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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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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윤치호 세례 위한 신앙고백서 1887년 3월 23일 윤치호(23세) 세례 때 쓴 신앙고백서 미국 북감리회 해외선교잡지 The Gospel In All Lands 1887년도 치 원본을 손에 넣었다. 6월호에 한국 특집이 나온다. 한국에 대한 소개와 한국 북감리회 선교의 초창기 역사를 간단히 소개한다. 특히 마지막 277쪽에는 정동, 아펜젤러 사택과 스크랜턴 사택의 삽화가 실려 있다. 사택 그림은 내 책 표지로 썼던 바로 그 삽화이다. 수록된 기사는 다름과 같다. 사진을 함께 올린다. "Korea," 270-271 "An American Taveler in Korea," 271-272. Edward A. Lawrence, "Missions in Korea." 273-274. T. H. Yun, "A Korean's Confession..
1894 윤치호 마애방의 결혼 윤치호와 마애방의 결혼 한국에서는 일제시대부터 '국제 결혼' 커플을 백안시했다. 그러나 90년대부터 시골 총각들이 타인종 신부와 결혼하고, 해외 한인은 물론 유명인의 인종 간 결혼으로 한국도 단일민족 이념 대신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급격히 이동했다. 근대 한국인과 중국인의 결혼은 115년 전 1894년 3월의 윤치호-마애방이 첫 케이스였다. [근대 한국인(기독교인)의 첫 국제 결혼은 서재필은 1894년 6월, 윤치호는 1894년 3월.] 윤치호(1865~1945)는 1884년 말 갑신정변 후 상하이로 망명하고 방탕하게 살다가 남감리회의 중서서원에서 개종하고 1887년 첫 한국인 감리교인이 되었다. 한국에 있던 부인 강 씨는 사망했다. 미국 에모리대학과 밴드빌트대학교에서 유학을 한 윤치호는 귀국 전 청일..
1897 <독립신문>과 용어 하나님 1895-1900년 God에 해당하는 한국어 번역을 놓고 용어 논쟁이 진행 중일 때 은 하ᄂᆞ님을 지지했다. 독립신문의 지지는 한국인 일반이 하ᄂᆞ님을 선호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선교사들 대부분이 하ᄂᆞ님을 지지하도록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당시 언더우드는 천주교와 성공회와 함께 "텬쥬"(천주)를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평양의 마페트는 물론, 서울의 서재필, 윤치호 등이 하ᄂᆞ님을 지지했다. 하나님과 하느님으로 분리되는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해방 이전의 기본 표기는 하ᄂᆞ님이었다. 1897년 1월 26일자 2-10호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