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9월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200여 개 교회는 문을 닫았다. 그 교회 교인들은 가정 예배나 개인 예배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신사참배에 찬성한 목사와 그 교회는 동방에 있는 일본 천황을 향해 90도로 절하는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일장기에 대한 90도 최경례, 기미가요 제창을 한 후에 예배를 드리는 훼절을 했다. 1941년 개교한 평양신학교 채플 시간도 1부 국가의례 후 2부 예배를 드렸다. 감리교회나 천주교회는 신사참배에 찬성했으므로 계속 주일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문을 닫았던 장로 교회들에도 얼마 후 신사참배에 찬성하는 목사들이 담임으로 파송되어 1부 국가의례, 2부 예배를 드렸다. 평양 장대현교회도 서문교회도 그런 식으로 일제화되었다.
그러나 신사참배는 단독으로 있지 않았다. 동방요배 → 황국신민서사 암송 → 일장기 경례 → 신사참배 → 전쟁 지원 → 신구약의 선별적 수용 → 일부 찬송가 삭제에 이어 1940년대에는 신사 침례까지 받는 목사도 생겼다. 황성요배를 하지 않으면 일본에서는 불경죄에 걸렸지만, 조선에서는 반역죄로 처리되었다.
신사에 가서는 신국의 가미사마에게 “하루라도 속히 우리나라가 전쟁에서 이기도록, 군인들이 무사하게 봉공할 수 있도록 기원하고, 우리들은 굳게 총후[후방]를 지키겠다고 맹세합니다.”라고 기도했다.
주일 예배를 드리기는 해도 우상숭배와 함께 하는 예배였기에 한국 교회의 실제적인 주일 공예배는 1939-45년에 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1945년 4월 말부터 일본의 패전이 짙어지자, 그나마 드리던 예배도 상당수 교회는 중단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대동강 남쪽 선교정에 있던 기독교장로교단 동평양교회에서는 성전(聖戰) 완수의 날까지 예배를 중지한다고 결정했다. 예배당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유치원은 공장의 사무실로 바뀌었다. (자료를 더 찾아보아야 겠지만) 결국 1945년 5-8월 약 4개월 동안 한국의 상당수 개신교회는 문을 닫고 예배를 중지하고, 일부는 전쟁을 위한 공장, 사무실이 되었다. 신앙 양심을 버리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신사에 절하던 목사들도 전쟁 말기에는 교회를 지키지도 못하고 예배도 드리지 못했다.
일제 말에 두 개의 길이 있었다. 넓은 길을 간 자는 시류에 순응하면서 무사유(無思惟)로 대세를 따랐다. 그 결과 교회는 우상숭배의 무리가 되고 예배당은 악행의 소굴이 되었다. 겨레와 함께 웃고 겨레와 함께 욕을 본 수난자들은 좁은 길을 갔다. 일제가 태극기를 말살할 때 예배당의 십자가도 떼었으나, 자유와 양심과 순교의 정신은 없앨 수 없었다. 가정예배를 드린 자들이 남은 자가 되었다. 그래서 일제는 1945년 8월에 전 기독교도를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를 지키고 주일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무사유의 습관적 목회자들도,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게 된다. 순교를 각오하지 않아도 사망자가 나올 수 있다. 오히려 자진해서 문을 닫고 온라인 예배나 가정 예배를 드린 자들은 고민하고 성찰하며 그 기간을 보내야 하므로, 다시 교회 문을 열게 되면 ‘해방’의 감격과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일제말 가정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사수했던 선배들의 전통을 따라, 오늘 비록 잠시 예배당에 가지 못하더라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한국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 동안 한국교회가 지었던 성차별, 성폭행, 횡령, 사기, 세습 등의 죄악을 회개하는 기간이 되면 좋겠다.
교회 공예배와 교제와 안식을 사모하는 열정이 사순절에 넘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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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중단한 경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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