 결국 문제는 더욱 확대될 운명에” 있었다.(「동아일보」1935. 12. 1.) 평양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교계 교육 문제로 종교 자유와 일본 국민으로서 조상에 대한 숭경 사이에 해결 방안을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조선일보」 1935. 11. 26.)

이 와중에 11월 26일 길선주 목사가 강서 고창교회에서 사경회를 하던 중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평양부 내 12개 장로교회 연합으로 교회장으로 거행되었다.

12월 3일 학무국은 매큔과 마페트와 협의한 후, 장로교 학교들에 전보로 12월 4일 황자의 어명명식 때 신사참배는 강요하지 않으나 봉축식을 거행하라고 지시했다. 선교사들은 동방요배만 하는 타협안을 수용했다.(「조선일보」 1935. 12. 6.) 12월 7일 평양경찰서는 신사참배를 논의할 평안노회의 개최를 불허했다. 종교 집회가 금지된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2월 9일 서울의 홀로크로프트와 연희전문의 로즈(Harry A. Rhodes), 평양 숭실전문의 매큔, 전주 신흥학교의 린턴(William A. Linton), 목포 영흥학교의 커밍(Daniel J. Cumming) 등 선교사 대표는 학무국장 와타나베 도요히코(渡邊 豊日子)를 만나 협상을 시도했다. 매큔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문제는 우리가 과거 50여 년간 조선에 와서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사업하는 동안 처음으로 닥친 중요한 고민이다.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최선의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라고 밝혔다. 반면 와타나베는 선교사들이 “기독교회와 학교를 혼동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학교는 정부 업무요,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라는 입장이었다.(「동아일보」 1935. 12. 10.) 장로회 선교회들은 정치적 절충은 절망적이라고 선교부에 보고하고 결의안을 작성했다. 숭실전문학교와 중학교 15개, 소학교 27개의 존폐를 각오했다. 총독부도 학무, 내무, 결무국 연합회의를 열고 장시간 토론했다. 결국 총독부는 신사참배를 교육상의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동아일보」 1935. 12. 15.)

| 1936년
1월 14일 평남 내무부장이 신사참배를 요구하는 최후통첩 성명서를 발표하고, 16일 도지사는 마페트와 매큔을 도청으로 불러 신사참배에 관한 최종 진술서를 제출하라고 독촉했다. 매큔은 18일 이사회를 소집했다. 참배 불가론이 우세했으나 학교 존립을 위해 학교 대표자가 참배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수렴되었다. 그러나 학교 전체 참배 문제는 교장의 재량에 일임했다. 매큔박형룡주기철을 만나 자문을 구했는데, 두 사람은 대표자 참배도 우상숭배에 굴종하는 것이므로 반대했다. 매큔과 숭의여중 교장 스누크(V. L. Snook)는 도지사에게 양심에 반해 유일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는 절할 수 없으며, 학생들에게도 참배를 요구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도지사는 두 사람의 교장직 해임서를 발송하고, 매큔의 숭실전문학교 학장직 해임 건의서도 총독부에 제출하여 1월 20일에 그들을 해임했다. 교장 해임에 항의하는 숭실전문 학생들의 항의 시위와 농성이 발생했다.

북장로회 실행위원회는 신사참배 반대 입장을 재천명하면서 성서의 십계명과 특별히 고전 8장 9-13절에서 언급한 “연약한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하고” 낙심케 해서는 안 된다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를 근거로 어린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할 수 없다고 밝혔다.

총독부는 1월 22일 선언문을 통해 공・사립학교에 신사참배를 지시했다.(Seoul Press 1936. 1. 22.) 한편 이 무렵 평남 안식교회는 신사참배를 수용했다. 사태가 심각하자 2월 7일 총독부 경무국장과 학무과장 등이 평양을 방문하고 도 학무 당국과 협의한 후 도지사, 내무국장, 경찰부장, 학무과장, 고등과장 등과 사립학교 신사참배 문제를 협의했다. 교장을 한국인으로 하거나 재단을 한국인에게 양도하여 모든 선교학교를 한국인에게 넘기는 절충안을 삼으려는 의도였다.(「조선일보」 1936. 2. 10.) 2월 19일 숭실전문대학의 교수진은 학교 폐쇄보다 한국인 이사진에게 경영을 양도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의안을 임시 교장인 마페트에게 전달했다.(“숭전, 숭중 경영을 조선인에게 양도 요구”, 「기독신보」 1936. 2. 26.) 신사참배 문제보다 학교 존속을 더 가치 있게 여기면서 선교사와 한국인 간의 갈등이 야기되었다. 일제의 의도대로 진행된 셈이었다.

