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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행 洋行 양행 洋行의 뜻 1. 중국 청나라 때에, 외국과의 무역을 독점하였던 관허 상인(官許商人)들이 결성한 조합. 2.서양으로 감. 3. 주로 외국과의 무역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서양식 상점. 제물포에는 世昌洋行이 있었다. 조선 고종 20년(1883)에 독일 마이어 상사가 제물포에 설립한 무역 상사. 강원도 금성의 당현 금광 채굴권을 획득하였으며, 인천에서 상하이(上海)를 거쳐 홍콩에 이르는 기선 정기 노선을 운영했다. 1904-05년 영문판을 보면 싱거 재봉틀 Singer sewing machine 선전이 나온다. 제물포의 함릉거(Holme Ringer) 양행이 판매했다. 그 옆에는 뉴욕에서 수입한 연유(condensed milk)를 광고하는 세창양행(E. Meyer & Co)의 광고. 1909년 평양에는 서..
평양 1926년 예수교인 통계 평양 1926년 1월과 서울 100년 후 다음 책 평양부, (평양, 1926.10)에 따르면 ● 종교 인구 = 23,149/112,929명 = 20.5% (일본인 중 신도 신자, 불교 신자가 많아서) ● 예수교인 인구 = 일본인 281 + 외국인 경영(장로회와 감리회) 7,404 + 조선인 경영 250 = 7,935 = 7.0% ● 한국인 중 예수교인 = 7,654/88,752명 = 8.6% 1930년대 초반으로 가면 10%가 되고, 소위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자랑하였다. 이후 0%로 소멸했다. 교만은 패망의 원인이다. 서울도 한 때 예수교인 30%를 자랑하다가, 이제 10% 아래로 떨어졌다. 이번 선거 후에 더 감소할 것이다
전라도 교회의 양적 성장, 1905-1908 1905-06년과 1907-08년 중 언제 더 많이 성장했을까? 일단 전라도의 남장로회만 보면 1905-06년에 더 성장했다. 대부흥운동으로 교회는 크게 성장했으나, 그보다 러일전쟁 이후 한국이 일본의 반식민지가 된 1905년 전후 1년간 더 급성장했다. 1905-06 기간에 놀랍게도 약 300% 성장했다. 다만 학교와 학생 수는 1907-08년에 크게 증가했다. 통계 수치는 매년 8월 말.
일제 36년간 장대현교회 강단 위 천장에 태극기 숨기고 설교 [자료 발굴] 김성여, "길선주 목사," 제9권 10호(1954년 10월): 162~166. 1945년 8월 19일 해방 후 첫 주일 평양 장대현교회 강단에 오른 김화식 목사의 손에는 커다란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김화식 목사는 말했다. "이 태극기는 일한 합방하던 경술[1910년] 8월 29일에 우리 장대재 예배당 강당 위 천장 밑에 숨겨두어던 것입니다." 감격의 눈물, 환호하는 함성, 흥분의 박수는 예배당이 떠나가는 듯하였다.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 장대재교회는 평양에서도 최고 최대의 교회요, 과거 반세기 동안 전국 교회를 영도하던 본산이었다. 일제 36년 그 무서운 침략 정책 밑에서도 그 꼭대기에 태극기를 비장하고 있었다. 그 태극기를 숨긴 이는 길선주였다. 국망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를..
시골 빈대, 서울 빈대 최정숙, "평양 연광정에 각도 빈대들이," 대한매일신보, 1908. 7. 30. 서울 빈대는 살지고 빛깔도 곱다. 여러 양반들과 부자들의 호의호식하는 꿀같은 단피를 빨아 먹기 때문이다. 이를 알게 된 시골 빈대들이 깨닫기를, 서울 양반들이 시골에 와서 수령이나 방백으로 와서 각도 백성의 피를 다 빨아 먹은고로 살이 많이 쪘으니, 그 놈들을 빨아먹으러 서울로 가서, 그 좋은 피를 다 빨아먹어 전일 원수를 갚아야 겠다고 결정, 대표를 서울로 보내니, 시골 빈대들이 서울로 몰려들더라. 왜 시골 빈대들이 서울이 아닌 평양에 다 모여서 의논을 했을까? 당시 평양은 대부흥운동 후 기독교인이 늘어나고 있었다. 평양 대표들이 왜 서울로 가서 백성을 압제한 관찰사와 군수들을 비판하며 성토했을까?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장대현교회, 1901 [1901년 당시] 미국 장로교인은 1년에 교인 1인당 평균 16달러 헌금 한국 장로교인은 환산하면 1인당 18달러를 연보했다. (지금으로 치면 약 1,800달러 = 234만 원에 해당한다.) 1901년 북장로회 총회는 뉴욕 카네기 홀(1891년 완공)에서 열렸으나, 한국에는 노회도 없었고, 평양 교인들이 연보하여 장대현교회를 세웠다. 장대현교회에서 1907년 첫 노회, 1912년 첫 총회로 모였다. 한국인들이 자립으로 세운 예배당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장대현에서는 기도하러 모였고, 카네기홀에서는 회의하고 공연을 보려고 모였다. 카네기 홀
파친코 8부: 기억 담론 시즌 1을 보고: 어떤 기억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가? 줄거리 고한수와 노아: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힘(활과 화살)과 돈(동전)을 가진 성공자가 되려면 교육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라가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 = 사회진화론자로 지배층/식민제국의 논리를 수용한다. = 그러나 지배층에 들어갔다고 착각하다가 결국은 소외된다. 백이삭과 모세: 병골이지만 오래 살아남기(생존)을 추구하고 다같이 잘 사는 세상(공생)을 꿈꾼다. 그러나 식민 제국주의자들은 한국 민중들이 힘을 합해 신세계를 상상하는 싹을 잘라버린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기운 백 목사는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죽는다. 형의 길을 따라갔다. 모세는 돌찬치에서 붉은 실타래를 집..
[파친코 7부] 관동대지진이 냉혈한 고한수를 만들다 에피소드 1 제7회 1923년 9월 1일 동경대진재가 발생, 일본인 10만 명이 사망한다. 야쿠자 료치의 사무실에서 회계를 보던 한수의 아버지(고종열)가 사망한다. 지진 첫날 네기시 교도소가 파괴되어 불령 조선인들이 탈옥하여 거리로 나와 약탈하고, 여자들을 폭행하고, 우물에 독을 넣는다는 소문이 나돈다. 폭도들이 조선인 집들에 가서 방화하고 산 채로 태워서 살해한다. 홈즈 씨 가정 일본에서 거부로 사는 홈즈 씨 부부. 문제는 아들이 변변치 않아 공부를 못해 한수를 수학 과외선생으로 채용하고, 아들 앤드류는 예일에 가도 공부를 못하니 한수를 미국에 데리고 가자고 한다. 고종열과 아들 한수의 대화: 제주 방언을 현대어로 옮김 아버지는 셈이 빠르다. 이민자는 셈이 빨라야 산다. 아버지는 한수가 수학도, 영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