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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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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으로 기독교가 성장했을까? [삼일절이 다가오니] 질문: 3.1운동으로 기독교가 성장했을까? 많은 교회사 책과 교회사가들이 그렇게 주장하나, 사실이 아니다.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교육사업에 투자한 감리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1) 1910-15년; 조선 내 인구 증가 786,221명 = 4.75% 증가 북장로회 60,000 --> 65,000명으로 증가, 8.3% [인구 증가율 상회] 북감리회 25,000 --> 21,000명으로 감소 남감리회 10,000 --> 7,500명으로 감소 합계 95,000명 --> 93,500명으로 마이너스 성장 캐장, 남장, 호장 다소 성장했으나, 전체적으로 인구 증가율에는 미치지 못했다. (2) 1915-20년: 조선 내 인구 증가 527,226명 = 3.04% 증가 북장 65,000 -..
칼뱅, “교회 개혁의 필요성” (De necessitate reformandae ecclesiae), 1543 교회 개혁을 위한 칼빈의 이 논문은 이후 개신교 개혁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의 하나로 남아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선포하고, 성례(세례와 성찬)를 신실하게 베풀어야 한다. 이 본질에서 떠나는 교회는 타락하고 세속화된다. 예배, 신학(구원론), 성례, 교회 정치의 개혁이 긴급하다. 세상 개혁 이전에 교회를 개혁해야 세상도 산다. 개혁하는 교회가 Protestants이다. 1543년 독일 쉬파이에르에서 모인 신성로마제국 국회에 제출한 이 논문의 목적은 교회 개혁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밝히는 것이다. 이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서언 1장 본서의 과제 2장 그리스도교의 기초 3장 진실한 예배와 잘못된 예배 4장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5장 성례전 6장 교회의 통치에 관한 제 문제 7장 개혁운..
신사참배로 가는 길 옥성득, "신사참배로 가는 길," (2019년 11월호) 1938년 장로교회의 신사참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38년 9월 10일 평양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에서 참배를 결의하고 부총회장과 노회장 전원이 평양 신사에 가서 절한 것은 대세를 따라간 교회와 일제의 압력에 지치고 굴복한 노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1938년 9월 10일 오전 9시 반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 제2일째 회의가 열렸다. 27개 노회 대표 171명(목사 86명, 장로 85명)과 선교사 22명, 총 193명의 총대가 참석했다. 일제 수뇌부는 미리 친일파 이승길, 평북노회장 김일선 등과 신사참배를 결의하기로 합의했으므로, 이시다 센타로(石田千太郎) 평남도지사, 경찰부장, 고등과장, 경무과장, ..
1938 일본 이세신궁 신사참배 한국기독교 대표 5인 양주삼, 김종우, 이명직, 홍택기, 김길창 바로 1938년 9월 10일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홍택기와 김길창을 비롯해 이미 신사참배를 하던 감리교회의 양주삼과 김종우, 그리고 친일에 앞장 선 성결교회의 이명직은 그 상으로 열흘간 일본 여행을 한다. 김종우는 일제의 혜택을 하나님의 혜택으로 왜곡했다.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 "완전한 일본주의적 기독신자"로서 이세신궁, 명치신궁, 정국신사 등 일본 내지 신사들을 순례하고 참배했다.
1919년 3월 3일 맹산 대학살 사건 (53명 살해): 수정 보완 맹산 대학살, 1919 1919년 3월 3일 [평안북도] 맹산 마을에서 몇 명의 일본인 군인들이 마을 시위 지도자를 체포한 후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헌병 지소로 연행해 갔다. 마을 사람들은 혹시 함께 가면 지도자를 석방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군인들을 따라 헌병지소까지 갔다.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헌병지소 마당 안으로 들어오게 허락한 후, 문을 걸어 잠갔고, 이어서 총을 난사하여 모든 주민을 잔인하게 죽였다. 56명이 총질을 당했으나, 3명이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왔다. 사망한 53명 중 15명은 여성이었다. An Open Letter by the Korean Women (1919), p. 2. 이 자료만 있어서 일본 선교사들도 과연 이것이 사실이었을까 의심했다. 다음 마페트(Samuel A...
33인의 한 명인 김창준 목사 사진 발굴 김창준(金昌俊, 1890. 5. 23 ~ 1959. 9. 29) 초기 감리교 목사이자 3.1운동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의 한 명. 그의 사진은 신학교 졸업 앨범에 나오는 희미한 사진이나 웹사이트에 나오는 삼일운동 재소자 카드 사진, 그리고 미국 유학/목회 시절 단체 사진에 나오는 얼굴만 알려져 있다. 에 있는 그의 소개를 보자. 평안남도 강서 출생. 강서군 반석면의 소학교와 평양 숭실중학, 그리고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을 수료하였다. 18세 때 미국인 선교사 문약한(文約翰, Moore,J. W.)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평양 중앙교회·박구리교회 등에서 시무하다가, 1919년 3ㆍ1운동 때 33인 중 가장 어린 나이로 독립선언서 서명하고 참가하였다. 2월 28..
삼일운동 때 감옥에 갔던 이화여대/학당 학생들 이 한 장의 사진, 1920 없는 사람: 유관순
1959 예장 합동 통합의 분열과 관련 문서들 1 1958-59년 한국 장로교회의 통합과 합동의 분열은 다음과 같은 주요 문서와 함께 진행되고 정리되었다. 합동은 WCC의 신신학과 용공성을 주장했다. 통합측은 박형룡의 재정 부정 지출을 문제 삼았다. 제 44회 대전총회 총대 선정 문제도 한 요인이었다. A. 1958, 예장 43회 총회 에큐메니칼운동반대 WCC 탈퇴 건의서 WCC를 지도하는 간부 및 신학자들의 거의 전부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치 않습니다. 그 실정은 1954년 에반스톤에서 모인 WCC의 신앙적 기초에 '성경에 기초하여' 신앙을 고백하는 교파의 친선을 도모한다는 조문을 삽입할 것을 헌의하였으나 완전히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재림을 부인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으며 동정녀 탄생과 그의 육신적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B. 1959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