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건/대부흥운동 (1903-08)

(4)
1908 이승만의 연설에 나타난 한국 부흥 운동 평가와 기독교 국가론 1908년 3월 10일 이승만은 미국 피츠버그에서 모인 The first International Convetion of the Young People's Missionary Movement Interdenomination Conference 초교파청년선교운동대회 산하 제1회 국제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연설의 제목은 "Korea's Humiliation, Christianity's Call"이었다. 영문 자료는 2007년 내가 제공하고 편집했다. 당시에는 원문이 실린 자료를 찾지 못하고 서울에서 발행된 Korea Mission Field에 실린 영문을 실었다. 한글 번역은 장신대 서원모 교수가 책임졌고, 내가 수정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7)로 출판된 책이다. 번역문은 아래에 있..
1907 Clark's letter to Friends [발굴] 1907년 3월 1일 클라크(Charles Allen Clark)가 미국 친구들에게 보낸 정기 선교 서신1907년 2월 18일부터 며칠 간 서울 승동교회 길선주 사경회에서 성령 강림하여 회개 이어짐.모든 기독교인들 회개하고 정화되고 새롭게 됨, 정신 여학교 학생들도 성령 체험하고 회개.길선주 장로의 귀신 추방을 보고, 신학교 때나 1906년에 읽은 네비어스의 보고도 믿지 않았던 귀신 들림과 귀신 추방이 사실인 것을 믿게 되었다. 부흥의 결과, 교인들 전도 날연보와 헌금하게 되었다. 1인 평균 17일 날연보를 드렸다. 밀러나 에비슨 등 선교사의 하인들이 돈 훔친 것 회개했다. 서울에 성령께서 강림해서 여러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비록 몇 사람이 죄를 끌어 안고 끙끙대며 고백하지 못했으나, 비참함을 ..
1907년 대부흥 당시 남감리회 여자 선교사들 1907년 6월 현재 남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 한국선교회 소속의 독신 여성 선교사들의 명단이다. 1903년부터 전개된 원산, 송도, 서울의 남감리회 교회의 여성들의 부흥 운동을 지도한 선교사들이었다. 1907년 대부흥 운동은 평양이나 장로회나 남성의 독점적 운동이 아니었다. 여성들, 여자 선교사들의 역할, 감리회의 부흥 운동, 다른 도시와 읍의 부흥도 찾아보아야 한다. 장로회와 달리 감리회는 여성해외선교회가 따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것이 결국 감리회가 1931년 여자 목사 안수를 장로회보다 먼저 하도록 이끌었다. 조직에서 지도력이 나온 경우이다. 모두 11명 가운데 두 명의 소속이 없는 것은 Sadie Harbough의 간호사의 경우 세브란스병원의 의사 허스트와 결혼을 하고 북장로회로 소속을 옮겼고, 부흥..
1907 평양 대부흥은 없었다 [그런 사건은 없었다] 망각한 사건은 사건이 아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면 그 사건은 전설이 된다. 그해 1월 14일을 기억하는 한국 교회는 없다. 그래서 그 사건은 신화가 된다. 아니 이미 신화가 되었다. 2007년에는 서로 그 사건을 기념한다며 난리를 쳤다. 그러나 10주년, 20주년, 30주년, 40주년도 기념하지 않았고 50주년은 소수의 무리만, 60, 70, 80주년도 조용히 지나갔다. 110주년도 루터종교개혁 500주년에 묻어갔다. 토마스목사 순교는 60주년부터 꼬박꼬박 챙기지 않았더냐? 그런에 왜 같이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은 잊었더란 말이냐? 너희에겐 토마스가 더 사용 가치가 있었던 것이냐? 이제 1월 14일을 거론하는 자는 한 명도 없다. 그날이 무슨 날인가 후손에게 말하는 자도 없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