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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평양과 기독교

김흥수, "평양 기독교역사박물관 설립 구상" (2021.6)


우리나라에는 전국각지에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박물관이 있다. 이것들은 교단, 개교회, 기독교 기관, 개인 차원에서 설립된 박물관들이다. 201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회는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보존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한국교회역사박물관 설립연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한 바도 있다. 그후 2017년 3월 기독교박물관의 설립을 준비하기 위한 사단법인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이 설립되었다.

 현재는 재단법인으로 재조직된 한국기독교역사문화법인이 이 일을 맡고 있는데, 세가지 테마(기독교의 수용·교회일치운동, 사회복지 활동, 항일·민주화·통일운동)가 중심이 될 것이다. 전주에서는 전북기독교성지화사업 추진위원회가 예수병원 부지에 전주시 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을 설립 중이다. 2020년 착공하여 2022년 개관 예정인 전주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은 전주와 호남 일대의 선교역사 자료와 예수병원 유물을 전시할 예정이다.

이렇게 남한 사회에는 다수의 기독교박물관이 있고 지금도 건립 중이지만, 38선 이북에 기독교역사박물관을 세우는 문제는 논의되지 않고 있다. 이북 지역에 기독교박물관을 세우는 일은 그 지역에 기독교박물관이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8.15이전 북한지역에 있던 박물관은 낙랑유물을 중심으로 하는 평양박물관과 청진과학관뿐이었다.

교회재건 논의에서도 포함되지 못한 상태다. 북한지역에 기독교박물관을 세운다면 북한사람들 스스로가 “조선에서도 기독교가 가장 발전한 곳이며 그 지방적 사상을 대표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닌 지대” “기독교에 대한 1제언”, 「정로」 1946년 1월 9일. 『북한관계사료집』 31(국사편찬위원회, 1999)로 여긴 평양에 박물관을 세워야 할 것이며, 그 박물관은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기독교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박물관은 북한지역에 남아있을 기독교사 자료 및 유물을 수집, 전시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며,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교육받아온 북한 주민들에게 기독교의 역사와 문화를 바르게 이해시키는 일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현 단계에서 가칭 평양 기독교역사박물관 설립을 구상한다면 어떤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여기서는 박물관의 부지, 건물 설계 및 건축 문제는 제외하고 전시물, 전시 방향, 북한기독교사 연구 등에 대해서만 시론적 차원에서 이야기해 보겠다.

기독교박물관을 세워준 사람들 – 이북 출신 김양선, 한영제

한국사회에 근대적인 기독교박물관이 처음 등장한 것은 해방 직후의 일이다. 1948년 4월 20일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 자리에 설립된 기독교박물관이 그 최초이다. 이 박물관을 설립한 이는 김양선(1908-1970) 목사였다.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은 김양선이 세운 기독교박물관 자료와 유물을 1967년에 숭실대에 기증하면서 건립되었다. 2001년 경기도 이천에 세워진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문서선교에 헌신한 한영제(1925-2008) 장로가 모은 10만여 점의 한국교회사 관련 자료를 제공해 설립된 기독교역사 전문 박물관이다.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과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기독교박물관인데, 이것들을 세운 김양선과 한영제는 남북분단 이후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다. 평안북도 의주군 피현면 당후동 출신의 김양선은 평양 숭실전문학교 재학 때부터 기독교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집안이 초기 한국교회의 설립에 직접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기독교 역사 자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김양선은 1928년 숭실전문학교를 휴학하고 있을 때부터 기독교사 사료 수집을 시작하여 최초의 한글 성경, 최초의 찬송가, 최초의 교회 신문 등 외조부, 조부, 부친이 보관하고 있던 책들을 포함하여 500권이 넘는 우리나라 교회 초기의 귀중본을 수집하였다.

