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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김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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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的 기독교 우치무라 간조와 김교신-- 역사적 관점 内村鑑三(1861-1930년)과 김교신(1901-1945)의 나이 차이는 40세요, 김교신은 우치무라 사후에 15년을 더 살았다. 따라서 1920년대의 김교신이 내촌의 무교회주의를 계승하고 성경적인 순수 복음의 기독교를 전하려는 측면이 강했다면, 1930-45년의 김교신은 좀 더 조선적 기독교, 30년대의 상황에서 나온 새로운 독자적인 면이 있을 것이다. 20년대에는 내촌과의 연속성(continuity), 30년대는 내촌과의 비연속성(discontinuity)의 관점에서 보면 좋을 것이다. 즉 1930년 이후의 김교신의 자료를 읽을 때에는, (1) 내촌이 경험하지 못했던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교회의 신사참배(1935-45), 태평양전쟁(1941..
소록도에서 김교신에게 보낸 편지, 1935년 소록도 갱생원 북부교회 맹인구락부 문신활(文信活)이 성서조선 김교신에게 보낸 편지, 1935년 성서조선지가 나병원에서 널리 읽혔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한센씨 환자들의 깊은 영성을 알 수 있다. 1. 3월 3월 16일(토) ...편집 조판까지 필한 후에 소록도 통신을 접하다. 이것은 주필의 일생에 가장 큰 사변의 하나이다. 이 일을 지우들께 알리기를 지체할 수 없었다. 반도의 유위한 청년들이 복음을 요구하지 않고, 유리한 전도지를 교권자 제씨가 강하게 독점하고자 할진대 우리는 애석할 것 없이 퇴각하여 소록도의 오천명 친구에게 가리라. 병자라야 의원이 필요하다. 단, 지면의 제한으로 조군의 요한복음이 2면으로 단축된 것은 미안천만. 장도원 목사의 간곡한 권설도 있어서 이번 4월호는 춘풍같은 교회 친화호로..
김교신, "僞善도 그리워," 1933 僞善도 그리워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장 가증한 것, 가장 견딜 수 없이 가증한 것은 위선이었다. ... 마는 위선자의 표본으로 지목받던 서기관과 바리새교인들의 언행을 상고하면 저들에게는 차라리 기특한 것이 많았다. 저들은 “말만 하고 행치 않는” 것이 결점이었으나(마 23:3) 그 하는 말은 옳은 말이었으므로, 예수도 자기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명하는 말은 준행하라“고 가르치셨다(마 23:2). 저희는 헛된 맹세로써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였으나, 맹세란 것이 신성한 것인 줄은 알았던 고로 지시할 물건을 고려하였다. 저희은 “잔과 소반의 거죽은 깨끗이 하되, 그 안은 토색함과 불의함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책망 받았으나, 그래도 깨끗이 할 줄은 알았고 규모는 있는 사람들이었다. 저희는 선지자의 무덤을 ..
과거 50년, 향후 50년의 한국교회 80년 전(1936년) 김교신은 '금후의 조선 기독교'라는 짧은 글을 썼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 교회 50년은 형편없는 인간들에도 불구하고 은총과 이적의 역사로 그나마 흘러왔다. 50만 성도는 성령의 축복이 없이 된 이는 한 명도 없다. 과거 50년을 대표하는 인물은 대부흥의 길선주 목사였다. 그러나 이제 사이비 성령으로 미혹하는 자들이 일어나 이성을 마비시킨다. 경계할 일이다. 첫 50년이 '성신 타입'이었다면 금후엔 '학구 타입'이 되어야 하겠다. 식염수 주사를 맞듯이 부흥회로 열을 구하지 말고, 냉수를 끼얹어 차가운 머리로 학자적 양심을 배양하고 학문적 근거 위에 신앙을 재건할 때이다. 성신이든 학구든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안 된다. 성령의 도움으로 성신과 학구가 합금처럼 하나가 될 때 ..
김교신, "조선의 희망," 1937 "조선의 희망" 우리는 경험을 통해 부흥회로 교회에 영적 불이 붙는다고 해서 나라에 희망이 생기지 않음을 안다. 한 도시 전반이 기독교화 되어 상인까지 예수쟁이 행세를 해야 장사를 해도 희망이 약속되지 않았다. 교회 부흥으로 靈火가 타올라도 안 되고, 도시 聖市化로 기독교가 힘을 가져도, 신학생이 많고 신학교가 부흥해도, 구령 사업 선교 사업이 늘어나도 사회 변화의 희망은 생기지 않았다. 차라리 양돈 양계를 해도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따라 속이지 않을 때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요, 전 시민에게 희망을 주는 대 사업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거대한 사업 성취나 신령한 사업 헌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있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참패하더라도, 참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고 ..
1936-37 김교신 주일마다 부활사와 성서조선사에서 설교 김교신은 1928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옮기고 이후 12년간 근속 근무했다. 1930년 5월 16호부터 정상훈에 이어 주필로서 집필·교정·인쇄·우송 등 사무 일체를 전담했다. 성서조선은 158호(1942월 3월) “조와”(弔蛙) 필화 사건으로 폐간되었다. 1936년 정릉 이사 후에도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주일에는 매주 예배와 성경 강독 설교를 했다. 서울 부활사 강당에서 주일 오전 10시 30분에 모여 예배를드리고 설교하다가 주일 오후 2시 30분으로 시간을 바꾸어 모였다. 이어 성서조선사에서 주일 오후에 설교했다. 1936-37년 주일 강화라는 신문사 안내란을 보면 주로 기독교 모임을 안내하고 있다. 당시 서울의 교회와 담임목사나 설교자의 면면을 알 수 있다. 김교신 강의는 인기가 있어서 늘 정보가..
1936 김교신, 금후의 조선 기독교 김교신, "금후의 조선 기독교" 1, 122-124. 김교신 전집이 다시 나왔다고 한다. 1936년 2월에 쓴 그의 글을 보자. 한국기독교 역사는 형편없는 인간들에도 불구하고 은총의 역사로 그나마 흘러왔다.첫 50년이 "성신 타입"이었다면 금후엔 "학구 타입"이 되어야 하겠다. 성신이든 학구든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안된다. 성령의 도움으로 성신과 학구가 합금처럼 하나 될 때 다가오는 순교의 시대를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내용을 오늘에 적용하면, 흔히 해방 후 50년은 성장의 시대, 이후 지금까지 쇠퇴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그나마 지난 20년을버틴 것은 은총이었다. 이제 남은 30년은 다시 성신("할렐루야" 개인 구원과 교회 성장과 성령 충만) 타입과 학구 ("하나님의 나라"와 소수자 보호와 사회..
1945년 4월 25일 김교신 별세 발진티푸스에 감염, 급서(急逝)하다. 모세가 가나안을 바라보며 승천하듯 해방 직전에 별세하니, 아깝고 통절! --- 노평구, "김교신 선생 해적이," 17 (1974년), 19.​45년 45세에 돌아가신 지 20년, 1974년에 은 김교신 특집을 꾸몄다.그 표지와 안표지에 실린 사진 한 장을 올린다. 1938년 양정고보 앨범에 실린 친필, "己所欲 施於人"공자의 말을 긍정문으로 표현한 예수의 말씀이다. 공자의 말이나 예수의 말이나 같은 뜻이다. 선비 김교신의 곧은 정신이 담긴 달필이다. 80년 전 한 선비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손기정을 만들고일기를 쓰고 성서를 가르치고 을 만들며, 성서 위에 조선을 만들기 위해 애쓰다 가셨다. ​역사는 믿는 바 大義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 그 피땀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