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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교수의 글 /잡지 기고문, 연재,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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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60주년과 한국 기독교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4월은 잔인한 달이지만 또한 부활의 달이다. 4.3(제주, 1948년)을 지나 4.19(1960년)가 있고 벌써 6주년이 되는 4.16(세월호, 2014년)도 있다. 그러나 별다른 기념식 없이 60주년을 맞이하는 4.19를 돌아보는 우리의 마음에는 큰 감흥이 없다. 60주년이 된 지금 사건 당사자인 4.19 세대가 퇴진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두 세대 전의 4.19가 오늘의 COVID-19에 가려 퇴색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비극과 재난이 넘치는 사회에서 망각은 치료제가 아니라 임시방편의 마약이다. 이 글은 4.19를 소환하여 소위 기독교 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에 대해 간단히 평가하고, 4.19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한다. 혁명의 서사가 넘치는 사회 한국사는 혁명으로 넘쳐난..
지나간 고난: 전염병과 초기 한국교회 https://www.duranno.com/sl/view/article.asp?nid=10537 [빛과소금] 지나간 고난_글 옥성득 ​전염병과 초기 한국교회 ​ 당연하던 일상이 더 이상 평범하지 않게 된 전환기이다. 주일 아침 텅 빈 예배당을 보면서 울었다. 병상에서 주님을 사모하며 기도했다. 전염병과 신천지로 무너진 교회를 보면서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과 12년을 동역할 자들이 일어날 재건기이다. 조선의 17~18세기는 소농의 근면 혁명으로 농업 생산력이 증가 www.duranno.com 당연하던 일상이 더 이상 평범하지 않게 된 전환기이다. 주일 아침 텅 빈 예배당을 보면서 울었다. 병상에서 주님을 사모하며 기도했다. 전염병과 신천지로 무너진 교회를 보면서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과 12년을 동역할 자들이 일..
장로교회 분쟁: 김선두, 길선주, 변인서 목사 배척 사건, 1923-1934 평양기독교역사 9, , 2019년 10월호. 1920년대는 분규, 파업, 동맹휴학의 시대였고, 장로교회도 안팎으로 투쟁과 분열의 시대였다. 밖으로 사회주의와 진화론으로 무장한 반기독교 운동과 대결하던 교회는 교회 분쟁, 미션스쿨 동맹휴학, 병원 간호사 파업이 지속되면서 내부 분열로 힘을 잃고 사회적 영향력을 점차 상실했다. 기독교 수용 40년 만에 쇠퇴기가 시작되었다. 이 글은 학교나 병원 분쟁은 제외하고 교회 분쟁만 다룬다. 1910년대 초에 시작된 교회 분열이 선교사의 권위주의에 반발한 한국인 목사들의 자유교회 운동이라면, 1920년대 중반 이후 10년간의 교회 분열은 노쇠한 당회(선교사, 한국인 목사와 장로)의 독재와 권위주의에 반발한 신세대 평신도들의 개혁 운동이었다. 교회 분규는 장로회 정치를 ..
105인 사건, 1911-15 옥성득, "기독교 민족주의와 105인 사건, 1911-1915," , 2019년 7월호 1911년 10월 12일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 학생 2명이 총독 살해음모죄로 체포되면서 시작된 ‘조선음모사건’은 1912년 9월 28일 서울지방법원 1심에서 105인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105인 사건’으로 알려졌다. 1913년 11월 대구고등법원에서 99명이 무죄 방면되고, 1915년 2월 수감 중이던 나머지 6명이 특별사면령으로 석방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 글에서는 연구가 덜 된 사건 원인, 체포와 구금 과정, 관련 문서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 원인: 서북 기독교 민족주의의 성장과 신설된 현병대의 실적 필요 총독부가 105인 사건을 일으킨 동기나 이유는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지금까지 정치, 사회..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다시 읽기 옥성득,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다시 읽기," , 2019년 5월호 ‘평양 대부흥’은 1907년 1-6월 평양 시내 장로회와 감리회의 교인들과 학생들에게 일어난 회개와 각성 운동이었다. 성령 강림으로 심각한 죄를 회개하고 공개 자백, 중생 체험, 용서, 배상, 헌신을 통해 교회가 변하고 많은 불신자들이 개종하였기에 ‘대’부흥이었고, 평양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된 점에서 ‘운동’이었다. 한국교회는 이를 처음부터 부흥이나 대부흥(great revival)으로 불렀고, 종교 각성(awakening)이나 오순절(Pentecost)로도 불렀다. 그러나 이 부흥 운동은 20세기 초의 오순절 운동과는 상관이 없었다. 이 글에서는 ‘평양 부흥’으로 부르겠다. 이 글은 여러 책에 나오는 평양 부흥의 배경, 전개..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까지 교회 기초가 놓이다, 1895-1904 평양의 기독교 5 : " , 2019년 3월호 청일전쟁 후 개신교인이 급증하면서 평양은 러일전쟁 이전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본의 승리로 조선을 지배하던 세계관인 중화주의가 무너졌다. 한반도는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장이 되었고, 평양에는 일본 상인들이 몰려왔다. 전쟁의 신 관우가 일본의 근대무기 앞에 항복하고 대한제국이 근대화를 추진하자, 난세에 영적 혁명을 경험한 서북인은 교회로 몰려왔다. 1895-1900년 6년간 북장로회의 경우 서울 선교지부에 5개의 교회가 신설될 때, 평양 선교지부에는 96개(평남 73, 평북 23)가 세워지면서 폭발적 교회 설립기가 시작되었다. | 북장로회의 발전 1895년 1월 마페트와 리가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평양 선교지부가 개시되었고, 1896년 6월 리 가족의 ..
(옥성득) 길선주 목사 1919년 3월 1일 행적은 애국심의 상징 https://cemk.org/goodtree/ 기윤실 , 2019년 2월 27일 길선주 목사와 삼일 운동: 1919년 3월 1일 행적에 대한 일부 비판에 대해 답함 옥성득 1919년 3월 1일 행적에 대한 부정적 언급 일부 민족주의자들 중에 33인 중 한 명인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吉善宙, 1869년 3월 25일~1935년 11월 26일) 목사가 3월 1일 태화관 모임에 참석했으나, 중간에 소변을 보러 나가는 척 하면서 도망을 쳤기 때문에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어서 친일 목사가 되었다고 비판해 왔다. 다른 자료에서는 길 목사가 선언서에 찍을 도장만 빌려주고 사경회를 핑계로 선언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비판해 왔다. 전자는 악의적 왜곡이고 후자는 사실에 대한 부분적 이해이다. 독립지사로 나중에..
1879년 1월 한국 개신교인 첫 세례-올해는 140주년 https://cemk.org/11185/1879년 1월 한국 개신교인 첫 세례--올해는 140주년 올해는 1879년 평안도 의주(義州) 청년 4명이 한국 개신교 첫 신자가 된 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들은 로스(John Ross, 1842-1915) 목사의 전도를 받고 성경을 읽은 후, 중국 만주 영구(營口)장로교회를 찾아가서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선교사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1837-1905)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2019년은 한국개신교 140주년인가?1984년에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을 기념할 때까지는 선교사를 주체로 보는 선교사관에 따라서 선교사를 통한 복음 전래를 개신교 시작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첫 주재 선교사인 알렌 의사가 서울에 온 1884년 9월 22일을 기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