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역/평양과 기독교

(18)
1938 오문환은 왜? [알 수 없는 일]1. 1923년부터 1936년까지 토마스 목사 순교자 만들기에 앞장선 오문환은, 왜, 1938년부터 신사참배와 친일 행위에 앞장섰을까?​2. 왜 한국의 보수적 신학자와 교회사가들은 토마스 목사에 대한 오문환의 논리나 해석을 그대로 따를까? 왜 오문환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침묵할까?1923년 『조선기독교사의 분수령인 평양양란(平壤洋亂)』을 저술한 오문환은 약관의 나이에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1번에 대한 짐작1903년생인 오문환은 1923년 20세로 숭실대 학생이었다. 졸업과 함께 숭의여학교 교사가 되면서 토마스 연구서인 『조선기독교사의 분수령인 평양양란(平壤洋亂)』 저술로 일약 교계 유명 인물이 되었다. 젊었을 때 너무 일찍 떴다. 이후 1938년이면 그의 나이 35세. 평양기독교..
왜 세대 갈등이 일어나는가: 1917 이광수 <무정>에 나오는 김장로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왜 구세대는 무식하고 신세대와 충돌하는가? ​ 1917년 봄 에 연재되고 있던 이광수의 『無情』을 보면 평양 감사를 지낸 아버지를 두어 미국 공사와 국장까지 지낸 서울 교동의 양반 부자 김광현 장로가 나온다. 1917년이면 일본 유학을 다녀온 한국인이 2,000명을 넘을 때였다. 일본 서적이 들어오고 각종 신사상이 유입되고 있었다. 1차세계대전이 마무리되면서 세대주의 종말론도 유행하고,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은 물론, 곧 일어난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도 유입된다. 한국에서 이광수로 대표되는 신지식인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1880-90년대 개화기 초기에 김옥균으로 대변되는 신세대와 구세대의 (한문 세대 간의) 제1차 세대 갈등이 있었다면, 1910년대 후반은 이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