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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교수의 글 /이런 게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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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훔볼트대학교 방문, 2011년 2011년 1년 간 독일 보흠에 있는 Ruhr University의 한국학 담당인 Dr. Marion Eggert 교수님 초청으로 그 학교 KHK 연구소에 Visiting Fellow로 가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세미나에 참석하면 되었으므로 독일 이곳저곳을 기차로 돌아다녔다. 많이 걸었다. 그 결과 테뉴어를 받기 위해 무리하게 책을 만들다 걸린 일자목이 낳았다. 내가 조교수를 마친 시점에 에거트 교수님은 내 논문 하나를 읽고 전혀 모르는 주니어 교수를 초빙해 주셨다. 그 분의 학은이 크다. 다음은 베를린에 갔을 때 포츠담광장에 있는 유명한 유대인 홀로코스추모비들을 보고, 이어서 방문한 훔볼트대학교 입구다. 홀름헬트의 동상이 서 있다. 훔볼트대학은 본회퍼가 학위를 하고 강사를 했던 곳이다. 랑케, 아인..
NEXT [Next] 이건창은 13세(1866)에 별시 문과에 최연소 합격했고, 남 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 급제했고, 김 구는 18세에 동학 접주가 되어 부하 수 백을 부렸고, 유관순은 18세에 순국했고, 혜초는 20세에 중국-인도 등 40개국 여행을 시작했고, 존스는 21세(1888)에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조성진은 21세(2015)에 쇼팽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했고, 윤동주는 24세에 "서시"를 썼고, 니체는 24세에 바젤대학교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고, 김영삼은 25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칼빈은 25세에 초판을 썼고, 제갈공명은 26세에 유비의 軍師가 되었고, 홍종우는 26세에 파리 유학하며 심청전을 불어로 출판했고, 노회찬은 26세에 기아에 용접공으로 위장취업을 했고, 옥성득은 27세에 초고..
삶은 공평하다 박사 논문을 쓸 때 돈을 아끼려고 목사들이 교회를 놓고 싸우는 도시를 떠나 조용한 시골 해변가 근처에서 몇 년을 살았다. 여름이면 다른 곳에 여행을 가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 셋 데리고 조금 가면 모래사장이라 놀 수 있었다. 아이들은 가까운 두 동네 도서관들 책을 거의 다 읽었다. 자라서 시인이 되고 아티스트가 되고 작가가 되었다. 그곳에 살 때 식구 다섯 명이 옷이나 신발을 사지 않았다. 동네 쓰레기장 옆에 무료 창고(나눔의 집)가 있어서 입다가 적어진 옷이나 신발을 서로 나누었기에 깨끗한 옷이나 일용품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라 어려운 친구도 돕고 기부도 잘 한다. 그리운 나의 조용하고 가난했던 시간들. 그때 읽은 자료로 지금도 공부하고 그 마신 공기로 지금도 호흡하고 그 파도 소리..
7년을 며칠 같이 [추억의 숙대 서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고학생이던 시절 7년을 하루같이 숙대 서문을 주말을 빼고 매일 드나들며 이만열 교수님 연구실 개인 조교로 오후부터 저녁 9시까지 공부했다. 짜장면으로 저녁을 채우고, 의료 선교사들, 초기 선교사들, 로스, 루미스의 손글씨 편지 자료부터 읽어 나가며 정리했다. 숙대에서 밤 늦게까지 공부하는 방은 그 연구실이 유일했다. 교수님과 내가 정문으로 퇴근하면 수위들이 불을 끄고 쉬었다. "엉덩이로 공부한" 결과물이 와 1, 2권이었다. 추후 미국에 와서 과 을 냈다. 7년 간 책 다섯 권을 쓴 셈이다. 매일 오후에 나는 신림동을 출발해 버스로 남영역에 내려 숙대까지 오르막 길을 뭇 여대생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들을 돌 보듯 하며 힘차게 걸었다. ㅎ 다시 걷고 싶은 ..