 김양선은 1945년 11월 월남했는데, 바로 그 달에 미군정청으로부터 남산 조선신궁터를 기독교박물관 부지로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꿈에도 소원이던 박물관은 1948년 4월 20일 한국기독교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였다. 그가 박물관을 개관하고 또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1954)에서 해방 직후의 북한기독교사를 언급할 수 있었던 것은 북에서 가져온 사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향에 숨겨두었던 수집품을 38선 이남으로 옮기는 작업은 부인 한필녀가 맡았다. 그녀는 남북을 세 차례나 내왕하면서 사료를 반입하다가, 1947년 4월 1일 해주 앞바다에서 인민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을 세운 한영제 장로는 평안북도 구성군 사기면 향산동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었다. 1947년 4월 월남한 한영제는 기독교문사를 통하여 1980년대에『기독교대백과사전』(전16권)을 발간하고, 이 사전에 들어갈 한국기독교사 관련 항목의 집필을 위해 수많은 문헌을 수집하였다. 그는『기독교대백과사전』 완간 후에 2001년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을 만들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개관 후 두 번째 전시회로 ‘두고 온 교회, 돌아갈 고향’이라는 주제로 2002년 5월부터 9월까지 북한교회 역사자료전을 가졌다.

통일 후 평양이나 다른 도시에 기독교역사박물관을 세우는 일은 우리가 북에 기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김양선, 한영제 같은 평안도 출신 기독교인들이 남한교회에 만들어준 박물관에 대한 감사의 답례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기독교역사박물관이 개관한다면,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평양박물관은 강제로 역사가 단절된 지역에 다시 기독교 유산을 보여주는 공간이므로 유다의 재건 과정에서 세스바살이 느브갓네살이 가져간 성전 그릇들을 본래 있던 예루살렘에 가져갔듯이(에스라 1:7-11), 가능하다면 원래 북한지역에 있던 교회 사료와 유물을 되찾아 전시하되 북한지역의 교회가 주도적 역할을 한 사건 자료를 전시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전시물 중 하나는 의주나 집안 청년들의 수세(水洗)와 봉천에서의 성경 번역, 한국교회 초기 내한한 선교사들의 활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의주 청년들과 선교사들을 먼저 소개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한국기독교사에서 첫 번째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북한에서 기독교 역사에 대한 왜곡이 그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황해도 신천박물관 방문기를 보면, 제1전시관 초입에 반기독교적인 전시물들이 있는데, “종교의 탈을 쓰고 조선에 기어든 미국 선교사 일당”이라고 설명하는 전시물에는 양복을 입은 언더우드, 아펜젤라 등 선교사 네 명의 사진이 있다. “조선옷 차림으로 위장한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그 심복자들”이라는 문구가 쓰인 또 다른 사진에는 의주 출신으로 황해도 소래에 교회를 설립한 서상륜, 장로교 목사가 된 서경조 형제가 언더우드 목사의 아들인 원한경(Horace H. Underwood)과 함께 삿갓과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이 들어있다. 이 전시에서 서상륜, 서경조 형제는 침략자 언더우드의 심복으로 등장한다.

그 다음은 1903년부터 1907년까지의 원산과 평양에서의 대부흥 사료가 될 것이다. 평양은 근대 초창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점에서 서울과 별 차이가 없었으나 1907년 기독교 신자들이 자신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한 대부흥의 공간이었다. 교회사가 백낙준은 1927년 예일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평양 대부흥이 한국교회의 심령적 신생의 표적이 되었으며, 기독교 사회의 도의심을 가져왔다고 평가하였다. 한국기독교의 신앙적 성격이 평양에서 형성되었다는 말이었다.

한반도 북부지역 교회들의 민족독립 운동도 통일 후의 북한사회에 소개해야 할 내용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관서지방 기독교계 민족운동 세력을 제거하려고 날조한 105인사건, 1919년 3월 1일 장대현교회와 남산현교회 중심으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평양은 그후 1930년대에는 일제의 신차참배 강요에 맞섰던 신앙양심의 파수지였으므로 이런 내용도 전시의 중요한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이전 시기의 전시 내용 몇 가지를 예로 들었는데, 이런 것들은 미국 침략자들의 주구로서의 선교사 이미지를 교정하면서 북한지역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수용에서 어떻게 기여했으며, 어떻게 항일운동에 나섰으며, 또 한국기독교사의 주체로서 이북 기독교인들이 무슨 일을 했는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1945년 이후의 전시물은 무엇이 될까? 1945년 이후는 김일성 정권의 압력과 종교탄압 속에서 기독교가 재편되고 변형이 발생한 시기였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봉수교회가 북한정부의 종교이용과 간섭으로 만들어진, 재편된 형태의 기독교에 속한다면 가정교회와 지하교회는 종교탄압 환경에서 생긴 전통적 기독교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역사를 어떻게 전시물에 반영할 것인가는 북한기독교사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큰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해방공간에서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와의 충돌, 1950년대는 전쟁과 종교탄압 문제가 전시될 텐데, 이 시기에는 그 주제가 무엇이든 공산 치하에서의 기독교인들의 신앙 파수와 그로 인한 수난을 전시의 기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통일 후에는 남북간 주민들의 화해와 사회통합도 중요하므로 남북의 통합적 관점에서의 기독교사 해석도 요청될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1980년대부터는 북한교회가 세계교회 및 남한교회와 종교교류에 나선 시기이므로 통일대화나 남북 종교교류 같은 주제들을 박물관 전시에서 내세우게 될 것이다. 이런 주제의 사료 수집에는 북한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시기뿐만 아니라 그 전 시기에서도 남과 북 기독교인들이 공유할 수 있는 역사를 찾아 정리해 두어야 한다. 통일 전에 더 많은 북한기독교사 연구가 필요한 이유이다.

