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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료, 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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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제중원, 1905-1920 남장로회는 1904년 성탄절 전남 광주 양림동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교회, 남녀 학교, 병원(제중원 -->기독병원), 나환자병원, 성경학교 등을 설립해 나갔다. 현재 교회와 학교는 일부 건물들이 남아 있지만, 제중원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1885년에 설립된 서울의 제중원은 1894년 선교병원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평양을 비롯한 여러 장로회 선교지부에 병원을 설립할 때 그 이름을 제중원이라고 했는데 그 뜻은 선교병원이었다. 고유명사가 일반명사로 변해서, 평양 제중원, 전주 제중원, 광주 제중원 등으로 불렸다가 예수병원, 기독병원으로 개칭하게 된다. 최근에 광주 제중원 터를 확인하고 기념석을 세웠다. 아래 지도에서 중앙에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아래 지도에서 14번이 광주기독병원이며, 첫 제중원 터..
한국에 처음 설치된 일본 적십자사 병원, 제물포, 1894년 러일전쟁 기간에 한국에 설치된 일본 적십자가 병원 사진은 흔하지만, 1894년 청일전쟁 때 이미 일본군은 적십자사병원을 제물포와 부산에 설립했다. 1895년 콜레라가 유행하자 개항장의 방역 위생권도 조선 정부로부터 받아 자체 검역을 실시했다. 조선 정부는 아직 검역 인력이나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1894년 7월 10일 외부대신 김윤식이 일본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杉村濬)에게 의주 지역 검역 실시를 부탁했다. 개항장의 검역과 격리가 한 국가의 주권을 상징한다면, 조선은 중국이 통제하던 개항장의 관세 업무를 넘겨받아 검역권을 행사하게 되었지만, 청일전쟁 이후 실제적으로 일본이 개항장 검역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부산, 제물포, 원산, 의주, 평양 등지에 일본 영사관 소속 의사나 공사관 파견을 받은 ..
20세기 초 아시아의 에피데믹 1907-1917년 아시아에서 역병으로 최소한 1,000만 명이 사망했다. 1910-11년 만주 흑사병으로 60,000명이 사망한 것은 두 번째 규모였으나 치사율은 100%였다. 그만큼 110년 전 아시아인들은 역병으로 스러져갔다. 다만 일본의 경우와 실론, 싱가포르, 사이암 등에서는 선진 의학으로 피해를 최소화 하고 있었다. 의료 과학이 국력과 문명의 상징이었다. 이런 전염병이 지난 100년 간 유행하지 않아서 현재 지구인들이 망각해 버렸지만,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무시무시한 에피데믹과 팬데믹이 아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인구를 조절하거나 감소시켰음을 알 수 있다. (18-19세기에는 천연두가 #1 killer였다.) 중국인 의사 오연덕은 1910-11년 만주 흑사병과 1921년 만주, 산동..
그런 행동을 하게 하는 책이라면 읽어주시오, 1929 최근 어떤 잡지에 프랑스 전쟁에서 발생된 사실이 기재되었는데, 그 사실이야말로 간호 사업으로서 기독교 사업을 하는 기회에 대한 모범적 예와 같이 생각된다. 그 전장에서 어떤 육해군 목사가 부상을 당하여 지면에 드러누운 부상병을 보고, “성경인 이 책으로부터 무엇을 좀 읽어드릴까요?”하고 물었다. 그 때에 부상병은 “내가 심히 목이 마르니 성경보다도 물을 좀 갖다 줄 수 없느냐?”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그 목사는 할 수 있는대로 물을 얻어다가 주었다. 그런즉 부상병은 “내 머리 밑에 무엇을 좀 베어줄 수 없느냐?”고 또 다시 청하였다. 그 목사는 자기가 입었던 외투를 벗어서 그것을 뭉쳐서 베개로 삼아 그 부상병 머리 밑에 가만히 베어주었다. 그 부상병은 또 다시 “내가 심히 추우니 내 몸 위에 무엇을 좀..
1933 의사 사무실 1933년 세브란스 병원 의사의 사무실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의 책상 위에는 무엇이 있었고, 벽에는 어떤 사진을 걸었을까? 사진 두 개(기부자 세브란스 + 40년을 헌신한 에비슨 의사), 그림 하나(병자와 대화하는 예수), 이 세 개가 세브란스의 정신이다. 90년 전 책상 위에는 필기구와 도장, 스탬프가 놓여 있다. 의사로서 진료하다가 사무실에서는 의료 행정 일을 처리해야 하므로 이런 도구들이 필요했다. 전화기는 다른 데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집무실의 분위기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근대 병원의 한 모습이다. 책상 위에 도구들이 핸드폰 안으로 들어가는 데 90년, 짧은 세월이 걸렸다.
간호원의 기도, 1911 한국 간호부들이 늘어나고, 만주에서 신종 폐렴 페스트로 수 만 명이 사망한 1911년에 번역, 이후 계속 사용된 간호원의 기도 오, 주 나의 하느님이시여 나는 내 신혼을 다 주께 바치나이다. 주를 위하여 이 일을 맡음이여 다만 주의 크신 이름을 받드나이다. 주의 마음 속의 뜨거운 동정을 배울 것임이여 모든 병마의 침해를 받고 고통하는 자에게 수종들리로다. 그런즉 나의 두 눈을 교련하여 주심으로 각 병자를 안위함에 가장 능한 방법을 알게 하시옵소서. 나의 두 손을 지도하여 주심으로 접촉될 때에 사랑에서 나오는 온순함과 영리함을 증명케 하시옵소서. 내 두 발에 힘을 주사 가만가만 걸어다닐 때에 여러 병자의 침상 위에 웃는 얼굴이 많게 하시옵소서. 나의 입술을 만지시며 나의 혀를 인도하여주심으로 각사람에게 대..
한국 간호사를 위한 첫 나이팅게일 선서, 1911
첫 한국인 졸업간호원 김마르다, 1908 한국 간호계의 겨자씨이며 여성운동의 선구자 김마르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 제1회 졸업생 ◇전통적 구습의 성벽 부수고 사회로 나오다 김마르다(金瑪多) 부인은 보구여관에서 일하기 전에 서울에 살았는데, 의처증이 있고 질투심이 많은 남편이 집밖으로 나가거나 외간 남자를 만나지 못하도록 오른손 손가락들과 콧등을 절단해서 불구가 되었다. 고대의 다섯 가지 형벌인 묵형(얼굴에 먹칠), 의형(劓刑: 코베기), 월형 (刖刑: 손베기), 궁형(거세), 대벽(사형) 가운데, 코를 베는 의형과 손을 베는 월형을 직접 가한 것이다. 더욱이 남편은 두 아이를 데리고 몰래 사라졌다. 19세기 말 남녀 불평등이나 가정폭력이 그 정도로 심했다. 그녀는 집 안에 숨어 살아야 했고 아이들을 보지 못해 눈물로 지냈다. 장애자라 하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