그러나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평양 교계의 비타협 입장이 강경하자, 7월 1일 북장로회 선교회 연례회의는 69:16의 표결로 “교육 철수 권고안”을 채택했다. 결국 서울의 경신중과 정신여중, 대구의 계성중과 신명여중, 평양의 숭실중, 숭의여중, 숭실전문학교, 선천의 신성중과 보성여중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7월 16일 신사참배 압력과 학교 폐쇄 충격으로 노선교사 마페트가 쓰러졌다. 그는 9월 24일 한국을 떠났다. 내한 46년만에 고향 평양을 떠났다. 8월에 부임한 7대 총독 미나미는 황민화정책의 일환인 신사참배를 강화하고 총동원체제에 들어가면서 마을 단위로 신사를 설립했다. 신사에서 천황에게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여 바치게 하고, 학교에서는 교련을 실시하고 한국어를 폐지했다. 평양의 숭실과 숭의 등은 한국인이 경영을 맡게 되면서, 10월부터 신사참배를 실시했다.(「조선일보」 1936. 10. 3.)


| 1937년
1월에는 평양 숭실전문, 숭실중, 숭의의 인수 문제로 이사진이 두 파(합동 경영 대 분리 경영)로 나뉘어 분쟁했다. 고한규와 김동원은 조만식과 오윤선을 통해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재단을 끌어들여 합동 경영을 추구했다. 정두현은 이춘섭과 더불어 숭실중만 인수하려고 했다. 학생들은 합동 안을 지지했다. 안창호도 정두현을 만나 합동 안을 권했다.

2월 6일 평양의 유지 80명은 ‘숭전, 숭중, 숭의 삼교후계촉진회’를 조직하고, 두 파와 선교사를 만나 의견을 듣고 합동 안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분쟁을 본 방응모가 인수를 포기하자, 3월에 한인보가 숭전과 숭의를, 이춘섭이 숭중을 인수하였다. 당시 평양의 분위기는 누가 인수하든지 학교를 유지하자는 것이었다.[김승태, 『식민권력과 종교』(2012), 90-93.] 따라서 신사참배는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이는 서울의 입장을 수용한 것이었다.

서울 연희전문학교의 언더우드(H. H. Underwood)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 12:17)를 근거로 교육은 정부의 사업이며,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라는 총독부 입장을 수용하고, 학생과 학부모를 돕기 위해 신사참배를 수용했다. 이미 천주교, 감리교회, 성결교회, 안식교회 등이 이런 입장에 서 있었다. 반면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매큔은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으로 그 강요는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우상숭배요 영적 간음이며,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므로, 차라리 학교를 폐쇄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Can Christian Missioanries Sanction Shrine Worship?”, Sunday School Times(June 12, 1937): 427-428.]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로 신사참배 문제는 학교에서 교회로 넘어가게 된다. 총독부는 교계가 양분되었으므로, 학교에 이어 교회를 굴복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 1938년
2월부터 노회나 지역별로 신사참배를 수용하게 된다. 2월 16일 선천교회와 평북노회가 솔선하여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3월에는 만주 안동에서 목사 2명이 참배를 거부하다 검속되어 구금되었다. 3월 4일 숭실전문학교가 자진 폐교하고 최후 저항에 돌입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동안 한 가지 문제로 되어 잇든 것은 기독교인들의 태도이엇다. 이들은 완강한 순교정신 하에서 처음에는 그릇된 인식을 가저 왓스나 시국의 변천을 ㅼㅏ라 이들 기독교인 중에도 감리교에서는 솔선하야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의 서사를 읽는 등 ㅼㅜ렷한 태도를 취하야 황군위문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보조를 마처 나와섯다. 그러나 완강한 남북 장로파에서는 의언 태도를 변치 안코 잇섯스나 남 총독의 유고와 기타 지사회의의 훈시 가튼 엄격한 언명에 의하야 이들도 차차 시류(時流)에 순응하는 의미로 최근에는 상당히 주목할 만한 교회가 늘어나게 되엇다. 그리하야 22일 현재로 남북 장로교회로 신사참배와 기타 황국신민이 태도를 선명히 하는 교회는 전부 14교회나 된다고 하며, 이에 소속한 신자는 12,000여 명의 다수에 달한다고 하며 압흐로도 캐나다파와 호주파에서도 이리로 인식을 새로 하리라고 관측된다 한다. 「매일신보」 1938. 4. 23.

목사들은 시국이 변하자 시류에 편승하고 대세를 따랐다. 4월 22일에는 전북의 200개 교회가 참배를 수용했다. 4월 29일에는 전남의 60개 교회와 순천노회가 굴복했다. 결국 6월 초가 되자 전남노회, 전북노회, 청주, 서울, 평북노회는 신사참배를 허용했고, 평양과 안주와 황해노회, 경남노회, 경북노회는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국기경례를 허용했다. 의주에서는 참배 반대 목사들이 투옥되고 교회에서 추방되었다. 김익두 목사는 감옥에 있었다.

