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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대부흥운동 (1903-08)

1907년 대부흥 당시 남감리회 여자 선교사들

1907년 6월 현재 남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 한국선교회 소속의 독신 여성 선교사들의 명단이다.

1903년부터 전개된 원산, 송도, 서울의 남감리회 교회의 여성들의 부흥 운동을 지도한 선교사들이었다.


1907년 대부흥 운동은 평양이나 장로회나 남성의 독점적 운동이 아니었다.

여성들, 여자 선교사들의 역할, 감리회의 부흥 운동, 다른 도시와 읍의 부흥도 찾아보아야 한다.


장로회와 달리 감리회는 여성해외선교회가 따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것이 결국 감리회가 1931년 여자 목사 안수를 장로회보다 먼저 하도록 이끌었다. 조직에서 지도력이 나온 경우이다.


모두 11명 가운데 두 명의 소속이 없는 것은 Sadie Harbough의 간호사의 경우 세브란스병원의 의사 허스트와 결혼을 하고 북장로회로 소속을 옮겼고, 부흥 운동에 참여한 메어리 노울즈는 1906년 원산 구세병원의 로스(Joel Baker Ross) 의사와 결혼했기 때문에 여자선교회를 떠나 남감 해외선교부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다른 선교사들은 소속 선교지부와 한국에 오기 전 거주지나 부모의 거주지를 알 수 있다, 남감리회이기 때문에 버지니아, 조오지아, 미시시피, 켄터키, 텍사스 주 등에서 왔다.

이어서 배티(Martha Ivie Batey)와 루비 켄드릭(Ruby R. Kendrick)이 1907년 후반에 도착했다, 그러나 켄드릭은 1908년 6월 19일 급성맹장염으로 사망하고, 배티는 1911년 Ernst L. Peerman 목사와 결혼하였다. 이처럼 독신 여자 선교사들의 경우 약 20%정도가 혼인으로 선교회 소속을 옮기거나, 약 20% 정도가 질병으로 본국에 돌아가거나 사망했다. 그만큼 독신 여자 선교사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래도 선교지에서 이들은 본토인 여성들의 지위 향상과 영혼 구원을 위해 헌신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도 향상시켰는데, 본국에서는 가르치거나 설교할 수 없었지만 선교지에서는 전도 담당인 경우 거의 여자 목사처럼 활동했다.

결국 이들의 희생과 공헌을 바탕으로 1931년 채빈(Anna Bair Chaffin 蔡富仁, 1883-1977)을 시작으로 감리회 여자 선교사들이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