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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40s

이단의 뿌리: 김백문

초원 김백문(初園 金百文, 1917-1990) 은 김해 김씨 가정에서 아버지 김광조 옹과 어머니 문아지 여사 사이에서 4남 2녀중 차남으로 1917년 10월 19일 경북 칠곡군 안동면 안의동 448번지에서 출생했다. 김백문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직접 쓴 세 권의 책을 보면, 상당한 한문 교육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며, 일제시대 공립학교도 어느 정도 다녔다고 생각된다.

그는 만17세 무렵 형을 만나러 원산 신학산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김남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김백문을 수도의 길로 들어서게 이끈다. 그리고 김남도의 소개로 원산 신학산의 창설자인 백남주 목사의 애제자가 되었다.

김백문은 원산 신학산과 장좌동 성주교 생활을 통해 점점 신비주의에 몰입하였고, 1937년 즈음에 비몽사몽간에 “주님을 만나서 자신에 대한 사명과 미래에 일어날 역사와 기독교의 난해한 성서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김백문은 성주교를 비롯해서 신비주의 집단들이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세 권의 저서 <성신신학> <기독교 근본원리> <신앙인격론>을 남기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김백문은 함경도 방면의 신비주의 모임에서 알게 된 곽할다(郭割多) 여인의 딸 조선애(趙善愛)와 혼례를 치렀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1940년 4월 서울에 ‘조선신학원’이 강의소 형태로 개원했다. 김백문은 스승 백남주를 떠나 조선신학원에 입학을 하게 된다. 김백문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신령회’ 사건으로 조선신학원의 교수 및 학생들과 함께 구속됐다. 그 이후 김백문은 신령운동에 몰입하면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부터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섭절리에서 "예수교 이스라엘수도원"을 시작했다. 이 수도원은 초가 한 채와 밭을 포함하여 대지 1,800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수 십 명이 모이는 집회가 자주 있었으며, 서울 일원의 추종자들을 위해서 한강 남쪽 상도동에 또 하나의 집회소를 두었다. 김백문은 1946년 3월 2일 평생 잊지 못할 사건를 체험하게 되는데, 그는 이 날이 하늘이 열리고 예수의 재림이 실현된 날로 인식하여 개천의 날로 기념하였으며, 그의 메시아 비전이 구체화된 날이었다. 

수도원을 시작한 지 2개월 쯤 되었을 때 문용명이라는 20대 중반(25세)의 한 청년이 찾아왔다. 문용명은 후에 문선명으로 개명하는데, 그가 바로 통일교의 문선명이다.

1958년 3월 2일에는 창조원리 타락원리 복귀원리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기독교 근본원리》라는 방대한 자체 교리서를 편술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1946년 3월 2일 오전11시(2,30분)12시! 한국 강산 경기도 어느 산곡 저자를 중심한 예배 석상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순간! 현현하신 은사를 직접 배알하게 되었다. 그날 그 순간의 된 일은 나로서 너무나도 그 존엄무쌍 함이 일필난기인 만큼 이를 지금까지 엄봉했던 오늘에 이르러서......"(p. 42)라고 주장했다. 매년 3월 2일을 개천의 날로 기념하게 된 유래였다. 그리고 김백문은 <신조내의 信條內意>라는 것을 수도원 식구들에게 발표했다. 

출처: 아래 책에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백문은 부산 동래로 피신했다. 이때 김백문은 <타락, 복귀원리>를 집필하고 있었는데, 문선명은 그 원고를 교정보겠다고 가지고 가서 6개월 이상 가져오지 않는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김백문은 1953년 서울이 수복되자 제자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와서 ‘이스라엘 자녀 된 맹세’라는 것을 선포하고, ‘예수교(耶蘇敎) 이스라엘 수도원’ 간판을 걸게 된다. 그리고 12월 25일 제1기 수사인 김정애를 신부로 맞아 ‘어린 양(羊)의 혼인잔치’를 치렀다. 전처 조선애와는 1962년 4월 20일에 이혼을 하였다. ‘어린 양(羊)의 혼인잔치’는 스승 백남주가 원산 신학산에서 거행했던 ‘천국결혼 잔치’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으며, 김백문 자신이 메시아임을 나타낸 것이다. (김웅기, "김백문의 이스라엘수도원,"  <기독신문>,  2014.02.17)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초원 김백문은 정릉 3동 산1번지(현재는 정릉 3동 769의 5번지)에 있는 김정옥의 집으로 예배처를 옮기고, 간판을 ‘기독교 청수교회’로 명명했다. 김백문은 1990년 12월 20일 오후 5시 경에 사망하였고,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축현리에 있는 기독교인 공원묘지(묘번 3456번)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