북한기독교사 연구의 문제

박물관이 개관할 경우 전시 내용과 전시물 선택도 그렇지만, 특히 전시물 해설에는 남한 교회사학계의 역사 연구가 반영될 것이다. 현재의 북한교회사 연구는 김양선, 고태우 이후로 조금씩 진전되어 왔으며 현재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북한기독교사전』(가칭) 편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사전의 집필과정에서 남북분단 이전 시기의 인물이나 교회 연구에서 적지 않은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이런 오류는 분단 이후의 시기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냉전시대에는 잘못된 정보가 유통되기 마련이며 북한기독교사 연구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잘못된 사실에 근거해서 자료를 전시하고 설명할 수는 없으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사가들은 1945년 이후의 북한기독교사의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는 연구에 나서야 한다.

먼저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윤하영 목사와 한경직 목사의 기독교사회민주당 창당설이다. 한국기독교의 역사서에서는 신의주 제1교회 목사 윤하영과 제2교회 목사 한경직이 1945년 9월 중순 평안북도의 도청 소재지 신의주에서 소위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창당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연합군사령부를 수신자로 1945년 9월 26일 쓴 영문 편지에서 자신들이 만든 정당을 ‘Social Democratic Party’(사회민주당)이라고 말했다. “To the Headquarters of Allied Forces,” 『대한민국사자료집』 18(국사편찬위원회, 1994), 29. 윤하영, 한경직은 조선민주당 창당 10여 일 후에 신의주의 정세 보고 형식으로 이 편지를 작성하였다. 조선민주당의 강령은 2021년 5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필자는 이 문서에 근거해서 기독교사회민주당 창당설을 의심한 바 있다.

 이에 관해서는 박명수 교수도 윤하영 한경직의 편지,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부 정치총국장 쉬킨 장군의 ‘1945년 12월 15일자 북조선 정치상황 보고’, “1945년 12월 25일자 북조선 정치상황 보고”, 『러시아문서번역집』 XXIV(도서출판 선인, 2017), 18. 이 보고서는 공식적으로 사회민주당의 당수는 아직 선출되지 않았으며 “지주 계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경직”이 당수를 대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경직 월남시 동행했던 청년 김치선의 인터뷰 자료 등을 통해 기독교사회민주당 창당설을 부인하고 있다.

 윤하영과 한경직이 기독교사회민주당이 아닌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는 것은 1945년 12월 17일자「서울신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신문은 “신의주사건 진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11월 23일 신의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반공투쟁 사건을 일으킨 자들을 “사회민주당” 일파라고 보도하였다. 이런 자료들로 볼 때 기독교라는 단어가 붙은 정당이 창당된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앞으로 밝혀야 할 것은, 김양선이『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에서 왜 기독교사회민주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지, 그리고 한경직은 김양선이나 다른 기독교 역사가들이 기독교사회민주당이라는 부정확한 표현을 사용하는 데도 이를 정정해주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정당이 기독교사회민주당은 아니었지만,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한 정당일 수도 있는데, 이것은 앞으로 사회민주당의 강령이 발견되면 밝혀질 것이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도 검토해야 할 것이 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올 해 11월 28일이 되면 결성 75주년을 맞이한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결성 과정 및 결성 당시의 문서를 보아야 한다. 이 문제는 월남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이해되어 왔으나 지금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결성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쉬띄꼬프 일기 1946-1948』(2004), 결성을 보도한 「로동신문」(1946년 12월 3일), 평양에서 간행된 『조선대백과사전』(2000), 강량욱 전기『사랑과 믿음 속에 빛내인 삶』(2013) 등을 통해서 결성 목적 및 결성 전후의 좀 더 상세한 역사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을 결성하기 한달 전 10월 28일에 평양 제1중학교 강당에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지도자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결성준비위원회가 개최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로동신문」보도를 보면, 적어도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결성 당시에는 종교적 성격이 보이는데, 예컨대, 결성 당일 발표한 8개 항목의 결정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7. 기독교의 진리 및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고 복음운동의 활발을 위하여 분투할 것. 8. 기독교도의 생활신조의 확수를 위하여 전력할 것.” 이 결정서는 「로동신문」 1946년 12월 3일(“각성한 애국자교도로 기독교련맹 결성, 북조선민주건설에 적극 참가를 결정”) 참조.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역사가들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결성의 종교적 동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1950년까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을 실질적으로 이끈 지도자는 강량욱, 박상순, 김익두 등인데, 이 시기의 박상순에 대한 연구는 없다. 최근 알려진 러시아 문서에 의하면, 강량욱은 1947년 5월까지는 북한정권에 맞선 교회 내의 “일부 반동들에게 여전히 관대한 태도를 보였으며, 심지어는 그들을 보호하려고까지 하였다.”

