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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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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총독부의 13계명 1939년 초 조선총독부의 명령1. 매일 아침 동경의 황성을 향해 절하기(궁성요배, 동방요배)2. 국경일에 일장기 게양3. 신사 참배4-13.근검절약, 허례허식 금지,화재 조심하고 공습을 대비,건강한 자녀를 길러 나라에 바치라.적절한 운동으로 건강한 몸을 만들어 나라에 바치라.
1935 기독청년운동 진흥책 논의 "基督天道敎 兩大陣營 緊張, 三千萬 敎徒와 新首惱部 動向," 7-2 (1935년 2월): 18-35. 朝鮮 基督靑年運動 振興策 -아울너 聯合會 及 靑年會의 改造案- 이번에 朝鮮 基靑總務 申興雨, 副總務 玄東完 兩氏가 辭任하엿슴니다. 이 機會에 基督敎靑年運動을 크게 振興식히자는 소리가 全半島 社會에 놉허 감니다. 생각건대 10년 전만 하여도 3,000의 會員을 가젓고 또 30만원이란 巨額의 米國補助가 잇섯스며, 元老 李商在씨 配下에 卓越한 人材가 雲霓가치 모여, 이 땅 文化의 큰 貯水池의 任務를 다하여 오더니 엇지하야 오늘날은 그 100만원이란 巨大한 財團法人의 體軀를 가지고서도 會員數의 激減, 米國補助의 4,5만원 程度로의 激減, 그리고 生動하는 朝鮮社會 實情과는 차츰 流離되여 가고 말려는 傾向이 잇게 ..
1935-36년 순천 선교지부 연례보고서 신사참배의 위기가 닥치기 직전 한국 장로교회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엿볼 수 있는 보고서이다. 선교지부마다 개인 선교사가 연례보고서를 작성했고, 선교지부도 이런 연례보고서를 작성했다. 한 해에 국내에 3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매년 연례보고서를, 지부에서는 매달 회의를 열고 월별, 분기별, 연례보고서를 작성했고, 각 선교회는 이런 보고서를 취합한 뒤 다시 연례보고서를 작성해서 본국 본부에 보냈다. 선교사들의 공의회, 선교회, 선교지부, 개인의 연례보고서를 읽어야 전체 흐름을 알 수 있다.
1932 송기주의 한글 타자기 1949년 안과의사인 공병우 씨가 3벌씩 가로쓰기 한글 타자기를 발명하면서 한글 타자기 실용 시대가 열렸다. 그 전에 1913년 이원익이 개발한 최초의 타자기가 있었으나 실용화되지 못했다. 언더우드 2세도 발명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1927년 뉴욕에 유학하던 송기주가 타자기를 만들었으나 상품화되지 못했다. 송기주는 계속 한글 타자기를 연구하여 1933년 Underwood-Elliott-Fisher Co.와 합작으로 42개의 키로 구성된 타자기를 $65에 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가로로 찍고 세로로 읽는 타자기였다. 따라서 실용성이 떨어져 별로 이용되지 않았다. 1933년 송기주 타자기에 대한 보도를 보자. 모양은 영어 타자기를 그대로 닮았으나, 이 송기주 타자기의 결정적 단점은 한글을 세로쓰기로 읽..
1937 거제 지방 주일학교 강습회 지세포교회에서 열린 제5회 거제지방 주일학교 강습회, 1937년 3월 거제도는 호주장로회 통영 선교지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참고로 장승포읍에 진정률 장로는 수산업 회사 사장으로 거부였다. 그의 거액 희사로 1939-40년 선교부가 철수한 후에도 통영 진명여학교는 운영될 수 있었다. 해방 후 진정률 장로의 희사로 장로회신학대학과 연세대가 재단법인을 만들 수 있었다.
1938 북간도 용정 여자성경학교 누가 교회의 주역인가?
1930 봉천 조선인 예수교 교회 이훈구, (평양, 숭실전문대학 경제학교실, 1931), 224. 1930년 6월 말 현재 만주(동만주, 남만주)에 한인 개신교회는 172개, 교역자는 764명, 교인수는 10,328명, 학교 206개, 학생수 9,438명이었다. 이 가운데 아래 봉천교회가 가장 큰 교회였다. 그런데 1930년에 중국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우려하여 교회들을 일시 폐쇄했다. 집회를 통해 공산당 선전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한 조치였다.
1934 감리교회 희년, 연대표 감리교회는 1934년 6월 매클레이 서울 방한을 기점으로 50주년을 기념했다. 아펜젤러나 스크랜턴으로 하면 장로교회에 뒤지기 때문에, 알렌이 온 1884년 9월보다 3개월 전인 6월에 방문한 매클레이를 기점으로 했다. 양주삼 감독이 무리하게 연도를 앞당겨 1934년 6월에 희년을 기념했다. 방문 선교사를 기점으로 하는 나라는 없다. (참고, 옥성득, (새물결플러스, 2016), 제4장 , pp. 58-91.) 장로교회에 대한 열등감으로 희년을 1년 앞당겼다. 1934년에는 거의 양주삼 감독 독주 체제였다. 그러다가 바로 신사참배 수용하고, 이후 몰락의 길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