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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신사참배 (19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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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로 가는 길 옥성득, "신사참배로 가는 길," (2019년 11월호) 1938년 장로교회의 신사참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38년 9월 10일 평양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에서 참배를 결의하고 부총회장과 노회장 전원이 평양 신사에 가서 절한 것은 대세를 따라간 교회와 일제의 압력에 지치고 굴복한 노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1938년 9월 10일 오전 9시 반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 제2일째 회의가 열렸다. 27개 노회 대표 171명(목사 86명, 장로 85명)과 선교사 22명, 총 193명의 총대가 참석했다. 일제 수뇌부는 미리 친일파 이승길, 평북노회장 김일선 등과 신사참배를 결의하기로 합의했으므로, 이시다 센타로(石田千太郎) 평남도지사, 경찰부장, 고등과장, 경무과장, ..
1938 일본 이세신궁 신사참배 한국기독교 대표 5인 양주삼, 김종우, 이명직, 홍택기, 김길창 바로 1938년 9월 10일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홍택기와 김길창을 비롯해 이미 신사참배를 하던 감리교회의 양주삼과 김종우, 그리고 친일에 앞장 선 성결교회의 이명직은 그 상으로 열흘간 일본 여행을 한다. 김종우는 일제의 혜택을 하나님의 혜택으로 왜곡했다.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 "완전한 일본주의적 기독신자"로서 이세신궁, 명치신궁, 정국신사 등 일본 내지 신사들을 순례하고 참배했다.
1941 토왜 목사 곽진근: 신사참배 독려 40대에 총회장이 되었으나 급사 곽진근(郭塡根, 일본식 이름: 牧野道雄, 1897-1941) 전북 김제 출신이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 불(W.F. Bull 부위렴)의 전도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만경보통학교, 전주농업학교를 거쳐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1924년에 졸업하고 전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완주의 삼례읍교회, 김제의 금산교회, 원평교회 등에서 시무했다. 1937년 정읍의 신태읍교회, 화호교회로 옮겨갔다.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에서는 서기를 맡으며 장로교단 내에서 입지를 쌓아갔다. 1938년 화호교회 당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전북노회에 신사참배 결의안을 제출하는 등 신사참배 강요에 앞장서서 동조한 목회자였다. 전북노회는 곽진근의 건의를 받아들여 헌의했으며, 결국 1938년 9월 제2..
1938년 6월 초의 신사참배 진행 상황 한 선교사가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낸 정기 선교 편지이다. 누가 보낸 글인지 찾으면 올리겠다. 초록색 박스 안에 현재 조선장로교회 안에서 진행된 각 노회별 결정과 궁성요배(천황숭배), 신민 서사 제창, 일장기 경례, 신사참배 관련 실천 양상이다. 일단 동방요배는 살아 있는 천황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거의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이 동의하고 실천했다. 신민서사 암송이나 일장기 경례도 수용했다. 그러나 기실 엄격한 잣대로 보면 황제 숭배는 로마 시대나 1930년대 말이나 현현신에 대한 숭배(예배)였기에 신사에 가서 절하는 것과 별로 다름이 없었다. 기미가요를 부르고 군주의 치세는 천대부터 팔천대까지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황국신민 맹세를 했다.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