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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여성,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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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믿음의 혜성, 김학정 여사 남원의 믿음의 혜성 김학정 (1884. 10. 17-1936. 3. 5) 기독교 열녀(완벽한 여성)상으로 칭송 받은 김학정. 종가집 며느리로서 결혼 직후 남편이 죽었으나, 신앙인이 되어 집안을 일으키고 이웃에 전도하여 교회도 일으켰다. 윤리적 열녀요 종교적 자선가였다.
1921년 경성고아원의 모습 서대문밖 모화관 부근 1919년 10월 서대문 부근 김병찬의 자택에서 20여 명의 소년 고아들을 돌보는 고아원이 설립되었다. 오긍선과 윤치호를 중심으로 경성고아구제회가 발기되고(1920.1)→경성고아구제회 조직(1920.2)→경성고아원 개원식(1921.5)→재단법인 경성보육원 인가(1922.5)→안양분원 설치(1936.9)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서울의 대표적인 사회사업 기관으로 성장했다. (참고 한규무, "경성보육원의 설립과 운영 (1919-1945)," 79호 (2011년 10월), 209-242.) 경성고아원 혹은 경성보육원(Seoul Boys' House)으로 불렸다. 1920년 미국 적십자사 조선지부가 고아들에게 옷을 제공하고 사진을 찍었다. Korea Mission Field (April 192..
1920 대한애국부인회 600명 기독교인 여성지도자 검거 [개신교는 한국에서 무엇을 했는가?] 여성 지도자 양성과 독립 운동 1919년 삼일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정보를 제공한 대한애국부인회 회원 600명이 1920년에 모두 체포되었다. 600명 회원은 모두 평양을 중심으로 한 장로교인과 감리교인 여성 지도자들이었다. 교회와 학교를 통해 양성한 600여 명의 남자 지도자들이 1911년 백오인사건으로 일망타진되었다면 (8년 후에 상일운동으로 재기), 9년 후 동일한 서북지역에서 600명의 여성 지도자들이 1920년 말 대한애국부인회 검거 사건으로 전부 체포되었다. 이는 기독교가 서북 지역에 들어간 지 실제적으로 약 20년 만에 여성을 계몽, 교육하고 애국 지사로 기르고 조직하여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1930 여자가 본 남자 개조점 "女子가 본 男子 改造點," 『別乾坤』 제25호 (1930년 1월 1일): 69-75. 批評답게 批評해라, 東亞日報 崔義順 일반 남자는 구도덕(舊道德)과 인습(因習)으로써 여자의 잘못을 확실(確實)하게 알지도 못하고 피상(皮相)을 들어다가는 함부로 비판(批判)을 한다. 그리고 한 여자의 잘못을 가지고는 전체의 여자를 비평한다. 물론 여자를 비평하지 말나는 것은 안이고 사실 잘못한 것이면 비평을 하여도 무방하지만은 좀더 철저하게 해부한 뒤에 비평을 하고 또는 舊道德 因習의 관념을 떠나서 비평하기를 바란다. 貞操와 煙草, 同德女高 金仁順 一, 貞操를 잘 직히라.<69>남자도 貞操를 직혀야 할 것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업다. 특히 思想 處世에도 貞操를 직혀야 할 것이다. 二, 술과 담배를 금하라. 活氣를 내라,..
김활란, "남자의 반성을 촉함," 1920 김활란, "男子의 反省을 促함," 제4호 (1920년 6월): 38-40.
한국의 첫 여자 목사 채핀 Chaffin 자매 Chaffin, Anna Margaret Bair, 蔡富仁, 1883~1977: 1911년 결혼하고 남편 채핀 목사를 따라 1913년 미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1916년 6월 남편과 사별하고 미북감리회 소속 선교사가 되어 서울 감리회 여자성경학원 교사가 되었다. 1918년 앨버트슨(Albertson)의 별세로 그 후임 원장이 되었다. 안식년(제1차)때 뉴욕 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1919-1920)했다. 1920년 한국에 돌아와 학교명을 감리회 협성여자신학교로 바꾸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안식년(제2차) 에는 콜럼비아대학에서 종교교육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1년 《우리 집》선교잡지 편집인과, 《절제 The Tempreance News》발행인으로 문서 선교에 힘썼다. 1931년 6월 ..
1955 첫 여자목사 전밀라 1955 감리회 첫 여자목사 전밀라 한국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 목사로 안수 받은 전밀라 여사 재건교회 최덕지는 1955년 5월 2일 목사로 안수 받아, 전 목사가 약 두 달 먼저 안수를 받았다. 재건 총회는 당시 회의록을 근거로 최덕지 목사가 1955년 5월 4일에 김영숙, 김소갑숙과 함께 목사 안수 받은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른 모든 자료는 안수 받기 전 명예목사로 호칭한 것을 목사 안수와 혼동하여 사용했다. 1955년 3월 16일 안수식 장면, 참으로 소박하다. 장로교회는 기장 1974년, 예장 통합 1996년에 첫 여자 목사 안수를 주었고, 성결교회는 2004년, 기하성(순복음)은 2007년에 안수를 주었다. 그러나 예장 합동은 아직 안수가 불가하다. 작년에는 여학생의 신학생 입학도 불가하다고 하..
1955 재건교회 첫 여자 목사 최덕지 1955년 재건교회 첫 여자 목사로 안수 받은 최덕지 최덕지 목사 민족운동, 여성운동, 신사참배 반대운동, 교회재건운동의 기수이자 첫 한국인 여자 목사의 한 명인 최덕지 여사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뒷줄 중앙이 최덕지, 1936년 경남노회 순회 전도사 시절 [출처: http://www.hanryeo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78] 1920년대에는 통영의 유곽을 보고 공창 폐지 운동을 전개하여 여성 권익을 신장하고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까지 여전도회 회장으로 신사참배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감옥에서 온갖 고문과 핍박을 견디며 7년 성상을 투쟁하다가 옥중성도로 해방을 맞이하고 해방 이후에는 가장 강경한 교회 재건운동, 신사참배 회개 운동을 전개한 한국교회의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