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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3.1운동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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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2월 세브란스 간호부들의 만세 시위로 징역 6개월 형 “騷擾犯 四名, 뎨일심에 불복하고 다시 공소 신립,” , 1919년 12월 29일 (3면 7단). 당시 시위에 참여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부르면 징역 6개월 형에 처해 졌다. “소요범 4명, 제일심에 불복하고 다시 공소 신립,” , 1919년 12월 29일 (3면 7단). 소요범 4명 제일심에 불복하고 다시 공소 신립남대문동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 박덕혜(朴德惠, 20세), 노순경(盧順敬, 18세), 이도신(李道信, 19세), 김효순(金孝順, 18세)은 모두 예수교인인데, 일찍이 조선 독립을 희망하고 12월 2일 경성부 훈정동 대묘 앞(薰井洞 大廟前)에서 많은 군중이 집합하여 독립운동을 선전한다는 말을 듣고, 때가 왔다 하여, 구한국기와 조선 독립 만세라고 쓴 큰 기를 들고, 그날 오후 ..
1919 혈성단 애국부인회가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되다 “獨立婦人會 濫膓은 血誠團 愛國婦人會,” , 1919년 12월 19일 (3면 9단). 1919년 4월 재령 명신여학교의 교사 오현관(吳玄觀)과 그 자매로 군산 Mary Baldwin 여학교 교사로 있던 오현주(吳玄洲)와세브란스병원 간호부 이정숙, 동대문부인병원 간호부 김태복 등은 수감자를 돕기 위해 혈성단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위문했다. 이것이 여성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부인회의 남상(시원, 출발)이었다. 이는 예수교 부인회였다. “독립부인회 남상은 혈성단 애국부인회,” , 1919년 12월 19일 (3면 9단).삼월 일일 소요가 발발한 이래 다수의 예수교도가 구금되자 원래 황해도 재령 예수교 부속 명신여학교의 교사로 있던 오현관(吳玄觀)과 그 자매로 원래 전라북도 군산 예수교 부속 메리불덴(Mary B..
33인 중 기독교인 16인 33인 중 기독교인 16인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사진에서 확인하고 도표에서 소속을 확인해 봅시다. 모두 18개월-36개월 옥살이를 하신 분들입니다.2 길선주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 (장) 3 이필주 (서울) 정동제일교회 목사 (북감) 6 김병조 (정주) 목사 (장) 7 김창준 (강서) 목사 (북감) 12 양전백 (선천) 선천교회 목사 (장)14 유여대 (의주) 의주교회 목사 (장) 15 이갑성 (대구) 세브란스병원 서기 (장) 16 이명룡 (철산) 장로 (장) 17 이승훈 (정주) 장로 (장)22 박희도 (해주) YMCA 간사 (북감) 23 박동완 (포천) 기독신보사 서기 (북감) 24 신홍식 (청주) 목사 (북감) 25 신석구 (청원) 목사 (남감) 27 오화영 (평산) 목사 (남감) 28 정춘수 (..
좀비와 삼일절 좀비와 삼일절지난 10년 간 좀비 영화는 그 이전과 달리 잠재적 희망을 암시하는 결말을 보여주었다. 희망마저 사라진 21세기 종말 후기 사회에서, 모두 강시가 되어 악의 진부성(banality), 생의 무의미성, 미래의 부재를 받아들이며 하루를 꾸역꾸역 산다. 난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단추를 눌렀을 뿐, 가스실에서 죽어 간 수 만 명을 내가 죽인 것은 아니다. 그저 까라고 해서 깐 것뿐이다. 허나 “No”라고 말하는 소수의 좀비가 생존하여 언덕을 넘어가고 ‘부산행’에 성공한다.개혁과 혁명이 불가능한 세상, 후천개벽도 하나님 나라도 무의미한 단어가 되어 버린 2019년의 상황에서, 매달릴 일은 “스카이 캐슬” 헛된 성의 연장, 학벌과 재벌과 권력벌 축적이다.그러나 sky가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1919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단 [이 한 장의 사진]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한국인 대표단과 아인슈타인. 오른쪽 앉은 이가 김규식.다음 필라델피아 한국인 유학생회가 발행한 잡지에 실렸다.이 월간지는 삼일운동 연구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자료이다. 1면에 헐버트의 글이 실렸다.
1919 숨어 있는 선교사 [삼일운동과 선교사의 사전 참여 문제] 숨어 있는 선교사 일제 경찰은 기독교인 시위 뒤에는 선교사의 지시, 가르침, 도움 등 직접 연관이 있다고 믿고, 평양 숭실의 모우리를 구금하고 2주일간 심문했다. 대부분 선교학교 학생 지도자들이 선교사 집에서 선언문을 등사하고, 시위를 계획하고, 연락하고, 시위를 주동하는 행동대원이었으며, 시위 후에도 선교사 집에 숨어 있었기에, 그 관련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왜 일제는 그 연관성을 밝히려고 그렇게 노력했을까?선교사들은 이구동성 시종일관 그 연관성을 부정했다. 사전 인지를 극구 부인했다. 왜?요즘 기독교인들은 삼일운동과 선교사와의 연관성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선교사가 제국성을 벗고 민족성을 가진다고 보는 모양이다. 어제 피디도 나에게 심증을 넘어 다른..
1949. 3. 1절 30주년 김구 주석의 기념사 조선일보, 1949년 3월 1일자 우리는 이제 三十周의 三·一節을 마지하게 되었다. 도라보건대 三十年前 이 날은 우리 조국이 倭敵의 暴壓과 搾取 下에서 可憐한 同胞들이 膏血을 빨리고 生命까지 빼앗긴 일은 있었지만 少數의 倭敵의 走狗를 除하고는 同族끼리 殺害한 일은 없었든 것이다. 우리는 倭敵을 打倒하고 祖國의 自主獨立을 奪還하자는 가장 勇敢하고도 가장 革命的인 目的을 爲하여 全 民族이 一致團結하여 共同爭鬪하였든 것이다. ​[중략]嚴肅한 良心이 命하는대로 愛國愛族의 三一精神으로써 完全 自主의 獨立祖國을 再建하기를 또 한 번 새롭게 決心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決心을 實現하기 위하여 平和的 手段으로써 祖國의 統一 獨立을 完遂하자. 우리가 政治上의 獨立을 達成하여도 經營上의 破滅을 謀免하려 하여도 唯一..
1919년 3월 1일 첫 독립 만세를 부른 곳은 평양 1919년 3월 1일 첫 독립 만세를 부른 곳은 평양3월 1일 만세 시위지는 일곱 곳뿐이었다. 시간대 별로 보면 평양 1시에 이어 2시에 서울, 선천, 의주, 진남포, 원산, 5시에 안주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참가한 인원은 평양 3,000 여 명, 서울 3-4천명, 선천 1,000 여 명, 의주 1,000여 명, 원산 7,8백명, 진남포 500여 명, 안주 170-180명. 교파별로 보면 북장로회 5(평양, 선천, 의주, 안주, 서울), 북감리회 3 (평양, 진남포, 서울), 남감리회 1(원산) 등이었다. 함흥(캐장)은 1일 거사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2일에 시위가 발생했다. 따라서 평안도 평양-안주-선천-의주 지역 북장로회 교인들이 3,200명(평양 1,000 이상+ 선천 1,000 + 의주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