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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평양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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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정익로 장로 1909년 평양 장대현교회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세 사람은 길선주, 김종섭, 정익로여기 그들의 사진과 정익로 장로의 장로 장립일에 대한 자료가 있어 올린다.주공삼과 정익로는 1904년 5월 15일 장로 장립되어, 당회원은 5명이 되었다. 곧 김종섭, 이영언, 길선주에 이어 주공삼, 정익로가 장대현교회 장로가 되었다. 정 장로는 1908년 일본 동경한인교회에 파송되어 김경식 등과 함께 동경 한인YMCA를 설립한다. 1908년에 발간된 정익노(1863-1928) 장로의 은 첫 근대 옥편으로, 1910년대에 널리 사용되었다. 그는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기독교 부흥에 앞장섰고, 1911년 신민회 사건과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인물로 알려져 있다.한편, 그의 손녀 정보옥은 일본에서 의사가 되었는데..
1933. 2 평양 겨울 부인사경회 열흘 간 1,500명 이상 참여, 뒤의 양옥들은 선교사 사택들, 멀리 공립 평양보통남학교(초등학교 6년제) 건물 일부가 보인다.평양선교지부 연례보고서, 1932-33, p. 8
오문환, 조선기독교사의 일분수령인 평양양란, 1926 오문환, 朝鮮基督敎史의 一分水嶺인 平壤洋亂>, 평양:  광명서관, 30 p, 12.4 x 18.2 cm, 1926.8.31. 초판오문환(南坡 吳文煥, 1903~1962)이 저술한 첫 저서로, 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을 기념하여 1926년에 ​출판했다.
김흥수, "평양 기독교역사박물관 설립 구상" (2021.6) 우리나라에는 전국각지에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박물관이 있다. 이것들은 교단, 개교회, 기독교 기관, 개인 차원에서 설립된 박물관들이다. 201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회는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보존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한국교회역사박물관 설립연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한 바도 있다. 그후 2017년 3월 기독교박물관의 설립을 준비하기 위한 사단법인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이 설립되었다. 현재는 재단법인으로 재조직된 한국기독교역사문화법인이 이 일을 맡고 있는데, 세가지 테마(기독교의 수용·교회일치운동, 사회복지 활동, 항일·민주화·통일운동)가 중심이 될 것이다. 전주에서는 전북기독교성지화사업 추진위원회가 예수병원 부지에 전주시 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을 설립 중이다. 2020년 착공하여 2022년 개관 예정인 전..
양행 洋行 양행 洋行의 뜻 1. 중국 청나라 때에, 외국과의 무역을 독점하였던 관허 상인(官許商人)들이 결성한 조합. 2.서양으로 감. 3. 주로 외국과의 무역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서양식 상점. 제물포에는 世昌洋行이 있었다. 조선 고종 20년(1883)에 독일 마이어 상사가 제물포에 설립한 무역 상사. 강원도 금성의 당현 금광 채굴권을 획득하였으며, 인천에서 상하이(上海)를 거쳐 홍콩에 이르는 기선 정기 노선을 운영했다. 1904-05년 영문판을 보면 싱거 재봉틀 Singer sewing machine 선전이 나온다. 제물포의 함릉거(Holme Ringer) 양행이 판매했다. 그 옆에는 뉴욕에서 수입한 연유(condensed milk)를 광고하는 세창양행(E. Meyer & Co)의 광고. 1909년 평양에는 서..
평양 1926년 예수교인 통계 평양 1926년 1월과 서울 100년 후 다음 책 평양부, (평양, 1926.10)에 따르면 ● 종교 인구 = 23,149/112,929명 = 20.5% (일본인 중 신도 신자, 불교 신자가 많아서) ● 예수교인 인구 = 일본인 281 + 외국인 경영(장로회와 감리회) 7,404 + 조선인 경영 250 = 7,935 = 7.0% ● 한국인 중 예수교인 = 7,654/88,752명 = 8.6% 1930년대 초반으로 가면 10%가 되고, 소위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자랑하였다. 이후 0%로 소멸했다. 교만은 패망의 원인이다. 서울도 한 때 예수교인 30%를 자랑하다가, 이제 10% 아래로 떨어졌다. 이번 선거 후에 더 감소할 것이다
일제 36년간 장대현교회 강단 위 천장에 태극기 숨기고 설교 [자료 발굴] 김성여, "길선주 목사," 제9권 10호(1954년 10월): 162~166. 1945년 8월 19일 해방 후 첫 주일 평양 장대현교회 강단에 오른 김화식 목사의 손에는 커다란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김화식 목사는 말했다. "이 태극기는 일한 합방하던 경술[1910년] 8월 29일에 우리 장대재 예배당 강당 위 천장 밑에 숨겨두어던 것입니다." 감격의 눈물, 환호하는 함성, 흥분의 박수는 예배당이 떠나가는 듯하였다.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 장대재교회는 평양에서도 최고 최대의 교회요, 과거 반세기 동안 전국 교회를 영도하던 본산이었다. 일제 36년 그 무서운 침략 정책 밑에서도 그 꼭대기에 태극기를 비장하고 있었다. 그 태극기를 숨긴 이는 길선주였다. 국망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를..
시골 빈대, 서울 빈대 최정숙, "평양 연광정에 각도 빈대들이," 대한매일신보, 1908. 7. 30. 서울 빈대는 살지고 빛깔도 곱다. 여러 양반들과 부자들의 호의호식하는 꿀같은 단피를 빨아 먹기 때문이다. 이를 알게 된 시골 빈대들이 깨닫기를, 서울 양반들이 시골에 와서 수령이나 방백으로 와서 각도 백성의 피를 다 빨아 먹은고로 살이 많이 쪘으니, 그 놈들을 빨아먹으러 서울로 가서, 그 좋은 피를 다 빨아먹어 전일 원수를 갚아야 겠다고 결정, 대표를 서울로 보내니, 시골 빈대들이 서울로 몰려들더라. 왜 시골 빈대들이 서울이 아닌 평양에 다 모여서 의논을 했을까? 당시 평양은 대부흥운동 후 기독교인이 늘어나고 있었다. 평양 대표들이 왜 서울로 가서 백성을 압제한 관찰사와 군수들을 비판하며 성토했을까? 1905년 을사조약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