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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22 목포, 신혼의 HOPPER 목사, 두 아이 출산을 광주와 군산에서 2024년 6월 1일 이재근 교수가 한국기독교역사학회에서 발표한 "미국 남장로회 하퍼 선교사 가문의 한국 생활과 선교사역: 전형과 비전형"에 따르면, 하퍼 부부(조셉과 애니스)는 1919년 12월 18일 결혼 후 내한하여, 1921-22년 다음 표 2세대에 있는 두 아이를 낳는데, 1921년 5월 17일 아들 조셉 배런은 광주 제중원에서, 1922년 11월 22일 딸 마디아 메리 알렉산더는 군산 구암병원에서 출산했다. 목포에도 병원이 있었는데, 왜 첫째는 광주에서, 둘째는 군산에서 출산했을까?2-3년 후 잘 자란 아이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는데, 첫째, 1921-22년에 목포 제중원에는 의사가 없었고, 1922년에는 광주에 의사가 있었지만 아마도 그가 산부인과 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
목포의 첫 의료선교사 오웬 목사/의사 가계 1898년 11월 목포에 도착한 목사 오웬(Clement Carrington Owen 吳基元, 1867.7.19-1909.4.3) 의사의 가계를 보면할아버지 William L. Owen (1809.4.29-1882.7.22) + 할머니 Harriet A. Owen(1825. 8.14-1901.12.17)아버지 Robert L. Owen(1846-1872) + 어머니 Mary Grigsby Owen (1847-1912)내한 선교사 사전에는 어머니가 1846년생으로 나오지만, 다음 인구 센서스에는 1947년 생으로 나온다. 오웬은 1867년 7월 19일 Black Walnut / Mays, VA라는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고, 1870년 오웬은 세 살이었고, 동생 메리는 한 살이었다. 아버지의 부동산 가치는 $..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 요 며칠 페친인 목포의 김양호 목사와 순천의 서종옥 장로가 남장로회 선교사들을 파송한 테네시와 버지니아를 돌고 있다. 호남 기독교 역사 발굴에 진심인 두 분이다.그 중에 1892년 7인의 선발대로 호남에서 사역한 최초 선교사 중 한 분인 미스 리니 데이비스(Miss Selina "Linnie" Fulkerson Davis, 1862-1903.6.29)와 관련한 일화.그녀는 7인 중 처음으로 주미공사 이채연 부인(워싱턴디시에서 아들 화순을 낳았으나 곧 사망하여 괴로움에 귀국 결심)과 함께 1892년 10월 18일 서울에 도착했다. 도착 직후 어머니가 10월 28일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 인성부재에서 사역하다가 1898년 6월 9일 해리슨(William B. Harrison, 1866-1928) 목..
양행 洋行 양행 洋行의 뜻 1. 중국 청나라 때에, 외국과의 무역을 독점하였던 관허 상인(官許商人)들이 결성한 조합. 2.서양으로 감. 3. 주로 외국과의 무역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서양식 상점. 제물포에는 世昌洋行이 있었다. 조선 고종 20년(1883)에 독일 마이어 상사가 제물포에 설립한 무역 상사. 강원도 금성의 당현 금광 채굴권을 획득하였으며, 인천에서 상하이(上海)를 거쳐 홍콩에 이르는 기선 정기 노선을 운영했다. 1904-05년 영문판을 보면 싱거 재봉틀 Singer sewing machine 선전이 나온다. 제물포의 함릉거(Holme Ringer) 양행이 판매했다. 그 옆에는 뉴욕에서 수입한 연유(condensed milk)를 광고하는 세창양행(E. Meyer & Co)의 광고. 1909년 평양에는 서..
평양 1926년 예수교인 통계 평양 1926년 1월과 서울 100년 후 다음 책 평양부, (평양, 1926.10)에 따르면 ● 종교 인구 = 23,149/112,929명 = 20.5% (일본인 중 신도 신자, 불교 신자가 많아서) ● 예수교인 인구 = 일본인 281 + 외국인 경영(장로회와 감리회) 7,404 + 조선인 경영 250 = 7,935 = 7.0% ● 한국인 중 예수교인 = 7,654/88,752명 = 8.6% 1930년대 초반으로 가면 10%가 되고, 소위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자랑하였다. 이후 0%로 소멸했다. 교만은 패망의 원인이다. 서울도 한 때 예수교인 30%를 자랑하다가, 이제 10% 아래로 떨어졌다. 이번 선거 후에 더 감소할 것이다
대구 제중원의 시작, 1898년 "1897년 성탄절에 대구에 도착한 존슨(Woodbridge Odlin Johnson 張仁車, 1869~1951) 의사는 이듬해 의료 도구와 약품이 도착하자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1899년 남산 언덕인 동산동에 선교부지를 마련하고 ‘미국 약방’을 개설했으며, 12월 남성로 교회당 터 한옥에 ‘제중원’을 개설했다. 서자명이 조수겸 통역으로 도왔다." (옥성득, [근간])에서.)
전라도 교회의 양적 성장, 1905-1908 1905-06년과 1907-08년 중 언제 더 많이 성장했을까? 일단 전라도의 남장로회만 보면 1905-06년에 더 성장했다. 대부흥운동으로 교회는 크게 성장했으나, 그보다 러일전쟁 이후 한국이 일본의 반식민지가 된 1905년 전후 1년간 더 급성장했다. 1905-06 기간에 놀랍게도 약 300% 성장했다. 다만 학교와 학생 수는 1907-08년에 크게 증가했다. 통계 수치는 매년 8월 말.
일제 36년간 장대현교회 강단 위 천장에 태극기 숨기고 설교 [자료 발굴] 김성여, "길선주 목사," 제9권 10호(1954년 10월): 162~166. 1945년 8월 19일 해방 후 첫 주일 평양 장대현교회 강단에 오른 김화식 목사의 손에는 커다란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김화식 목사는 말했다. "이 태극기는 일한 합방하던 경술[1910년] 8월 29일에 우리 장대재 예배당 강당 위 천장 밑에 숨겨두어던 것입니다." 감격의 눈물, 환호하는 함성, 흥분의 박수는 예배당이 떠나가는 듯하였다.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 장대재교회는 평양에서도 최고 최대의 교회요, 과거 반세기 동안 전국 교회를 영도하던 본산이었다. 일제 36년 그 무서운 침략 정책 밑에서도 그 꼭대기에 태극기를 비장하고 있었다. 그 태극기를 숨긴 이는 길선주였다. 국망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