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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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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자 교회, 4자 교회, 5자 교회 May 27, 2015 [3자 없이 4자 없다] 선교학에서 흔히 3자(자급, 자전, 자치)를 넘어 4자(自神學 self-theology)를 말한다. 그런데 자기신학은 누가 하나? 사람이 한다. 그 사람이 누군가? 3자를 통해 길러진 사람이다. 자급은 마을과 교회의 경제적 자립이다. (돈 '내는' 곳에 마음이 있다.) 자전은 공동체의 사회적 자립이다. (마음 '내는' 곳에 일이 있다.) 자치는 공동체의 정치적 자립(민주화)이다. 이 三自 없이 신학적 四自는 없다. 평양의 마포삼열은 1893년 널다리에서 첫 세례 후 14년만인 1907년 6명의 평안도인을 목사로 세웠다. (서경조는 황해도 소래인.) 그들은 3자를 통해 길러진 인물로 그 중에 길선주는 결국 자기 신학과 목회를 하는 대표적 인물이 되어 세계에 ..
한국개신교 해외 타문화선교 시작, 1913년 중국 산동 萊陽 1890년대 서간도 선교, 1903년 하와이 한인 선교, 1908년 제주도 선교, 1909년 동경한인교회 설립, 1909년 시베리아 선교 등은 초기 한국 교회의 선교는 한인 대상 선교였다. 흩어진 디아스포라 한인들을 위한 선교였다. 교회는 디아스포라를 따라 간다. 타문화 타언어 외국인 대상 선교는 1913년 조선예수교장로회가 3명의 선교사를 중국 산동 라이양(래양)에 파송하면서 시작되었다. 산동 반도는 조선과 문화가 유사하다. 그래서 지푸에서 활동하던 네비어스 선교사의 선교 방법론도 한국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면서, 선교의 빚을 갚기 위해, 장로교회는 산동에 선교사 3명을 파송하게 된다. 네비어스의 3자 정책을 그대로 실천했다. 그런데 래양이 지금 발음으로..
일제 시대 만주 한인 교회사 연구 절실하다 1924년 이후 만주 시베리아 지역 선교지 분할도를 보자. 이 광활한 지역에 1920년대부터 한인 이민이 본격화되자 그들을 따라 교회와 선교도 따라가게 된다. 사람이 있는 곳에 선교가 있기 때문이다. 보라색 부분인 용정을 줌심으로 하는 북간도 지역 연구는 상당히 축척되었다. 기독교장로회(기장)와 한신(조선신학교에서 발전)의 뿌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한신 쪽 신학자들이 북간도 캐나다장로회 선교와 김재준, 윤동주, 문익환 등 개인 연구까지 광범위하게 작업을 했다. 감리교회도 일부 연구를 했다. 그러나 노란색 부분인 서간도 지역은 한국 개신교의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초기 로스 관련 연구만 35년 전에 한번 정리된 이후, 1921년 4월 신핀(흥경)에 선교지부가 개설되고, 1923년 10월 Cook(국유치..
1922-26 최나오미, 시베리아 첫 한인 여자선교사 남감리교회가 파송한 첫 시베리아 여성 선교사. (기독교판 신여성) 시베리아 전쟁 종식 후 1923. 10. 20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순회 전도 시작, 각 지방마다 여선교회 조직 --니콜스크에 있는 여자성경학원 학생들(여성 목회지원자) 교육 --각 지방교회 순행하면서 사경회와 기도회를 인도하고 강연 --교인 심방, 개인 전도, 문병, 조산, 환자 구급 일도 하였다. 1926년 5월, 파송기간보다 1년 더 일하고 귀국 또한 본인은 금년이 본국 녀션교회에셔 파숑을 밧은 년한도 다 되엿삽고, 본 션교회에셔 경졔샹 형편에 의지하야 다시 파숑할 수 없스니 귀국하라 하옵기 곳 귀국하려고 하엿스나, 각 디방 일반 교우가 열심히 만류하며 각처로 연명 쳥원셔를 치숑하고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견댈 수 업슴니다. 그러나 ..
1923 용정 남감리교회 북간도 용정 남감리교회, 1922년 부활절에 설립, 1년 만에 200명 교인으로 성장했다. 용정의 한인 교회사는 1907년에 시작되었다. 용정 거주 중국인 싼진(單金)이 원산에 와서 한글 성경과 전도책자를 매입한 후 돌아가 한국인들에게 전도했다. 싼진의 등장으로 남감리회와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과 원산 교인들이 간도 선교에 착수하게 되었다. 1908년 남감리회에서 이화춘과 이응현, 캐나다장로회에서 안순영과 정재면을 용정에 매서인으로 파송하여 복음을 전했다. 이들은 국내에서 소속 교파는 달랐지만 1908년 용정 시내에 한옥 집 한 채를 마련하여 "예수교서원"이란 간판을 걸고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곳을 거점으로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 구역을 나누어, 모아산 북쪽 연길 지역은 감리회가, 용정 남쪽 양무정자와 명..
시베리아 니콜스크 한인감리교회, 1921 이 한 장의 사진 1921년에 시베리아 니콜스크(Nikolsk) 시에 한인 (남)감리교회 회중이 150명이 되었다. 당시 시베리아 만주 남감리회 지역에 1년만에 1,500명의 한인 교인이 등록해 있었다. 디아스포라 한인 그리스도인이 독립의 희망이었다.
이기풍 목사 연보, 가족, 가계도 이기풍 목사의 간단한 연보와 사진 1891년 평양 포졸(yamen runner)로 평양을 방문한 마페트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위협 1896년 원산으로 이주, 스왈른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 1899년 스왈른이 평양 선교지부로 이주할 때 함께 와서 조사(助事)로 활동 1904년 안악 지역에서 스왈른 선교사 조사 신학생 시절에 부인 유씨 사망 1906년 황해 재령 선교지부 신설되자 샤프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 9월에 목사 안수 1907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 1918년 3월 광주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담임목사 1920년 전남 노회장. 1921년 10대 총회장 1924년 고흥교회 부임. 제주도 성내교회부임 1931년 벌교교회 부임 1934년 낙도, 돌산도, 완도 등지..
1920년대 간도 시베리아 선교지 분할도 1910-20년대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지 분할 (comity)장로회는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과 북간도 위쪽 담당. ( )안은 1919년 당시 한국인 인구 / 교인 수 1) 서간도(350,000명 /4,600명)는 북장로회, 2) 남만주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봉천노회 3) 북간도(400,000명 / 10,000명)는 캐나다장로회 4) 북간도 위쪽 시베리아 근처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북만노회감리회는 땅은 넓지만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1919년 현재 감리회 선교지 전체 한인 인구는 400,000명 1) 북간도 일부와 간도 위쪽 만주 전체는 북감리회 2) 시베리아는 남감리회이러한 분할은 당시 교세가 장로회가 절대 다수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평안북도와 함경도가 장로회 선교지였기 때문에, 자연히 압록강과 두만강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