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은 1928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옮기고 이후 12년간 근속 근무했다. 1930년 5월 16호부터 정상훈에 이어 <성서조선> 주필로서 집필·교정·인쇄·우송 등 사무 일체를 전담했다. 성서조선은 158호(1942월 3월) “조와”(弔蛙) 필화 사건으로 폐간되었다. 1936년 정릉 이사 후에도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주일에는 매주 예배와 성경 강독 설교를 했다.
서울 부활사 강당에서 주일 오전 10시 30분에 모여 예배를드리고 설교하다가 주일 오후 2시 30분으로 시간을 바꾸어 모였다. 이어 성서조선사에서 주일 오후에 설교했다.
1936-37년 주일 강화라는 신문사 안내란을 보면 주로 기독교 모임을 안내하고 있다. 당시 서울의 교회와 담임목사나 설교자의 면면을 알 수 있다. 김교신 강의는 인기가 있어서 늘 정보가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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