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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4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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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강원룡의 한국기독교 이해 강원룡, (조선기독교서회, 1949. 4. 20), 124쪽에 한국교회 70년사를 한 줄로 정리하고 있다. 발전에도 불구하고, 저속, 부패, 무권위. 다시 70년이 지난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발전에도 불구하고 저속하고 부패했고 사회적 신용도(사회적 자본) 바닥이다.
박인덕의 징병제 지지, 1942년 5월 일제는 1938년 조선인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고, 1944년징병제를 실시했다. 1942년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를 발표하자 5월에는 기독교인들도 지지 대회를 개최하고 선언문을 발표했다. 여성 인사 중 '조선의 노라' 박인덕(창씨개명 永河仁德, 1896 ~1980)은 5월 19일 서울 중앙예배당에서 열린 감리교단 경성교구 주최 징병제 지지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2년 후에 실시될 징병제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당시 덕화여숙 교장이었다. , 1942년 6월 3일. 박인덕은 3.1운동으로 감옥 생활을 하는 항일 노선에서 1930년대말부터 친일 노선으로, 해방 이후에는 친미 활동을 했다. 아래는 그녀의 생일을 제목으로 한 1952년 책 표지. 성을 PAHK으로 했다. 덧) 이 책은 박인덕이 얼마나 영어를 잘 했는..
박인덕 고황경의 징병제 지지 글, 1943년 다음은 朝鮮金融組合聯合會가 발행한 제70호(1943년 10월 1일)에 실린 박인덕과 고황경의 글이다. 자녀 교육에 대한 권면에서 자녀들을 잘 길러서 국가가 원할 때 희생이 되더라도 징병제에 따라 황군으로 바칠 것을 주장했다. 개인이나 집안의 보물을 넘어 국가에 필요한 군인을 기르는 게 어머니의 최고 의무라고 강변했다. 국가주의, 제국주의 자녀관이요 어머니관이었다. 마지막 광고 페이지
윤치호와 김활란의 징병제 지지, 1943년 9월 다음은 일제말에 발행된 잡지 4권 8호에 실린 징병제 관련 윤치호(伊東치호)와 김활란(天城활란)의 글이다.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실에서 원문을 볼 수 있다. 윤치호는 조선인 청년 지원병 1기가 일본의 군인으로 제대로 역할하면 이후 앞다투어 지원할 것이며, 군인으로 전사하면 신사에 신으로 모셔지기 때문에 영광이라고 하였다. 조선청년이 일본 정신으로 무장하면 일본인과 동등한 군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국의 神兵으로 헌신하여 일본 신사에 제향되는 神이 되라고 격려했다. 김활란은 짧은 글에서 제국군인의 되는 첫 선발대가 책임감 있게 솔선수범할 것을 권면하면서 그들의 출발을 축복했다. 두 글 모두 내선일체의 이념 아래 조선인과 일본인이 평등하게 되는 한 길이 징병제에 응하여 제국 군인이 되라고 강력히 권한다...
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연구총서 1-9 지난 4년 간 "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연구총서" 시리즈가 9권이 나왔다. 서울신학대학교 박명수 교수가 중심이 된 연구팀이 만들어 낸 성과이다. 해방 정국에서 개신교의 역할과 위치를 알 수 있는 책들이다. 연구자들이 보수적인 입장에서 정리했지만,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논문들이 모여졌다.
광주 선교지부, 1949년 Presbyterian Meeting (Florence Root, Dr. & Mrs. Knox, Mary Dodson, Anna McQueen, Petrie Mitchell, Mary Belle Mitchell, Mrs. & Dr. Talmage, Mrs. & Mr. Miller) - Kwangju, Korea, 1949
[자료] 한경직 목사와 서북청년회, 1982 김병희 편저, (규장문화사, 1982), 54-56. 이 대담은 중요한 자료이지만, 이런 짧은 대담만으로 실상을 알기 어렵다. 연구자들이 더욱 분발해서 실상에 접근해 가야 한다.
일제말 장로교회 전투기 헌납 1. 이것은 한 대가 아니고 두 대였다. 2. 감리교회도 헌납했다. 3. 불교, 천주교도 헌납했다. 4. 도시별로, 단체별로, 사업체별, 종친회별, 심지어 화류조합도 헌납했다. 1대 제작비는 1942년에는 10만원, 1945년에는 8만원이었다. (지금 전투기가 아님, 기관단총이 약 8천원 하던 시절.) 국방헌금 8-10만원을 하면 비행기 한 대 헌납이 가능했다. 1944년 5월 26일자 를 보면 황해도 부인회에 300대가 할당되어 헌금 모금을 하고 있다. 1945년에는 북경에 있는 한국인들이 모금하여 "愛國機 十臺 獻納"했다.(매일신보, 1945년 3월 24일자) 5. 한국에서 애국기(전투기)는 1932년부터 헌납하지만,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부터 본격적으로 헌납하기 시작했는데, 1945년까지 육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