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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교수의 글 /코로나 사태와 한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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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는 1919년 2월 중순에 무오독감 종식 "流行性 毒感, 경성에는 없는 모양, 동경서는 창궐 중," , 1919년 2월 13일. 1919년 2월 도쿄에서는 스페인독감 2차 유행이 왔으나, 서울에서는 10-11월에 대유행을 한 후 2월 초가 되면서 유행이 거의 끝났다. 일부 발생환자가 있었지만 급속히 환자는 줄었다. 일부에서 삼일 운동 지도자들이 무오독감(스페인 플루)에도 불구하고 3월 1일 서울과 평양 집회 등을 계획했다고 하면서, 정치 운동은 팬데믹 와중에서도 유행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집회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2월 중순 이후 서울에서 발병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독감 유행에 대해서 상세히 보도하던 를 보면 2월 중순 이후 한국의 도시에서 발생한 사례를 보도하는 경우는 없다. (물론 소수 발병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0..
그때나 지금이나, 기도로 치병한다고 돈을 갈취 "祈禱로 毒感을 고친다고 돈을 먹은 중놈," , 1918년 11월 22일 황해도 연백의 강서사 승려 홍순익은 불전 공양을 잘 하면 유행성 감기는 물론 만병이 통치된다 사기를 치고 돈을 갈취했다. 기도로 독감을 고친다는 헛소리로 돈을 먹었다.
1918년 10월 한 달 서울 종로 유행성독감 피해는? 1918년 10월 종로경찰서 조사에 따르면 한 달 동안 스페인독감 환자 확진자는 2만 6천 명이 넘었다. 당시 위생은 경찰 업무였다. 일본인 2,600명, 한국인 2,4000명, 계 26,600 여 명 ("종로관내만 2만 6천: 기막히게 많은 독감의 환자수," , 1918년 10월 31일) 사망자는 일본인 10명, 한국인 138명으로 대부분 어린이나 노인이 죽었다. 일본인의 치사율은 0.38%, 한국인은 0.58%로 일본인이 좀 더 치료를 잘 받아 치사율이 낮았다. ("朝鮮人에 死亡者가 많은 이유는 치료를 잘 못하는 까닭이다," , 1918년 11월 3일) 10-11월에 일본, 중국, 한국에 스페인 독감이 창궐했다. 서울 감염자를 조사해 보니 하류층과 노인층이 많았다. ("京城에 毒感으로 死亡한 사람을 ..
1918 미주 한인 스페인독감 피해 1918년 10월 24일 를 보면, 스페인 독감을 '스패니쉬 인풀루엔자'나 '서반아 감기'로 지칭했고, 마스크는 '낯가리움'으로 번역해서 사용했다. 지금도 '낯가리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와이오밍 수퍼리오 푸에불로에 거주하던 원창의 씨가 스페인 독감으로 10월 16일에 사망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인쇄부 사무직의 최응선 씨도 감염되었으나 완쾌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10월 22일 하루 사이에 1.242명이 감염되었고 44명이 사망했다. (전체 감염자 7,486명, 사망자 206명) 이에 시 당국은 학교를 폐쇄하고 연극장이나 무도장과 같은 공중 장소에서의 집회를 금지하고 거리에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다. 독감은 활동적인 젊은 층이 많이 걸려 주의를 환기시켰다. 다만 동거하는 부부의 경우 "여..
팬데믹 시대 어떻게 예배를 드릴 것인가? 코로나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한국교회가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현재 한국 교회 예배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성찰해 보자. 횡령, 성범죄, 세습 등으로 타락한 한국 개신교가 회개하지 않으면 유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I. 예배냐 신앙이냐 한국교회는 1938-45년에 예배를 목숨처럼 지키지 않았다. 1938년 장로회 총회 신사참배 결의 후, 참배하는 교회에 일어난 일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해보자. 상당 부분은 생략했다. (1) 1941년 1월 평북교회들 안식일 폐지 결의: "50년 서양 사상 지배를 철폐하고" 전시 체제에 맞추어, 일요일이라 부르고 주일성수 포기하고, 생업에 종사하였다. 다른 지역도 따랐다. (2) 1942년 1-3월 평남 교회 560개 중 552개 교회 종 헌납: 싱가포르 ..
[두 가지 길] 엡 2:14 4년 반 전 트럼프와 교황 간의 설전 장벽을 쌓는 길과 다리를 세우는 길의 대결. 그러나 팬데믹으로 인해 다리들이 끊어지고 있다. 국가 간 국경, 인종 간 차별, 진영 간 프레임이 강화되고 있다. 이 와중에 한국 개신교는 트럼프의 전략을 벤치마킹 중. 70년 간 반공의 성벽, 이젠 반동성애의 장벽으로 뭉친다. 줄 긋기와 벽 쌓기에 이력이 난 목사들이 때를 만났다. 적으로부터 '안전' 지대를 확보하겠다는 열심이 날뛴다. 양성 판정이 나올 때까지 신학 검증의 날을 겨눈다. 한때 바울도 그런 사람이었다. 한국교회는 성경 대신 트럼프 어록를 읽고 묵상하고 있다. 사탄의 세력과 전투하는 십자군 정체성을 심어주고 저들과 구별된 우리의 선민 의식을 구축하고 자기도취적 성 안에서 십자기를 흔드는 넓은 길로 가는, T씨..
1918 무오 독감 때 교회는 무엇을 하였는가? 코로나19로 한국 교회가 바이러스에 걸렸다. 70년 동안 주일성수를 강조하다가 졸지에 주일 예배당 예배를 중지하게 되자,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예배당 사수론까지 나오고, 일부 지자체 정부에서는 예배 중지 행정명령까지 내리려고 한다. 예배학 학자나 신학교 교수나 교단에서 재빨리 지침을 내리고 성도들을 안심시키는 신학적 안내를 해야 할 터인데,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는 천벌을 받았다고 하면 안 되지만, 내가 아프고 고난을 받을 때는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좋다. 한국 교회가 왜 예배 집회를 중단하게 되었는지, 한두 달 모이지 못하는 사순절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향후 한국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진지한 성찰과 연구와 토론의 시간이 없다..
[예배를 중단한 경우 2] 1938-45년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200여 개 교회는 문을 닫았다. 그 교회 교인들은 가정 예배나 개인 예배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신사참배에 찬성한 목사와 그 교회는 동방에 있는 일본 천황을 향해 90도로 절하는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일장기에 대한 90도 최경례, 기미가요 제창을 한 후에 예배를 드리는 훼절을 했다. 1941년 개교한 평양신학교 채플 시간도 1부 국가의례 후 2부 예배를 드렸다. 감리교회나 천주교회는 신사참배에 찬성했으므로 계속 주일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문을 닫았던 장로 교회들에도 얼마 후 신사참배에 찬성하는 목사들이 담임으로 파송되어 1부 국가의례, 2부 예배를 드렸다. 평양 장대현교회도 서문교회도 그런 식으로 일제화되었다. 그러나 신사참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