학자와 고난 흔히 교수나 학자를 보고 책상물림이라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한다. 90년대까지 좋은 시절에는 그런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책상이 학자를 만드는 시대는 지나갔다. 팬데믹으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시절도 지나갔다. 알맹이가 있어야 신학자요 목회자다. 학자도 사람이요, 시대가 고난의 시대이기에, 학자/목사도 고난의 열매이다. 루터의 말처럼 "기도와 묵상과 고난이 신학자를 만든다." 요즘 학자는 복사와 스캔하는 단계, 디지털 자료에서 찾아 정리하는 단계, 읽고 쓰고 묵상하는 단계, 논문 심사 후 수정하는 단계, 박사학위 라이선스를 딴 후에도 취직 지원에서 수 십 번 떨어지는 고난의 시작 단계, 시간 강사로 5년, 10년을 견디며 온갖 애환을 맛보아야 하는 단계 ..... 등 갈수록 늘어나는 스트레스와 고통을 감..
[이런 게 인생] 그 동안 만든 책 그동안 만든 책만 모아 보았다. 저서, 편역서, 번역서, 학위 논문 합하니 32권이다. (공저, 공편역 포함, 한 챕터만 들어간 공저는 생략) 모아 놓고 보니 별 게 아니다. 그래도 내가 만든 것이니 애정이 간다. 일곱 권은 내가 직접 작업한 글이 절반 정도. 학위논문 빼고, 29권 책들을 대충 페이지로 계산하니 17,000쪽이 넘는다. 340쪽을 한 권으로 계산하면 50권 분량이다. 빈 공간이 아직 많다. 올해 내년에 내기로 계약한 책이 네 권이다. 무리이지만 내 팔자이다. 무엇을 하든 매일 책 두세 페이지 분량은 만들어야 한다. 페북이나 블로그에 올리는 글은 생각나는 대로, 자료를 본 대로 대충 정리한 글이라 초고의 일부가 된다. 올리지 않는 글이 물론 더 많다. 남이 안 본 1차 자료는 무궁하니, ..
[이런 게 인생] 3,000 대 3 온누리교회에서 중등부 전도사로 3년, 전임 전도사로 1년을 봉사했다. 중등부는 학생이 수십 명에서 200명 정도로 늘었고, 교인은 수 백 명에서 3,000명으로 늘었다. 셋째까지 태어나고 석사 공부에 전임 일까지 과부하가 걸린 나는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사임했다. 서울은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원에도, 두레에도 있을 곳이 없었다. 탈서울하여, 아는 사람이 없는 거창읍에 무작정 내려가서 연립주택에 1년 세를 얻었다. 10층 옥상에서 1층으로 이사하니 편했다.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내도 동의했다. 그러나 1월에 무슨 선생 자리가 있겠는가? 얼마 떨어진 작은 마을에 한 때 교인이 100명이나 되던 교회가 이농으로 사람이 다 떠나고 예배당만 텅 비..
[이런 게 인생] 미국에서 박사 지원 아내와 나는 어린 아이 셋을 데리고 유학을 왔다. 영어부터 모든 게 쉽지 않았다. 나는 미국 신학교 시스템이나 박사 지원 과정을 잘 몰랐다. 1993년 나이 서른 넷에 세운상가 조립 286 컴퓨터를 이민 가방에 들고 와서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한국기독교사 전공으로 어디서 공부해야 할지, 교회사나 선교학 중 어디서 박사과정을 밟아야 할지 몰랐다. 내 전공으로 공부한 가까운 선배도 없었고 충고해 줄 만한 이들도 없었다. 교회사이고 미국교회사와 연관이 많으니 그쪽으로 가야 하는가보다 해서 첫 학기에 미국교회사, 초대교회사, 종교개혁사, 한미 이민신학 네 과목을 들었다. 미국에서 첫 학기라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지만, 다행히 올 에이를 받았다. 1월까지 지원해야 하므로 첫 학기 성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