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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량 한옥, 선교사 사택 1884년부터 영미계 개신교 선교사들이 서울에 거주하면서, 바로 양옥을 건축하지 못했다. 설계사, 공사감독, 기술자 등이 적고, 비용면에서도 한옥을 사서 유리창을 넣거나 거실을 넓게 리모델딩해서 서재와 응접실 등으로 사용하는 게 편하고 실용적이었다. 여기 한옥을 개량해서 사용한 한 예가 있다. 그리피스가 아펜젤러에 관한 책을 낸 1912년, 자신의 책 내용을 소개하는 글에 실린 아펜젤러 관련 사진들이므로, 1885년 8월에 입주한 서울 정동의 아펜젤러 사택일 가능성이 높다. 크게 변경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초기 사진이고, 방 안의 여성은 아펜젤러 부인일 것이다. 마루에 의자와 탁자를 놓고 서서 생활했다. 이 사진은 다음 글 네 번째 페이지에 나온다. 1880년대~1890년대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Will..
민비 사진은 없다 2: 1894년 상궁 사진 다음은 1894년 11월 뉴욕에서 발간된 Demorest's Family Magazine에 실린 "The Queen of Korea" 기사이다. 저자는 한국을 방문했던 유명한 기독교인 작가, 여행가, 저널리스트, 사진작가, 지리학자였던 카펜터(Frank G. Carpenter, 1855-1924)였다. 따라서 사진과 캡션은 과장없이 사실 그대로이다. 그의 글은 한국의 왕비에 관한 것이지만, 민 왕후의 사진은 없고, 대원군과 궁중의 높은 상궁, 왕비의 관비, 고위 관료 양반 사진만 있다. 그 중의 한 장이 11월호 표지와 다섯 번째 페이지에 있는 "The Queen's Chief Lady in Waiting"(왕비를 모시는 상궁)이다. 이 사진은 한때 민비 사진으로 알려졌으나, 이 잡지와 언더우드 부인의 ..
침례교회 선교사로 성공회 성누가병원에서 일한 맬컴 의사, 1896년 내한 선교사 중에 첫 미국 침례교회 의사는 1895년 인천 성공회 성누가병원에 부임한 맬컴(Fullerton B. Malcolm, 1850-1897.1.3)이다. 맬컴은 영국 리버플에서 출생했다. 캐나다로 이민 갔으나, 토론토에서 우드스탁대학을 다니다가, 미국으로 가서 미시간대학을 졸업하고, 이어서 시카고대학교 의대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다. 디트로이트에서 의사로 일하다가, 선교사로 지원했다. 1893년 6월 12일 미국침례교회 연합선교회(American Baptist Church Missionary union) 파송으로 중국 서부 쓰촨성에 갔으나, 1895년 폭동으로 추방되어 해변가로 나왔다. 이때 제물포 성누가병원의 랜디스(Eli B. Landis, 1865~1898) 의사는 서울 성마태병원으로 자리를..
양행 洋行 양행 洋行의 뜻 1. 중국 청나라 때에, 외국과의 무역을 독점하였던 관허 상인(官許商人)들이 결성한 조합. 2.서양으로 감. 3. 주로 외국과의 무역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서양식 상점. 제물포에는 世昌洋行이 있었다. 조선 고종 20년(1883)에 독일 마이어 상사가 제물포에 설립한 무역 상사. 강원도 금성의 당현 금광 채굴권을 획득하였으며, 인천에서 상하이(上海)를 거쳐 홍콩에 이르는 기선 정기 노선을 운영했다. 1904-05년 영문판을 보면 싱거 재봉틀 Singer sewing machine 선전이 나온다. 제물포의 함릉거(Holme Ringer) 양행이 판매했다. 그 옆에는 뉴욕에서 수입한 연유(condensed milk)를 광고하는 세창양행(E. Meyer & Co)의 광고. 1909년 평양에는 서..
평양 1926년 예수교인 통계 평양 1926년 1월과 서울 100년 후 다음 책 평양부, (평양, 1926.10)에 따르면 ● 종교 인구 = 23,149/112,929명 = 20.5% (일본인 중 신도 신자, 불교 신자가 많아서) ● 예수교인 인구 = 일본인 281 + 외국인 경영(장로회와 감리회) 7,404 + 조선인 경영 250 = 7,935 = 7.0% ● 한국인 중 예수교인 = 7,654/88,752명 = 8.6% 1930년대 초반으로 가면 10%가 되고, 소위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자랑하였다. 이후 0%로 소멸했다. 교만은 패망의 원인이다. 서울도 한 때 예수교인 30%를 자랑하다가, 이제 10% 아래로 떨어졌다. 이번 선거 후에 더 감소할 것이다
대구 제중원의 시작, 1898년 "1897년 성탄절에 대구에 도착한 존슨(Woodbridge Odlin Johnson 張仁車, 1869~1951) 의사는 이듬해 의료 도구와 약품이 도착하자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1899년 남산 언덕인 동산동에 선교부지를 마련하고 ‘미국 약방’을 개설했으며, 12월 남성로 교회당 터 한옥에 ‘제중원’을 개설했다. 서자명이 조수겸 통역으로 도왔다." (옥성득, [근간])에서.)
안동 성소병원(베이커기념병원), 1916, 1958 "1909년 플레처(A. G. Fletcher) 의사가 안동 선교지부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1910년 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존슨 의사 대신 대구 제중원을 맡았다. 1911년 3월 안동에 온 플레처는 큰 기와집을 개량하여 진료소로 개원하여 많은 환자를 진료했으나, 9월에 대구에 임명되었다. 그 후임은 스미스(Roy Kenneth. Smith) 의사로 1911년에 내한하여 세브란스에서 인턴 과정을 밟은 후 1912년 10월 안동으로 내려와 1919년 11월까지 7년간 근무했다. 이때 그는 뉴욕의 쇼플러 부인(Mrs. A. F. Schauffler)이 기부한 10,000달러로 1914년 지하실을 갖춘 3층 벽돌 건물 30x70자, 20개 병상의 베이커기념병원(Cornelius Baker Memor..
전라도 교회의 양적 성장, 1905-1908 1905-06년과 1907-08년 중 언제 더 많이 성장했을까? 일단 전라도의 남장로회만 보면 1905-06년에 더 성장했다. 대부흥운동으로 교회는 크게 성장했으나, 그보다 러일전쟁 이후 한국이 일본의 반식민지가 된 1905년 전후 1년간 더 급성장했다. 1905-06 기간에 놀랍게도 약 300% 성장했다. 다만 학교와 학생 수는 1907-08년에 크게 증가했다. 통계 수치는 매년 8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