동방요배는 살아 있는 천황에 대한 경의의 표현으로 거의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이 실천했다. 황국신민서사 암송이나 일장기 경례도 수용했다. 이미 둑은 터졌다. 교인들은 행사 때 기미가요를 불렀다. 황국신민서사로 맹세도 했다. 신사참배는 단독으로 있지 않았다. 동방요배 → 황국신민서사 암송 → 일장기 경례 → 신사참배 → 전쟁 지원 → 신구약의 선별적 수용 → 일부 찬송가 삭제에 이어 1940년대에는 신사 침례까지 받는 목사도 생겼다. 황성요배를 하지 않으면 일본에서는 불경죄에 걸렸지만, 조선에서는 반역죄로 처리되었다.

마침내 8월 24일 평양노회 대표자 목사 장로 59명은 평양경찰서의 지시로 경찰서에 모인 간담회에서 다음과 같은 선언서를 도내 30만 장로교 신도들에게 발하고, 25일에는 대표 21명이 평양 신사에 참배하였다. 9월 총회 가결을 앞둔 마지막 수순이었다.

선언문. 신사는 국가 공연의 시설이요 종교가 아니므로 신사참배는 기독교리에 배치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초비상시 국가총동원의 추에 당하여 국민으로서 당연히 참여할 것을 확인하여 자에 선언함. 소화 13년 8월 24일. 평양예수교장로회교역자 일동. - 「동아일보」 1938. 8. 27.

평양 숭의여중의 오문환은 1938년 4월 평양기독교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신사참배 지지와 선교사 배척을 주장했다. 9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12월에 그는 평양 지역의 유력한 목사와 장로 등 12명을 인솔하고 북중국 지역의 일본군을 위문했다. 그의 나이 35세. 20대에 토마스 순교 건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되더니, 30대에 평양 교계를 대표하는 친일 인사가 되어, 돈과 명예와 권력의 자리로 나아갔다. 한편 조선 기독교를 대표하여 장로교 홍택기와 김길창, 감리교의 양주삼과 김종우, 성결교의 이명직 목사는 12월 남산의 조선신궁을 참배한 후 일본에 가서 이세신궁과 강원신궁을 참배했다.

| 1939년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운동도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산정현교회 주기철(1897-1944) 목사 등 여러 목회자와 신자들이 참배를 거부했다. 주 목사는 1936년 3월 2일 외금강 오정리 기독교수양관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목사 수양회에서 “목사란 하나님의 대사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종이다. 목사는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 시대를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대언하는 예언자, 교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이다.”라고 설교했다. 그는 구약 예언자 전통에 서서 모세–엘리야–나단–에레미야–에스겔–세례 요한의 길을 따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순교의 자리까지 갈 수 있었다.(“牧師職의 榮光”, 「기독신보」 1936. 5. 13.)

1939년 2월 5일 산정현교회에서 그는 마지막 설교 “나의 5종목의 기원”을 교인과 시민 2,000명 앞에서 고백했다. 그 기도는 다음과 같았다.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2)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3)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 (5)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산정현교회는 문을 닫았다. 평양신학교도 폐쇄했다. 총회 결정에 항의한 200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다. 2,000여 명의 교인이 투옥되었고, 50여 명이 순교했다.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는 10월 24일 마페트 목사가 별세했다. 주기철은 다섯 번 투옥되어 모두 5년 4개월간 감옥생활을 했으며 일제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끝까지 대항하다가 1944년 4월 21일 순교했다.

| 1940년
3월 연화동교회에서 열린 평양노회 제38회 개회 모습을 보자. 개회선언 후 교회 마당에서 ‘애국식’을 거행했다. 국기게양–국가합창–궁성요배–1분간 묵도–국민서사 제창–만세삼창 순서로 진행되었다. “대일본 제국 만세” 삼창을 하고,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했다. 일제에 굴복한 교회는 향후 5년간 무슨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면서도 침묵했다.

이후 교회의 훼절과 친일행각, 전쟁 지지는 생략한다. 다만 신사참배 신국의 가미사마에게 “하루라도 속히 우리 나라가 전쟁에서 이기도록, 군인들이 무사하게 봉공할 수 있도록 기원하고, 우리들은 굳게 총후[후방]를 지키겠습니다고 맹세합니다.”라고 기도했다.

1949년 한 서북인은 장로교가 서울이 아닌 평양에서 성장한 결과 항일투쟁과 신사참배 반대가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서울인은 결기가 적고 약고 중용을 지키는 양반 보수층이 많지만 서북 지역인은 강인한데, 마페트의 지략이 언더우드를 이기면서, 평양신학교와 숭실을 통해 민족적 선각자와 투사를 길러 독립투쟁과 민족해방에 기여했다고 보았다.[이창진, “평양과 기독교의 수입”, 「民聲」(1949. 12): 87-89.]

일제 말에 두 개의 길이 있었다. 넓은 길을 간 자는 시류에 순응하면서 무사유(無思惟)로 대세를 따랐다. 그 결과 교회는 우상숭배의 무리가 되고 예배당은 악행의 소굴이 되었다. 겨레와 함께 웃고 겨레와 함께 욕을 본 수난자들은 좁은 길을 갔다. 일제가 태극기를 말살할 때 예배당의 십자가도 떼었으나, 자유와 양심과 순교의 정신은 없앨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