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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0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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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부활>과 반사회진화론 고희를 넘긴 1899년 톨스토이는 다가오는 세계 열강의 제국주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마지막 대작인 《부활》 연재에 들어갔다. 1895년 까프까즈 지방에 ‘두호보르’ 박해 사건이 일어나 천 여 명의 교도가 살해되었다. ‘두호보르’ (Doukhobors = 영혼을 위해 싸우는 자)는 18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정교에 발생한 한 종파로서 원시 기독교의 교의를 엄수하고, 철저한 무저항주의 無抵抗主義와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를 실행하는 한편, 신의 왕국만을 인정하며 국가, 법률, 병역의무 등 지상의 온갖 권위와 법규를 부정하는 종교 집단이었다. 그들의 신념은 톨스토이의 사상--비폭력, 반국가, 반제도 평화주의--과 일치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변하지 않자 정부는 국외 추방을 명했으나, 그들은 캐나다까지의..
보수나 진보나 관직을 노리는 이유 한국인은 왜 그렇게 관직만을 추구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대략 이렇다. 1. 공자는 수백 년 동안 남자의 주요한 의무는 관청에서 군주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공자 자신도 3개월 동안 계속 관직에 오르지 못하자 ‘주인이 죽은 뒤 남겨진, 집안에서 키우던 개’처럼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개가 아니라 공자는 관직에 있을 때라야만 국가에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정사에 발언권이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가 관직에 오르는 것을 금지한다고 해도 관직을 향해 달려들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믿고 있는 진정한 종교 또는 가르침의 정식 허가를 얻는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관직을 구하러 나설 것인가? 2. 조선에서는 관직만이 개인에게 신사라는 ..
"문명 개량 진보"의 120년 1907년 8월 13일 도쿄에 있던 전 내무대신 유길준은 이토 통치 하의 대한제국이 새 내각(총리 김윤식)을 구성하고, 자신을 내무대신에 임명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을 준비했다. 떠나기 전 그는 전 일본 내무대신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를 만나 정책 조언을 구했다. "자유민권운동가" 이타가끼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구하기 전에 먼저 인민을 문명화하여 부강에 이르는 것이 상책이듯이. 조선도 일본의 동양 평화론[일본을 리더로 삼아, 곧 한시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아, 백인의 제국주의를 막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자는 동아주의]에 동참하여, 인민을 먼저 문명화시키는 개량 진보책을 채택하라고 충고했다. 지난 120년 간 일본이 한국에 대해 취한 정책과 공작이 진행되는 시점이었다. 한국의 정치 경제적 독..
대한국 예수교 쟝로회 로회 회록 셔문, 1908 대한예수교쟝로회 로회 회록 셔문 -구쥬 강생 일천 구백 팔년,대한 륭희 이년 무신 대한국 예수교쟝로회 로회 회록 셔문 신령하고 크도다. 이 아름다운 노회여.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찌기 사도와 문도를 택정하여 세우사, 천국의 복음을 천하에 전하여 만민의 영혼을 구원케 하셨으니, 주 예수에게 직분을 받은 사도와 문도들이 주께서 승천하실 때에 특별히 명령하심을 삼가 지켜 예루살렘 다락에 일제히 모여 마음을 같이하고 기도를 힘써 하나님의 허락하신 성신의 권능을 충만히 받은 후에 능히 각국 방언을 말하고 모든 이적을 베풀며 천하 각국에 헤어져 복음을 전할세, 회개하고 주를 믿는 자에게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문도를 삼으며, 믿는 형제 중에 사람을 택하여 장로와 목사를 세워 교회를 치리케 ..
톨스토이의 <부활>과 사회 진화론 고희를 넘긴 1899년 톨스토이는 다가오는 세계 열강의 제국주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마지막 대작인《부활》 연재에 들어갔다. 1895년 까프까즈 지방에 ‘두호보르’ 박해 사건이 일어나 천 여 명의 교도가 살해되었다. ‘두호보르’ (Doukhobors = 영혼을 위해 싸우는 자)는 18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정교에 발생한 한 종파로서 원시 기독교의 교의를 엄수하고, 철저한 무저항주의 無抵抗主義와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를 실행하는 한편, 신의 왕국만을 인정하며 국가, 법률, 병역의무 등 지상의 온갖 권위와 법규를 부정하는 종교 집단이었다. 그들의 신념은 톨스토이의 사상--비폭력, 반국가, 반제도 평화주의--과 일치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변하지 않자 정부는 국외 추방을 명했으나, 그들은 캐나다까지의 ..
1908년 3월의 두 사건: 장인환의 스티븐슨 저격과 최병헌 목사의 선유사 활동 1908년 3월의 두 사건: 장인환의 스티븐슨 저격과 최병헌 목사의 선유사 활동 여러 가지를 종합 검토할 사안이나, 일단 캘리포니아에 있던 한인들의 입장은 분명했다. 선유사 활동을 한 서상륜, 최병헌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1908년 3월 선유사 유세 기간인 24일 (한국 시간 25일)에 샌프란시스코에 스티븐슨(Durham White Stevens, 1851-1908. 3. 24)이 도착했을 때, 의병장 이인용이 재외 한인에게 보낸 격문(The Holy War Manifesto)이 함께 도착했다. 그 내용은 "동포들이여, 우리는 일치단결해서 조국에 우리를 바치고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 그대들은 야만스러운 일본인들의 만행을 세계만방에 고해야한다'는 호소에 이어 "일본인들, 그 첩자들, 동조자들, 야만적인 ..
대세를 따른다는 것 대세 순응 시세의 변화와 세태의 변천을 따라 가는 소위 진보적 기회주의가 지난 120년 간 한국인의 처세술로 자리 잡았다. ​1. "一進 宣言," 1906년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1905년 전후 일진회(一進會)의 모습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한 이후 일진회가 발표한 다음 선언문(1906년 3월 5일자 )에서 보듯이, 문명 진보국을 건설하려면 1) 경제(실업)개발로 먹거리를 늘리고 2) 교육으로 인지를 넓히고 풍속을 개량하는 두 가지 강령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청색 부분인 "時敏世運之變遷"과 "隨世態之進運"이다. 세상 운수가 변천해 가는 것에 그때 그때 민감하고, 세태가 나아가는 모양을 따라가는 적응에 능한 기회주의가 대세가 되었다. 한 마디로 진보의 옷을 입은 ..
1904 2월 9일 러일전쟁 발발과 인천상륙작전 115년 전 1904년 2월 9일 제물포 전투로 러일전쟁 발발2월 8일 일본 해군이 여순항에서 러시아 해군 기습 공격으로 러일전쟁 시작, 러시아의 주의를 이곳으로 돌리고2월 9일 일본 해군이 제물포항에서 러시아 해군 기습 공격,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들 침몰시키고, 일본군 3,000명 제물포 상륙 작전 성공, 경인선 기차로 서울로 이동하여 서울 점령.2월 10일 일본 러시아에 선전포고로 러일전쟁 발발. 당시 한국에는 군함 한 척 없었다. 고종과 황실과 지도자들은 나라를 말아 먹고 있었다. 임진왜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전쟁 모두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스파이크먼의 림랜드 이론대로 한반도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간의 각축장이다. 림 랜드에 속하는 한반도는 경쟁하는 두 세력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