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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3.1운동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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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으로 기독교가 성장했을까? [삼일절이 다가오니] 질문: 3.1운동으로 기독교가 성장했을까? 많은 교회사 책과 교회사가들이 그렇게 주장하나, 사실이 아니다.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교육사업에 투자한 감리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1) 1910-15년; 조선 내 인구 증가 786,221명 = 4.75% 증가 북장로회 60,000 --> 65,000명으로 증가, 8.3% [인구 증가율 상회] 북감리회 25,000 --> 21,000명으로 감소 남감리회 10,000 --> 7,500명으로 감소 합계 95,000명 --> 93,500명으로 마이너스 성장 캐장, 남장, 호장 다소 성장했으나, 전체적으로 인구 증가율에는 미치지 못했다. (2) 1915-20년: 조선 내 인구 증가 527,226명 = 3.04% 증가 북장 65,000 -..
1919년 3월 3일 맹산 대학살 사건 (53명 살해): 수정 보완 맹산 대학살, 1919 1919년 3월 3일 [평안북도] 맹산 마을에서 몇 명의 일본인 군인들이 마을 시위 지도자를 체포한 후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헌병 지소로 연행해 갔다. 마을 사람들은 혹시 함께 가면 지도자를 석방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군인들을 따라 헌병지소까지 갔다.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헌병지소 마당 안으로 들어오게 허락한 후, 문을 걸어 잠갔고, 이어서 총을 난사하여 모든 주민을 잔인하게 죽였다. 56명이 총질을 당했으나, 3명이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왔다. 사망한 53명 중 15명은 여성이었다. An Open Letter by the Korean Women (1919), p. 2. 이 자료만 있어서 일본 선교사들도 과연 이것이 사실이었을까 의심했다. 다음 마페트(Samuel A...
33인의 한 명인 김창준 목사 사진 발굴 김창준(金昌俊, 1890. 5. 23 ~ 1959. 9. 29) 초기 감리교 목사이자 3.1운동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의 한 명. 그의 사진은 신학교 졸업 앨범에 나오는 희미한 사진이나 웹사이트에 나오는 삼일운동 재소자 카드 사진, 그리고 미국 유학/목회 시절 단체 사진에 나오는 얼굴만 알려져 있다. 에 있는 그의 소개를 보자. 평안남도 강서 출생. 강서군 반석면의 소학교와 평양 숭실중학, 그리고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을 수료하였다. 18세 때 미국인 선교사 문약한(文約翰, Moore,J. W.)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평양 중앙교회·박구리교회 등에서 시무하다가, 1919년 3ㆍ1운동 때 33인 중 가장 어린 나이로 독립선언서 서명하고 참가하였다. 2월 28..
삼일운동 때 감옥에 갔던 이화여대/학당 학생들 이 한 장의 사진, 1920 없는 사람: 유관순
1922 상해조선인예수교회 장정과 치리 다음은 기미년 삼일운동 후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진 후 3년이 지난 즈음 상해에 설립된 상해조선인예수교회가 만든임시 장정 전문이다. 1922년 4월 26일자. 교회 헌법을 제정하여 교인들에게 포고했다. 1조 교회 조직 2조 교회 교인 3조 교회 직원 4-8조 치리와 권징 9조 타지 교회들(소주, 남경, 천진)에도 이 장정을 일체 시행 10조 장정 변경 가능 ​ 여기서 교회 장정의 대부분이 치리와 권징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법은 치리와 권징이 주가 되어야 함을 잘 보여준다. 독립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 ​ 8조에 규정한 권징 대상자를 보자. 1. 계명을 범하는 자 [십계명을 범하는 자] 2. 잡기(노름 등)하는 자 3. 아편 장사하는 것과 아편을 먹는 자 (아편연을 피우는 ..
임정은 삼일절이나 임정수립일을 건국일로 기념했는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질문 1. 1920년 3월 1일부터 임정은 삼일절을 어떤 경축일(국경일)로 기념했나? 질문 2. 1919년부터 개천절은 어떤 경축일로 기념했나? 2번부터 보자. 1919년 11월 27일자 상해 독립신문이다. 11월 21일(음력 10월 3일) 삼일당에 모여 건국기원절을 경축했다. 대종교인들이 주최했지만 동포들이 함께 참석했다. 민단 총무 양제헌 사회로 애국가를 합창하고, 박은식, 조완구, 안창호의 연설이 있었다. 기독교인들도 다 한민족이 단군의 자손이므로 이 날을 경축해야 한다고 믿었다. 안창호는 다 같은 단군의 자손임을 강조하고 "合하면 立하고 分하면 倒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래 1920년 달력에서 2번 독립 기념일에서도 개천절을 양력..
[상해 임시정부 첫 청사는 어디에 있었나?] [상해 임시정부 첫 청사는 어디에 있었나?] 잊혀진 설립일과 첫 정청[청사]의 위치옥성득 2016. 2. 15. 14:54 현재 상하이에 새로 꾸민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된 작은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1919년 4월 13일 프랑스 조계 안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할 당시 사용한 첫 정청(청사)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첫 청사에 대해서 독립기념관에서 조사해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본래 위치나 주소를 잘 모르는 듯하다. 자료 1. 현재 독립기념관 웹 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116) 임시정부 청사 보창로 309호◎ 옛주소 : 상해시上海市 불조계佛租界 보창로寶昌路 ..
1919-1921 상해한인교회 A. 1919년 상하이에 한인교회가 있었을까? 다음 1919년 12월 27일 성탄 행사 기사에 의하면, 조계지 북경로에 있었다. 피치(Gorge Field Fitch)목사가 주선해 준 베이징루(北京路) 18호에 위치한 ‘북경로 예배당’이었다. 아래에서 밝히겠지만, 이것이 1921년 프랑스 조계지 안 '삼일당'으로 옮겨 가게 된다. https://search.i815.or.kr/subService.do 1920년 상하이 지도에서 북경로를 확인해 보자. 남경로(Nanking Road)가 번화가였고, 그 위에 북경로(Peking Road)가 있었다. 한인 교회는 이 거리 어딘가에 있었다. (추가 조사 요) 1920년 상하이의 모습이다. B. 1920년 말 교인 수와 지도자는?1920년 말 남녀교인 183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