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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감리회 선교사

스크랜턴의 고베 거주지 주소 문제

[아주 사소한 문제]

1917년 11월 스크랜턴(W. B. Scranton, 1856. 5. 29 - 1922. 3. 23) 의사는 일본 고베로 이주했다. 스크랜턴에 대해서는 이덕주 교수간 쓴 대작 <스크랜턴>(2014, 879쪽)이 있다. 이 책 822-830쪽에 고베 거주지를 첫 2년 간은 우라마치(浦町) 41번지로, 1919년부터는 야마모토도리(山本通) 산죠메(三丁目) 40번지로 밝히고 있다. 후자에서 별세할 때까지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1920년 1월 고베영사관에 제출한 어빈 의사의 부인이었던 Bertha K. Irwin의 여권 신청서를 보면, 신분 보증인에 스크랜턴 의사가 나오고, 그는 지난 26년 간 어빈 부인을 알아왔다고 보증을 하면서, 자신의 주소를 65 나니와마치(浪花町)로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집에 살다가 1920년이나 1921년에 야마모토도리로 이사를 갔을 것이다. 

스크랜턴 의사는 내한한 첫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로서 의사요 목사였다. 그는 조선이 대한제국이 되고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격동의 한반도에서 섬김의 삶을 살다가, 해리스 감독에 반발하여 1907년 선교사직을 포기했다. 이후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게 된다. 대한의원에서 잠시 촉탁의사를 하다가, 프리메이슨 한국지부 설립에 참여했으며, 어머니 스크랜턴 여사가 사망한 후에는 서울요양원을 설립해서 운영했다. 그것도 잠시 1911년 놀런(J. W. Nolan) 후임으로 운산 금광회사 부속병원 원장으로도 일하면서 광산 노동자들을 치료했으며, 시란돈병원을 세워 운영도 해 보았다. 사위가 있는 중국 대련에 가서 병원 사업을 해 보나 뜻대로 되지 않아, 1917년 한국인 노동자들이 많은 일본 고베에 정착하여 해성병원에서 일했다. 그 과정에서 4명의 딸들은 모두 외교관과 결혼하여 동아시아 여러 도시에 살았다. 

어빈 부인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두 사람은 1920년 1월 고베에서 잠시 만났다. 이 여권 신청서에 스크랜턴 의사의 서명이 있다. 이름 뒤에 M.D.를 썼던 스트랜턴, 그의 나이 64세였다. 3년 후에 그는 역경의 삶을 마감한다. 3월 23일 소천. 제자 전덕기가 죽은 날에 그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