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선교

1923 용정 남감리교회

북간도 용정 남감리교회, 1922년 부활절에 설립, 1년 만에 200명 교인으로 성장했다.

교회 뒤에 유명한 ‘서전대야’(西甸大野)가 있었다. 1919년 3월 13일 용정 만세 시위 때 14명이 사망했다.  

용정의 한인 교회사는 1907년에 시작되었다. 용정 거주 중국인 싼진(單金)이 원산에 와서 한글 성경과 전도책자를 매입한 후 돌아가 한국인들에게 전도했다. 싼진의 등장으로 남감리회와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과 원산 교인들이 간도 선교에 착수하게 되었다. 1908년 남감리회에서 이화춘과 이응현, 캐나다장로회에서 안순영과 정재면을 용정에 매서인으로 파송하여 복음을 전했다. 

이들은 국내에서 소속 교파는 달랐지만 1908년 용정 시내에 한옥 집 한 채를 마련하여 "예수교서원"이란 간판을 걸고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곳을 거점으로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 구역을 나누어, 모아산 북쪽 연길 지역은 감리회가, 용정 남쪽 양무정자와 명동촌 일대는 장로회가 맡아서 교회를 개척했다. 1909년 남감리회와 캐나다장로회 선교회 사이에 선교지역 분할협정을 맺으면서, 간도 일대는 캐나다장로회 선교구역으로 확정되었고, 감리교회는 용정에서 철수했다. 이로써 간도 선교를 전담하게 된 캐나다장로회에서는 1914년 푸트(W.R. Foote, 부두일) 선교사를 용정에 파송하여 용정 남쪽 언덕에 선교지부를 개설하고 그 안에 교회(동산교회)와 영신학교, 명신학교, 은진중학교 등 기독교 학교와 제창병원을 설립하여 간도 선교의 강력한 구심점으로 삼았다. 

감리교회는 이화춘의 철수 이후 북간도 지역 선교를 중단하였다가, 3·1운동 이후 이주하는 감리교인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선교를 재개했다. 즉 1921년 남감리회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묶는 선교구역을 설정하고, 양주삼 목사를 관리자로 파송하여 선교를 다시 시작했다. 이후 감리교회의 간도 선교는 착실하게 발전하여 1930년 남·북 감리교 합동으로 기독교조선감리회가 조직될 때 북만주(길림과 하르빈)와 간도 지역 감리교회는 '만주선교연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용정은 해방되기까지 만주선교연회의 중심 거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