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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0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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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의 까마귀 십자가 위의 저 까마귀,청구(靑丘: 한국)의 시체를 보고 고악고악(告惡告惡) 날아드는구나.아, 아직 죽지 않고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려라.천륜(天倫)으로 형제를 찾고,인의(仁義)로 마음을 하나로 모으면,강국의 백천만 병사가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쓸데없는 이기심이여,어찌하여 스스로를 망쳐 송장이 될 것인가?답답하고 불쌍하다.부귀란 근심 속에 잠시 머물 뿐인데,우매함이여, 어찌 그리 가련한가.사람에게 의지하며 흥망과 존폐를 맡기려 하느냐?남만 믿고 살아서야 되겠는가?한 사람도 해내지 못한다면,온 나라가 어찌 제대로 되겠는가?하나님의 자강불식(自强不息),그 끝없는 의지와 크심을 믿으라.하늘을 믿고 하늘을 따르면,두려울 것이 전혀 없으리라.간절히 바라노니,스스로를 닦고 강해지라.산속에서 나무를 하며 살아..
"내각대신들은 사퇴하라," 서상륜 1. 국한문 대한매일신보 기사, 1908.1.23국한문 기사의 번역내각대신들에게 올리는 편지, 서상륜삼가 생각건대, 나라가 불행하여 지방의 소란이 수년째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어른들께서 이를 걱정하시고, 저에게 선유의 중책을 맡기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이 시기에 태어나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나, 재능과 힘은 부족합니다. 믿음을 가진 지도 오래되었지만, 아는 것이 많지 않아 다만 한 조각 붉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어른들께서 잘못 들으시고 이 책임을 갑작스럽게 저에게 맡기시니, 두렵고 황송하여 어찌 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위로는 구중궁궐에서 나라를 걱정하시는 임금님의 고뇌를 생각하고, 아래로는 여러 어른..
사설: 내각은 총사퇴하라 [사설] "내각대신들 물러가오," , 1908.1.23슬프다, 너희 내각 대신들아! 그대들에게 귀가 있고 눈이 있으며 심장이 있다면 어서 빨리 물러가라! 그대들이 내각에 들어간 지 벌써 1년이 지났으니,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무슨 사업을 하였는가?제1, 태황제폐하께 전위하심을 주청하였고,제2, 일체 정사에 일본 통감의 허가를 기다림이요,제3, 정부 자리에서 외국인을 맞아들였고,제4, 많지 않은 군대도 무슨 방해가 있는지 일조에 해산하였으며,제5, 일진회를 권장하여 세력을 확장하게 하였고,제6, 인민에게 악감정을 내게하여 의병이 일어나게 하였으며,제7, 의병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의병을 진압한다 하고 무죄한 양민을 무수히 살해하여도 입을 다물고 수수방관하였고,제8, 황태자 전하께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하였으..
바로 잡은 민영환 사진 민영환 충정공이 서서 정면을 바라보는 사진으로 1904년 6월 출판된 잡지에 나오므로 1904년 초에 촬영한 듯하다.이와 유사한 다음 사진이 위키백과에 나온다. 아마 같은 날 같은 사진관에서 촬영했을 듯. 무인의 모습이 강하게 풍긴다.그런데 다음과 같이 알려진 사진이 있다. 위의 두 사진에 비추어 보면 좌우 방향이 바뀌었다. 위의 첫 사진에 비추어 이 사진은 다음과 같이 좌우를 바꾸어야 하고 촬영시기도 1904년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1905년 대한제국이 외교자결권을 상실한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민영환(閔泳煥, 1861~1905년 11월 30일)은 자결했다. 언더우드 부인(Mrs. Lillias H. Underwood)은 사익을 바라지 않고 오직 나라와 공의를 위해 살다가 자결한 의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
1906 「議會通用規則」, 윤치호 역 윤치호가 번역한 「議會通用規則」은 단행본으로 1898년에 발간되어 독립협회에서 사용했으나, 정치 변동으로 사용이 금지되다가, 1905년에 다시 유통되었다. 그 전문은 『대한자강회월보』 1906년 제4호(1906년 10월 25일): 67-79에 실렸다. 이를 연구한 유충희 논문의 초록을 먼저 보고, 전문을 보자.-------------------------------유충희, “개화기 조선의 民會 활동과 「議會通用規則」 ― 「의회통용규칙」의 유통과 번역 양상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167호 (2014): 1-32.[초록]윤치호는 1897년 7월부터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토론회와 연설회의 도입을 통해 협회를 정치단체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는 토론회를 조직하는 실무적 차원에서 협회 조직을 변화시켰을 뿐..
신갈교회 창립은 1901년 11월 , 2020. 7. 14를 보면 교회가 1900년에 설립되었으며, 그 설립일을 알 수 없어 교회가 임의로 3월 1일로 정해서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1902년 5월 평양에서 열린 제18회 북감리회 한국선교회 연례회의에서 이천 구역 담당 선교사 스웨러(Wilbur C. Swearer)가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 So Ko-ji" 항목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901년 11월 소고지에서 사역을 시작했으며, 1902년 봄 현재 학습인 27명, 세례교인 5명이었고, 곧 예배당 용도 집을 구입할 것이라고 했으므로, 이 말과 다음 몇 자료에 근거해서 소고지교회(신갈교회)는 1901년 11월 설립되었다고 하겠다. 소고지 구역은 이천 계삭회에 속했다. 1902년 5월호 "이천 계삭회" 기사는 소고지를 "쇽고지..
기후변화와 역병과 교회 1902년 7월 13일 “3년 만에 비가 처음 제대로 왔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초년병 선교사 웰번 부인의 일기에 나오는 이 한 줄을 읽고 나는 내 책 제2장, "구세주: 정감록 파자와 기독교 종말론," 메시아니즘과 한국 개신교를 제대로 쓸 수 있었다. 1900-1902년 3년간 중부 지방에 비가 제대로 오지 않아 수확량은 1/10로 줄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고, 도적떼가 부자들을 습격했다. 세금이 걷히지 않자 고종은 매관매직을 늘리고, 탐관오리들은 호랑이보다 무섭게 곡식을 빼앗아 갔다. 살 수 없게 된 중부 지방의 농민들이 하와이 이민 열기에 몸을 의탁했다. 낙원이 있다네! 가보세! 1903년 보리농사마저 망쳤다. 곡식 값은 폭등했다. 정부는 월남에서 안남미를 수입해 풀었으나 역..
신채호, “帝國主義와 民族主義,” <대한매일신보>, 1909. 5. 28 원문 번역 (by 옥성득) 풍운이 일어나는 듯 홍수가 달리는 듯 번개가 울리는 듯 파도가 때리는 듯 불이 타는 듯 20세기 제국주의(영토와 국권을 확장하는 주의)여! 신성한 먼로주의[내가 타인을 간섭하지 아니하고 타인도 나를 간섭하지 못하는 주의]가 백기를 한 번 든 후로 동서 대주에 소위 6대 강국이니 8대 강국이니 하는 열강이 모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이 제국주의를 숭배하며 모두 선두를 쟁취하기 위해 분투하여 이 제국주의에 굴복하여 세계 무대가 하나의 제국주의의 활극장을 이루었도다. 그런즉 이 제국주의를 저항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가로되 민족주의(타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는 주의)를 분휘함이 이것이라. 이 민족주의는 실로 민족 보전의 절대적 진리다. 이 민족주의가 강건하면 나폴레옹(Napo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