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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3.1운동 (1919)

33인의 한 명인 김창준 목사 사진 발굴

김창준(金昌俊, 1890. 5. 23 ~ 1959. 9. 29)

초기 감리교 목사이자 3.1운동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의 한 명. 그의 사진은 신학교 졸업 앨범에 나오는 희미한 사진이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웹사이트에 나오는 삼일운동 재소자 카드 사진, 그리고 미국 유학/목회 시절 단체 사진에 나오는 얼굴만 알려져 있다. 

<민족대백과사전>에 있는 그의 소개를 보자.

평안남도 강서 출생. 강서군 반석면의 소학교와 평양 숭실중학, 그리고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을 수료하였다.

18세 때 미국인 선교사 문약한(文約翰, Moore,J. W.)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평양 중앙교회·박구리교회 등에서 시무하다가, 1919년 3ㆍ1운동 때 33인 중 가장 어린 나이로 독립선언서 서명하고 참가하였다. 2월 28일 함태영(咸台永)으로부터 이종일(李鍾一)이 인쇄한 조선독립선언서 900매를 받아, 이 중 600매를 이갑성(李甲成)에게 건네주고 나머지 300매는 경성화상점(京城靴商店) 사무원 이계창(李桂昌)을 시켜 평안북도 선천으로 운반하였다.

이 사건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21년 12월 최린(崔麟)·함태영·오세창(吳世昌)·권동진(權東鎭)·이종일·한용운(韓龍雲) 등과 함께 가출옥하여, 주로 서울 감리교 중앙예배당에서 설교와 강연을 하였다.

1924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1926년 귀국하였다. 목사로 있는 중앙교회뿐만 아니라 서울 상동교회·성북동교회·석교교회 등을 돌며 설교를 계속하였고,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순회강연 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45년 12월에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에 평안북도 대표로 참여하였고, 1946년 2월에는 좌익계의 민족통일전선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을 역임하였다. 1948년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직에 올랐으며, 1950년에는 서울에서 남선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여 그 위원장을 맡았다. 6ㆍ25전쟁 후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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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미국 드루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미국 연합감리회역사센터가 공개한 한국 감리교회 앨범에 나오는 김창준 사진이다. 감옥에서 출옥한 후 1922년 7월 경 종로 중앙감리교회에서 목회할 때 촬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 Board of Mis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 “Mission Photograph Album - Korea #04 page 0087.jpg,” UMC Digital Galle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