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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윤치호

1894 윤치호 마애방의 결혼

윤치호와 마애방의 결혼


한국에서는 일제시대부터 '국제 결혼' 커플을 백안시했다. 그러나 90년대부터 시골 총각들이 타인종 신부와 결혼하고, 해외 한인은 물론 유명인의 인종 간 결혼으로 한국도 단일민족 이념 대신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급격히 이동했다. 


근대 한국인과 중국인의 결혼은 115년 전 1894년 3월의 윤치호-마애방이 첫 케이스였다. [근대 한국인(기독교인)의 첫 국제 결혼은 서재필은 1894년 6월, 윤치호는 1894년 3월.]  윤치호(1865~1945)는 1884년 말 갑신정변 후 상하이로 망명하고 방탕하게 살다가 남감리회의 중서서원에서 개종하고 1887년 첫 한국인 감리교인이 되었다. 한국에 있던 부인 강 씨는 사망했다. 

미국 에모리대학과 밴드빌트대학교에서 유학을 한 윤치호는 귀국 전 청일전쟁으로 상하이에 1년 이상 머물 때 마 양과 연애 결혼했다. 윤치호로서는 재혼이었다. 마아이팡(馬愛芳·1871~1905)은 남감리회의 맥티여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이었다. 미국에서는 인종차별로 연애 기회가 없었고, 한국에는 중등교육을 받은 여성이 없을 때라, 중국 여성과의 혼인이 최선이었다. 마 부인은 네 아이를 출산한 후 허약하여 일찍 죽었다. 윤치호는 천국에 간 아내에게 보낸 영문 편지를 일기에 쓰며 끔찍이 사랑하던 아내를 그리워 했다. 

한편 금의환향한 윤치호의 인텔리 중국 부인은 서울 고위층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그 중에 경무사(경찰청장) 김영준이 있었다. 그는 서자였으나 고종의 총애로 승승장구한 인물이었다. 양반가에서 서얼이라 혼사를 꺼리자 그는 마침 남감리회 여선교사 캠벨을 따라 중국에서 내한한 배화학당 교사 유영지(Dora Yu·兪靈芝)에게 접근했다. 선교사로 헌신한 도라유는 그를 거부했다. 


김영준은 앙심을 품고 친러보수파 이용익과 짜고 1900년 12월 9일 모든 기독교인을 몰살할 음모를 세우고 고종황제의 칙서를 날조하여 지방관청에 밀지를 내렸다. 다행히 언더우드가 이를 발견하고 에비슨 의사와 알렌 공사에게 알려 사전에 대살육을 막았다. 결국 김영준은 영종도 매각 사건과 다른 음모 사건으로 곧 처형된다.


'한국의 부림절' 사건은 이루어지지 않은 한중 커플로 시작된 비극이었다. 도라 유는 이때 마음고생을 많이 했으나 감리교회의 하디 부흥운동을 통해 신앙 체험을 심화하고 1905년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 교회 대부흥을 일으키는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가정이든 독신이든 일신의 안일보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한 삶이 복된 삶이다.  


윤치호 가족, 덕원(원산) 감리 시절, 1904



배화학당 교사 도라 유의 나중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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