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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4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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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12. 6 윤치호 노환으로 별세 1945년 12월 6일 윤치호(1865-1945) 씨가 개성 자택 고려정에서 노환(뇌일혈)으로 병사했다. 81세. 여러 신문은 그의 사망 기사를 간단하게만 실었다. 다음은 12월 8일 기사와 장례식 광고이다. 다른 신문에도 동일한 광고가 실렸다. 장지는 충남 아산이었다. 어떤 학자는 그의 자살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사실이 아니다. 또한 위키백과에 사망일을 12월 9일로 적고 있으나 수정해야 한다. 한 시대를 장식했던 인물 치고는 부고 기사가 초라하다. 윤치호는 1937년 만주사변(제2차 중일전쟁) 때부터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다. 참고로 윤치호는 1937년 9월 3일 남산 조선신궁에서 만주사변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기원제의 대표자였다. 이때 4천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今月 三日에는 京城에서 京城..
1944년 6월 조선장로교회 애국비행기 "조선장로 제2호" 기부 조선장로교회가 1942년에 전쟁용 비행기 "조선장로호"를 헌납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44년 6월에 제2기를 헌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1944-45년 조선에서 400대의 비행기를 헌납하는 운동이 전개되고, 불교나 다른 종교계에서도 전투기를 헌납하고 있었으므로, 장로교회만 나선 것은 아니다. 1944년 6월 25일자에 보도된 조선장로교회가 전쟁용으로 일본 육군에 애국기 "조선장로 제2호"를 헌납했다는 기사이다. 이때 장로교회는 2,053원 54전을 휼병금(恤兵金 = 전쟁위문금)으로 헌납했다. 이때 일본행 여자 정신대 경기도 제1기 전송식이 거창하게 열렸다. 참고) 조선불교호와 조선장로호 제1기: 불교계도 모금해서 비행기를 헌납하고 전쟁을 지원했다. (이런 비행기 모델 사..
사진으로 보는 김구 선생, 1940-49 김구, 1949년 6월 26일 별세 1945. 11. 3 오후 비행기 편으로 김포 비행장에 착륙
이단의 뿌리: 김백문 초원 김백문(初園 金百文, 1917-1990) 은 김해 김씨 가정에서 아버지 김광조 옹과 어머니 문아지 여사 사이에서 4남 2녀중 차남으로 1917년 10월 19일 경북 칠곡군 안동면 안의동 448번지에서 출생했다. 김백문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직접 쓴 세 권의 책을 보면, 상당한 한문 교육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며, 일제시대 공립학교도 어느 정도 다녔다고 생각된다. 그는 만17세 무렵 형을 만나러 원산 신학산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김남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김백문을 수도의 길로 들어서게 이끈다. 그리고 김남도의 소개로 원산 신학산의 창설자인 백남주 목사의 애제자가 되었다. 김백문은 원산 신학산과 장좌동 성주교 생활을 통해 점점 신비주의에 몰입하였고, 1937년 즈..
1942 대동아전쟁 위해 교회 종 헌납 한 번 무너진 교회, 무엇을 못하랴? 1942년부터 교회 종을 적국인 영미 격멸의 탄환 만드는데 써 달라고 헌납. 한 교회가 나서면 충성 경쟁은 이어진다.
1943. 12. 29 성결교회 해산 1943년 12월 29일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는 해산 성명서를 발표했다. 영미 기독교 색채를 제거하고 일본적인 기독교로 재출발하려고 했으나, 성경이나 기독교 교리가 근본적으로 일본 천황제 국체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해산한다고 발표했다. 즉 성결교의 사중복음 중 재림 교리가 일본 국체와 상반되고, 유일신론이 천황숭배와 배치되기 때문에, 전시하에서 황민으로 충성하기 위해서 교단을 해체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1936년 교권파가 교단의 실권을 잡고 개혁파를 제거한 결과였다. 1938년 신사참배의 죄가 가볍지 않았지만, 1939년 기독교 교단 중 가장 앞장 서서 정신총동원성결연맹을 조직하고 제2차중일전쟁을 지지하고 나아가 1941년 태평양전쟁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기독교의 근본 교리까지 부정하는 중죄를 지었..
1949년 반민자 재판 지지부진 이 한 장의 사진: 1949년 4월 4일자 https://www.facebook.com/designersparty/photos/a.756143587762860/1244138862296661/?type=3&theater 70년 전 반민자 재판 해방 후 3년 간 미 군정은 반민족 친일파에 대해 "너희 일은 너희가 처리하라"는 말로 처벌을 미루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곧 특별법이 마련되어 반민특위가 구성되고 1949년 1월부터 재판에 들어갔으나, 보도처럼 정의 실현은 지연되고 있었다. 평가 1912년 일제 식민지 하 첫 대 공판인 105인 사건 때는 선교사들이 적극 노력하여 법정 정의를 이루어내고 105인 중 99인의 무죄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해방과 정부 수립 이후 민족 정기를 수립하는 ..
1940-45 임정의 참전과 승인 문제: 김구와 이승만 노선의 대결? 일부에서 김구의 중칭 임정을 깎아내리기 위해 광복군을 비하하는 듯한 글을 쓴다. 참전을 미루었기 때문에 해방 정국에서 임정이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미국의 이승만의 외교 활동을 높힌다. 참고, 이영진, "김구의 '임시' 정부는 왜 '임시'로 끝났나?"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0442?fbclid=IwAR0hGzrjeW6nHQnCZFBsOwru_J1JZtpg955EtgXuRgXjQDVSMUxz60uerIA 김구의 ‘임시 정부’는 왜 ‘임시’로 끝났나? ◈'임시 정부' vs '임시정부' '임시'라는 말은 명확한 기한을 정하지 않은 잠시 동안의 상태를 이르는 명사이다. '정부'라는 단어와 함께 쓸 때는 둘 다 명사이므로 띄어쓰기를 해야 하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