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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6월 26일 쉐핑의 죽음에 대해 쉴즈 간호부가 쓴 조사 Esther Lucas Shields, "엘니사베스 쩨 쉬핑 양의 약력," 32호 (1934): 27-30. 쉐핑 양은 1880년 9월 26일 독일에 출생하셨는데, 그의 부친은 양이 연소할 때 이미 별세하였으므로, 유년기는 대부분 자기 조모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11세 되는 해에 동 양은 모친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의 고등학교를 필한 후, 성누가병원의 간호과를 21세 전에 전공하시고, 당분간 브루클린쥬이쉬병원에 수간호원으로 시무하시다. 그 후에는 뉴욕 시 성서사범학교(현재 비블리컬신학교)를 [이하 생략]
1911 대구 천주교회와 장로교회 대구 천주교회는 프랑스 신부의 위세로 자리를 잡았다. 명동성당처럼 고딕 양식으로 수직성을 강조했다장로교회는 서울의 승동, 연동, 새문안 교회들처럼 실용성을 강조하여 적은 예산으로 지을 수 있는 장방형에 높은 첨탑이 없는 회중 집회 중심, 한식과 양식의 절충식으로 건축했다.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 옥성득,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 , 2018년 9월해방 이전 자료를 보면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고,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은 1934년 선교 희년 기념식 때 동아일보에 처음 사용되었다. (“朝鮮의 예루살렘 平壤에: 十字軍의 閱兵式,” 『東亞日報』, 1934년 9월 5일.) 그러나 1925년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에서 보듯이 당시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1920년대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에 접근함으로써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려고 한다. 평양 기독교의 성장: 소돔에서 예루살렘으로1915년 평양에서는 일요일에 거의 모든 사업장이 문을 닫았다. 인구 6만의 10%인 6천 명의 ..
1866년 평양 양란(洋亂)과 토마스의 순교, 그 해석사 옥성득, "1866년 평양 양란(洋亂)과 토마스의 순교, 그 해석사," , 2019년 1월 평양 기독교 역사는 1866(병인, 고종 3)년 9월의 평양 양란(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Robert J. Thomas, 1840~66) 목사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지난 150년간 토마스 사건은 몇 번의 계기를 통해 재구성되면서, 신학교 교회사 교수 중심의 ‘선교사--순교설’과 일반대 한국사 교수 중심의 ‘제국주의자--처형설’이 대립하는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해방 이전에는 토마스의 죽음을 무모한 선교로 비판하다가 순교로 기념하는 쪽으로 바뀌었고, 해방 이후에는 찬양--비판--찬양이 교차하고 있다. 평양 교회사는 출발부터 논쟁사인 셈이다. 이 글은 자료 문제를 거론한 후, 지면 관계로 100주년이던 1966년..
이용민, 해방 이전 평양의 기독교 교세 이용민, "해방 이전 평양의 기독교 교세," 2019년 1월 해방 이전 평양의 기독교 교세 평양의 개념 평양이 기독교와 관련된 최초의 일은 1866년 9월 토마스가 상선을 타고 대동강을 통해 평양으로 들어오고자 하면서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들 수 있다. 그 후 1880년대 『예수성교전서』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한글 번역의 쪽복음이 평양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평양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890년대 초반 이곳에 장로회와 감리회가 각각 선교지부를 개설하기 위해 전담 선교사를 임명하면서부터였다. 해방 이전 평양의 기독교 교세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평양의 공간적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당시 평양에는 1413년에 정비된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
1938 오문환은 왜? [알 수 없는 일]1. 1923년부터 1936년까지 토마스 목사 순교자 만들기에 앞장선 오문환은, 왜, 1938년부터 신사참배와 친일 행위에 앞장섰을까?​2. 왜 한국의 보수적 신학자와 교회사가들은 토마스 목사에 대한 오문환의 논리나 해석을 그대로 따를까? 왜 오문환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침묵할까?1923년 『조선기독교사의 분수령인 평양양란(平壤洋亂)』을 저술한 오문환은 약관의 나이에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1번에 대한 짐작1903년생인 오문환은 1923년 20세로 숭실대 학생이었다. 졸업과 함께 숭의여학교 교사가 되면서 토마스 연구서인 『조선기독교사의 분수령인 평양양란(平壤洋亂)』 저술로 일약 교계 유명 인물이 되었다. 젊었을 때 너무 일찍 떴다. 이후 1938년이면 그의 나이 35세. 평양기독교..
왜 세대 갈등이 일어나는가: 1917 이광수 <무정>에 나오는 김장로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왜 구세대는 무식하고 신세대와 충돌하는가? ​ 1917년 봄 에 연재되고 있던 이광수의 『無情』을 보면 평양 감사를 지낸 아버지를 두어 미국 공사와 국장까지 지낸 서울 교동의 양반 부자 김광현 장로가 나온다. 1917년이면 일본 유학을 다녀온 한국인이 2,000명을 넘을 때였다. 일본 서적이 들어오고 각종 신사상이 유입되고 있었다. 1차세계대전이 마무리되면서 세대주의 종말론도 유행하고,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은 물론, 곧 일어난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도 유입된다. 한국에서 이광수로 대표되는 신지식인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1880-90년대 개화기 초기에 김옥균으로 대변되는 신세대와 구세대의 (한문 세대 간의) 제1차 세대 갈등이 있었다면, 1910년대 후반은 이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