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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선교

1922-26 최나오미, 시베리아 첫 한인 여자선교사

남감리교회가 파송한 첫 시베리아 여성 선교사. (기독교판 신여성)

시베리아 전쟁 종식 후 1923. 10. 20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순회 전도 시작, 각 지방마다 여선교회 조직

--니콜스크에 있는 여자성경학원 학생들(여성 목회지원자) 교육

--각 지방교회 순행하면서 사경회와 기도회를 인도하고 강연

--교인 심방, 개인 전도, 문병, 조산, 환자 구급 일도 하였다.

1926년 5월, 파송기간보다 1년 더 일하고 귀국

또한 본인은 금년이 본국 녀션교회에셔 파숑을 밧은 년한도 다 되엿삽고, 본 션교회에셔 경졔샹 형편에 의지하야 다시 파숑할 수 없스니 귀국하라 하옵기 곳 귀국하려고 하엿스나, 각 디방 일반 교우가 열심히 만류하며 각처로 연명 쳥원셔를 치숑하고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견댈 수 업슴니다. 그러나 이럿타고 션교부의 명령을 어긔고 아니갈 바는 안이오나 여러분의 소원이 간졀하온 즉 바라옵기는 특별히 쟝래 교회에 쥬초될 여자계를 위하시사 힘 만히 써주시기를 원하오며, 시무한바 사항과 순행일록을 쳠부 보고하오니 고량하심을 바라나이다.

("최나오미 보고서," <남감리교회 시베리아 선교처 조선인교회사업부 제5회 연회 회록> (1925년), 20쪽. 

참고)

1914년 시베리아 거주 64,309명의 한인 가운데 토지 소유자인 원호인이 20,109 명(31.3%), 소작인인 여호인이 44,200명(68.7%)으로 원호인과 여호인의 구성비율이 3대 7이었다.

1922년 10월 25일 일본군의 최후 부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철수하고 시베리아전쟁이 종결.

1922년 11월 16일 소비에트 정부는 시베리아를 완전히 장악한 후 극동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종교에 대한 박해를 시작. 러시아정교회에 대한 철저한 박해는 물론 남감리회 시베리아 선교 사업에 대한 박해도 진행.

1923년 당시 한인농민 16,767호 가운데 13.7%에 해당하는 2,990가구 만 토지를 갖고 있었다.

1926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러시아 한인 총 168,900명 가운데 거의 반수인 84,931명 만이 국적을 취득.

1927년 12월 소련공산당 제15차 당대회에서 농업집단화 노선 추진--가난한 농민이었던 한인들도 급속도로 콜호스를 중심으로 재조직되고 한인사회는 철저하게 소비에트화.

1929년부터 강제 이주와 한인 박해 본격화되면서 1930년 3월까지 12,500호의 한인이 국경을 넘어서 탈출, 만주나 북한 지역으로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