 강량욱은 당시 공식적으로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부위원장이었지만 사실상 지도자였으므로 이 문서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반대파에 대한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평양에서 발행한 반종교문서 책자의 수집과 내용 소개도 우려할 정도의 수준이다. 국내에는 1959년 평양에서 간행된 몇 권의 반종교서적 중『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여야 하는가』한권 밖에 없다. 이 문헌을 처음 소개한 인물은 고태우 선생인데, 이 문헌의 전문을 자신의 책 『북한의 종교정책』(1988) 부록에서 소개하였다. 필자는 이 문헌의 원본을 20여 년 가까이 찾은 끝에 2016년 6월 미국 국회도서관에 발견하였다. 문헌을 입수한 후 고태우 본과 비교해 보니, 서명(원본 서명에는 물음표가 없다), 소제목, 단어, 철자 등 수십 군데에서 원본은 고태우 본과 수십 군데서 달랐으며 심지어 원본의 문장이 몇 줄씩 빠진 곳도 발견하였다. 우리 학계에서 반종교문헌의 입수와 소개의 수준은 이 정도이며, 평양에서 간행된 반종교서적이 소련이나 중국에서의 반종교 이론과 어떤 공통점을 가지며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연구논문은 현재까지 한편도 없다.

1970년대 이후의 북한기독교 연구에서 남한 교회사학계의 오해는 1972년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WCC 가입신청설 및 기각설에서 절정에 이른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WCC 가입을 신청한 바 없고 따라서 WCC가 기각한 바도 없는데 한국교회에서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WCC 가입설 및 기각설이 정설로 퍼졌다. 이 문제는 필자가 다른 지면에서 논의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북한교회에 대한 위와 같은 오해는 신천박물관의 전시물에서처럼 북한에서 훨씬 더 심각한데, 교회사가들은 평양에 박물관을 설립하기 전에 이런 오해와 왜곡을 바로 잡아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맺는말

이상에서 평양박물관의 설립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해보았다. 이것들은 통일 후의 일이므로 훗날로 미루기 쉽지만, 13년 후인 2034년이면 한국기독교가 150주년을 맞이하므로 교회의 미래를 내다볼 지금부터가 그 문제를 논의할 적기일지도 모른다. 북한 주민들은 통일 이후에도 경제적 어려움과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 그리고 북한사회의 기독교 사료와 유물의 빈곤 때문에 박물관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박물관의 설립 및 운영 경험이 있는 남쪽교회가 나서야 할 것이다.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 평양기독교역사박물관을 세워 운영하다가 통일이 되면 전시물과 수집된 자료를 평양으로 옮기는 방법이 있으며, 평양에 직접 박물관을 세우려면 북에서 수집한 사료와 유물로 시작된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이나 한국기독교역사문화법인이 서울에 설립중인 기독교역사박물관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은 단순히 박물관 하나 짓는 건축의 문제가 아니다. 공산 치하에서 무너진 한국기독교의 한 축을 다시 세우려는 우리들의 신앙적 결의가 필요한 일이다. 언젠가 믿음의 선진들의 숨결이 서려있는 기독교 유적이 평양의 어느 공간에서 전시되는 감격의 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