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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료, 간호

20세기 초 아시아의 에피데믹

1907-1917년 아시아에서 역병으로 최소한 1,000만 명이 사망했다. 1910-11년 만주 흑사병으로 60,000명이 사망한 것은 두 번째 규모였으나 치사율은 100%였다. 그만큼 110년 전 아시아인들은 역병으로 스러져갔다. 다만 일본의 경우와 실론, 싱가포르, 사이암 등에서는 선진 의학으로 피해를 최소화 하고 있었다. 의료 과학이 국력과 문명의 상징이었다.

이런 전염병이 지난 100년 간 유행하지 않아서 현재 지구인들이 망각해 버렸지만,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무시무시한 에피데믹과 팬데믹이 아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인구를 조절하거나 감소시켰음을 알 수 있다.  (18-19세기에는 천연두가 #1 killer였다.)

Wu Lein Teh, “Plague in the Orient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Manchurian Outbreak,” National Medical Journal of China (Dec. 1921): 179-181. 표 1에 표2의 만주 통계를 필자가 편집해서 더한 것이다. 

중국인 의사 오연덕은 1910-11년 만주 흑사병과 1921년 만주, 산동 흑사병의 책임 의사였다. 그는 역병이 아시아 역병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1896-1921년에 발생한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의 전염병을 연구하고 분석했다. 1921년 12월호 National Medical Journal of China에 실은 논문에서 그는 1910-11년에 대비하지 못해 치료제나 백신이 없어 60,000명 발병에 전원이 사망하였지만, 1921년에는 마르모트 매개라는 중간 숙주도 알고, 백신이나 방역책이 있었으므로, 저신이 책임을 맡은 1921년에는 9,000명만 사망했다고 밝혔다.  

1921년 오연덕은 공기 전염의 폐 페스트(지금의 코로나-19과 유사)를 예방하는 것은 마스크 착용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의학과 과학의 발전에 힘 입어 아시아 에피데믹도 점차 방역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100년 전 일이다. 

위의 통계를 보면 1907년  인도의 역병은 거의 3억 2,000만명이 감염되어, 1,000만 명이 사망했다. 일본에서도 그 해에 5000만 명이 감염되었으나 1,380명 만 죽었다. 그만큼 일본의 준비와 방역, 의학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의 의학 문명론이 한일합방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무서운 전염병 앞에서 일제의 통제에 순응하고 선진 의학을 수용했다.  

다만 개신교 의료 선교와 손 잡은 기독교 민족주의가 1911-1919년 서북 지역과 여러 선교지부 도시들에 살아 있었다. 그것이 1919년 삼일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폭발할 수 있었다. 

한의와 민족주의와의 연결성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