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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3.1운동 (1919)

1919년 3월 3일 맹산 대학살 사건 (53명 살해): 수정 보완

맹산 대학살, 1919

1919년 3월 3일 [평안북도] 맹산 마을에서 몇 명의 일본인 군인들이 마을 시위 지도자를 체포한 후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헌병 지소로 연행해 갔다. 마을 사람들은 혹시 함께 가면 지도자를 석방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군인들을 따라 헌병지소까지 갔다.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헌병지소 마당 안으로 들어오게 허락한 후, 문을 걸어 잠갔고, 이어서 총을 난사하여 모든 주민을 잔인하게 죽였다. 56명이 총질을 당했으나, 3명이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왔다. 사망한 53명 중 15명은 여성이었다.  

An Open Letter by the Korean Women (1919), p. 2.

이 자료만 있어서 일본 선교사들도 과연 이것이 사실이었을까 의심했다. 다음 마페트(Samuel A. Moffett)의 자료가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맹산 지역은 원래 마페트가 개척한 곳으로 당시엔 필립(Charles L.Phillip) 목사가 담당하고 있었다. 마페트는 다섯 가지 독립된 증언과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이 50여 명의 살해된 자들이 모두 천도교인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새로운 사실이다. 

당시 부근에 있었던 전도부인의 증언, 감옥에서 현장을 본 두 명을 만난 사람들의 각자 별도 증언, 마페트가 맹산 부근 마을에 갔을 때 현장을 본 사람의 증언, 현장을 본 한국인 경찰이 사직 후 증언 등이다.  

이 밖에도 다른 증언들을 수집한 마페트는 다음과 같이 추가 사실을 적었다. 일본인 경찰이 한국이 여성을 강간한 사례는 평안도에서 한 건 보고되었다. 강간 미수도 보고되었다. 따라서 보고되지 않는 사건까지 합하면 몇 건의 강간이 자행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더 심했다.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일제의 만행 중 가장 비극적이요 잔인한 학살이다. 작년에 이 내용을 다른 자료에서 본 후 오늘 다시 동일 내용을 이 여성들이 만든 이 작은 화보집  팸플릿에서 본다. 여성의 관점에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이것이 일제 통치의 실상이었다. 우리는 식민지 시절의 고난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난 속에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일제 시대 학살이 없었다는 말은 거짓이다. 제암리 사건보다 더 무자비한 학살이 1919년 3월 3일 평안도 맹산에서 일어나 마을 주민 53명이 무방비 상태에서 학살되었다. 

An Open Letter by the Korean Women (1919), p. 7. 서울에서 수원[제암리?]으로 가는 길에 죽어 있는 한 여학생 

 

평북 지도에서 맹산의 위치를 확인해 본다. 평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북장로회 구역이었다.

제암리 사건보다 한 달 전에 일어난 더 큰 만행이었다. 53명 무고한 마을 사람들을 한 자리에서 개처럼 사살했다. 그러나 평안북도 산골에서 일어난 일이라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수원 제암리는 서울에서 가까워서 AP 테일러 기자와 선교사들이 알렸기 때문에,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맹산 학살은 겨우 나중에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통해 알려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런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알리고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