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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료, 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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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제중원의 시작, 1898년 "1897년 성탄절에 대구에 도착한 존슨(Woodbridge Odlin Johnson 張仁車, 1869~1951) 의사는 이듬해 의료 도구와 약품이 도착하자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1899년 남산 언덕인 동산동에 선교부지를 마련하고 ‘미국 약방’을 개설했으며, 12월 남성로 교회당 터 한옥에 ‘제중원’을 개설했다. 서자명이 조수겸 통역으로 도왔다." (옥성득, [근간])에서.)
안동 성소병원(베이커기념병원), 1916, 1958 "1909년 플레처(A. G. Fletcher) 의사가 안동 선교지부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1910년 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존슨 의사 대신 대구 제중원을 맡았다. 1911년 3월 안동에 온 플레처는 큰 기와집을 개량하여 진료소로 개원하여 많은 환자를 진료했으나, 9월에 대구에 임명되었다. 그 후임은 스미스(Roy Kenneth. Smith) 의사로 1911년에 내한하여 세브란스에서 인턴 과정을 밟은 후 1912년 10월 안동으로 내려와 1919년 11월까지 7년간 근무했다. 이때 그는 뉴욕의 쇼플러 부인(Mrs. A. F. Schauffler)이 기부한 10,000달러로 1914년 지하실을 갖춘 3층 벽돌 건물 30x70자, 20개 병상의 베이커기념병원(Cornelius Baker Memor..
1894년 드루 의사에게 보낸 전주 채영칠의 편지와 드루 의사가 사용한 수술 도구 1894년 3월에 내한한 드루( Alexandro Damer Drew 柳大模, 1859~1926, 위 글에서는 유 의사 대인) 의사는 레이놀즈(위 편지에서는 니 교사대인)과 함께 1894년 전라도 지역을 6주간 선교 탐사 여행을 했다. 드루는 전주에서 천주교인(전주부 죄인) 채영칠을 치료해 주었는데, 그 감사 편지가 위의 글이다. 선교잡지에는 편지 원본 사진을 실었는데, 읽기 편하게 타이핑했다. 개신교 의료 선교사가 전주에서 진료한 첫 증거이다. 현대어로 고치는 것은 숙제이니 한번 해 보세요. 한국 활동 1894~1901. 柳Drew + 大模Damer 음역으로 만든 한국 여권(執照)용 이름. 1859년 영국 채널제도(Channel Islands)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모님이 미국 버지니아주로 이민을 ..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학교 설립일은 1906년 10월 1일 (2008)에 이어 올해 연세대 박물관의 에비슨 전시회에서 1906년 9월 29일을 설립일로 서술하고 있으나, 10월 1일이다. 양성학교(양성소)를 기획, 조직한 것은 9월 29일, 학생을 받아 개교한 것는 10월 1일이다. 사소한 문제이지만 바로잡아야 한다.
홀 의사의 Christmas Seal과 엽서, 1932-40 한국의 어린이와 어머니를 위해 아기 예수 오셨네! 1. 크리스마스 씨일, 1932-1940년 해주구세(결핵)요양원 원장 홀(Sherwood Hall)이 1932부터 일제에 의해 추방당한 1940년까지 해주구세요양원 결핵 환자 치료를 위해 모금하기 위해 고안하고 발행한 크리스마스 씰(Christmas seal)이다. 영국에서 1904년에 시작된 성탄절 씰 운동은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에서 홀 의사는 한국인의 문화와 고유미, 전통 풍습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한국화로 실을 만들어 일제 말 암울한 시기에 한국인의 자긍심을 높이고 의료 선교에 도움을 주었다. 2. 크리스마스 엽서, 1933-1937년 80년전 조선결핵박멸운동회. 해주결핵요양원 홀 의사가 만든 크리스마스 실 엽서 4종, 1933..
한국의 첫 공식 간호원 히스코트, 웹스터, 로이스 내한, 1891-92년 개화기 최고의 간호 수준을 자랑한 서울의 영국성공회 병원 1895년부터 내외 풍습을 깨고 남자환자 간호를 시작한 웹스터와 로이스, 6~7년간 봉사 후 죽어 양화진에 묻히다 서울 성마태병원 수술실의 로이스와 웹스터 간호원, 1898년 한국 초기 간호 역사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두 가지는, 첫 공식 간호원들은 영국 성공회가 파송한 세 간호원이었으며, 1906년까지 서울에서 최고 수준의 간호는 영국 성공회의 서울 낙동(현재 덕수궁 옆 영국대사관 앞) 성마태병원(남자병원)과 정동의 성베드로병원(여자병원)에서 시행되었다는 사실이다. 1890년에 시작된 영국성공회 한국선교회는 거의 평생 서원한 독신자로 이루어졌는데, 대다수 여자 선교사는 초대 주교 코르프의 요청으로 성베드로수녀회가 파송했다. 성베드로수녀회는 첫..
한센씨병(나병) 선교의 현재적 의미 [leprosy mission 나병선교] 일제 시대 개신교는 부산, 대구, 광주-순천에서 나환자들을 수용하여 치료하고 간호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약 2만 명의 한센씨병환자들이 존재했다. 일제의 소록도 수용소가 1916년에 정식 개원하기 전부터 개신교 의료 선교는 몸 + 영혼의 전인 구원의 모델로 나병 선교를 전개했다. 1916년은 또 chaulmoogra oil(대풍자유)이 나병 약으로 개발되어 치료에 큰 효과를 보기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한국학계에는 소록도 수용소를 미셜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관점에서 연구한 책과 논문들이 많다. 현대 사회가 온라인 정보를 통해 '감시와 통제'하는 사회가 되었기에 푸코의 개념은 쉽게 다가온다. 그러나 1910-60년대 한국개신교의 나병 선교는 오늘날 신학의 한 ..
David Seel, <내 아버지는 내 고통을 아실까?>, 1971 David John Seel, Does My Father Know I'm Hurt?, 1971. 1954년부터 1990년까지 36년간 전주 예수병원에서 봉사하며, 입 안에 생긴 구강암을 치료하는 코만도 수술법을 전수한 실 의사. 암 치료 전문의 Seel(설대위) 의사. 그 아내로부터 오래 전에 몇 권의 책을 받았다. 그 중에 한 책이다. 이 짧은 책, 마지막 장에서는 리차드 김의 가 던진 질문(책 제목)을 다룬다. 환자가 암과 죽음과 싸우듯이, 의사도 환자의 고통과 죽음을 어떻게 다루고 수용할지... 나와 우리 주변에는 암 환자가 많다. 혹 이 책이 도움이 될까? 한글 번역본이 있을 것이다. 50년 전 책이니 보탤 것이 많겠지만, 근본적인 질문은 그대로 있다. 개인의 고통, 민족의 고난을 보면서 실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