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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평양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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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5부까지] 4 역사의 중요성 어머니의 힘, 한국 민중의 정과 한이 녹아든 한국사와 한국인 이민사 선자 어머니는 쌀가게에 가서 쌀 두 홉을 산다. 시집간 딸이 곧 일본에 가야 하므로, 가기 전에 우리 땅에서 난 쌀로 지은 밥을 한 번 맥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난한 과부 엄마로서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몰래 쌀 두 홉을 산다. 신랑 이삭과 딸 선자, 각 한 홉씩, 두 공기 밥이다. 쌀가게 할아버지는 두 홉 대신 세 홉을 준다. 나머지 한 홉은 선자 어머니(김양진)의 몫이다. "이거라도 먹고 설움이라도 조금 샘키라이." 아이 셋을 잃은 후 얻은 외동딸을, 잘 모르는 남자와 결혼시켜 낯선 이국 땅으로 보내야 하는 엄마의 심정을 아는 할아버지의 배려였다. 흰 쌀밥 한 그릇. 그곳에 어머니가 선자를 키워온 20여 년의 사랑과 이별의 눈..
[파친코 5부까지] 3 평양 기독교와 부산 무교의 만남 [파친코 5회까지를 보고] 서북 기독교와 남해안 무교의 만남 1 근대 기독교는 샤머니즘이 강한 지역에 들어가서 영성을 새롭게 함으로써 부흥했다. 20세기 말에는 성령 운동으로 오순절주의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또한 기독교 세계 선교는 중하층에 들어가 그들을 교육시키고 근면검소한 직업인으로 만들어 중산층으로 계층 상승하도록 이끌었다. 2 파친코의 1차 배경은 무교가 뿌리 내린 부산 영도 바닷가이다. 가난한 장애자 어부 남편과 노동자들의 하숙을 치면서 살아가는 아내는 무당의 도움으로 선자를 얻는다. 그녀를 미혼모의 곤경에서 구해주는 남자는 평양 기독교 집안의 백이삭이다. 상인 세력이 강했던 평양-선천-의주에서는 일찍 개신교(장로교회)를 수용하고, 양반 유교의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무교를 버리고 교육과 근면 ..
[파친코 5부까지] 1 거래로 이루어지는 세상 [파친코 5회까지를 보고] deal로 이루어지는 세상 드라마가 5부까지 방영되었다. 5부의 첫 부분은 선자가 빚을 갚기 위해서 오사카 전당포에서 시계를 파는 딜 장면이다. 1부 시작 역시 뉴욕 은행에서 선자의 손자인 솔로몬이 회사 백인 중역과 동경 건물터에 있는 한국인 할머니 집을 매입하는 계약을 성사시키면 부회장 자리를 달라고 '딜'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선자 어머니는 아이 셋을 잃은 후 자손을 점지해 달라고 무당을 찾아가서 빈다. 무당은 신령들과 '딜'을 해 주고, 선자가 태어난다. 선자는 아버지를 따라 어시장에 가서 '딜'하는 법을 배운다. 선자는 비록 남자를 잘못 만나 고한수의 아이를 임신을 했으나, 좋은 남편 이삭을 따라 1931년 오사카로 온다. 그러나 이삭 형 요셉이 동생을 부르기 위해..
[파친코 5부까지] 2 백이삭은 누구인가? [파친코 5회까지를 보고] 보유론과 초유론 1 1601년 예수회 선교사 마테로리치의 로 대변되는 보유론은 동서문명과 동서종교의 첫 만남을 보여준다. 기독교를 당대 최고 문명을 만든 유교에 적응시키는 예의를 갖춘 태도였다. 고상한 유교의 윤리와 인륜(오륜)은 인정하지만, 잃어버린 전통인 원시 유교의 유일신론인 천륜, 곧 首倫을 기독교로 보충한다는 보유론이었다. 2 동시에 기독교는 유일신론 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가족 범위를 초월하는 사회를 위한 희생적 보편적 사랑, 사후 심판과 영생이라는 우월성과 초월성을 가지고 있다. 초유론이었다. 3 는 1910년대에 시작한다. 아직 유교의 도덕과 사회계급 의식이 강한 때였다. 그것이 일제의 식민지화/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무너져간다. 돈이 윤리가 되는 시대가 왔다...
교회의 저항력과 이익단체화 "哀此無辜," , 1899년 10월 16일. ⊙ (이 무고함을 슬퍼함) 서도(황해도와 평안도) 예수교인들이 관찰사와 군수에게 재산을 무리하게 빼앗긴 일로 내부대신에게 품목(호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에 말하지 아니 하였는가, “불식부지 순제지측”(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상제의 법칙을 좇는다)이라 하니, 하늘에 상제의 법칙이 있고 땅에 황제의 법칙이 있거늘, 현금 관찰사와 군수는 별다른 지식이 있는지, 법은 자기가 만든 법이요 관직은 자기를 위한 관직이게 하여, [하략] 참고)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 고을로 옮겨 달란다니 어찌하여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나뇨.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 옥성득,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 , 2018년 9월해방 이전 자료를 보면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고,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은 1934년 선교 희년 기념식 때 동아일보에 처음 사용되었다. (“朝鮮의 예루살렘 平壤에: 十字軍의 閱兵式,” 『東亞日報』, 1934년 9월 5일.) 그러나 1925년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에서 보듯이 당시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1920년대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에 접근함으로써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려고 한다. 평양 기독교의 성장: 소돔에서 예루살렘으로1915년 평양에서는 일요일에 거의 모든 사업장이 문을 닫았다. 인구 6만의 10%인 6천 명의 ..
1866년 평양 양란(洋亂)과 토마스의 순교, 그 해석사 옥성득, "1866년 평양 양란(洋亂)과 토마스의 순교, 그 해석사," , 2019년 1월 평양 기독교 역사는 1866(병인, 고종 3)년 9월의 평양 양란(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Robert J. Thomas, 1840~66) 목사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지난 150년간 토마스 사건은 몇 번의 계기를 통해 재구성되면서, 신학교 교회사 교수 중심의 ‘선교사--순교설’과 일반대 한국사 교수 중심의 ‘제국주의자--처형설’이 대립하는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해방 이전에는 토마스의 죽음을 무모한 선교로 비판하다가 순교로 기념하는 쪽으로 바뀌었고, 해방 이후에는 찬양--비판--찬양이 교차하고 있다. 평양 교회사는 출발부터 논쟁사인 셈이다. 이 글은 자료 문제를 거론한 후, 지면 관계로 100주년이던 1966년..
이용민, 해방 이전 평양의 기독교 교세 이용민, "해방 이전 평양의 기독교 교세," 2019년 1월 해방 이전 평양의 기독교 교세 평양의 개념 평양이 기독교와 관련된 최초의 일은 1866년 9월 토마스가 상선을 타고 대동강을 통해 평양으로 들어오고자 하면서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들 수 있다. 그 후 1880년대 『예수성교전서』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한글 번역의 쪽복음이 평양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평양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890년대 초반 이곳에 장로회와 감리회가 각각 선교지부를 개설하기 위해 전담 선교사를 임명하면서부터였다. 해방 이전 평양의 기독교 교세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평양의 공간적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당시 평양에는 1413년에 정비된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