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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평양과 기독교

왜 세대 갈등이 일어나는가: 1917 이광수 <무정>에 나오는 김장로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왜 구세대는 무식하고 신세대와 충돌하는가?

1917년 봄 <매일신보>에 연재되고 있던 이광수의 『無情』을 보면 평양 감사를 지낸 아버지를 두어 미국 공사와 국장까지 지낸 서울 교동의 양반 부자 김광현 장로가 나온다. 1917년이면 일본 유학을 다녀온 한국인이 2,000명을 넘을 때였다. 일본 서적이 들어오고 각종 신사상이 유입되고 있었다. 1차세계대전이 마무리되면서 세대주의 종말론도 유행하고,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은 물론, 곧 일어난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도 유입된다. 한국에서 이광수로 대표되는 신지식인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1880-90년대 개화기 초기에 김옥균으로 대변되는 신세대와 구세대의 (한문 세대 간의) 제1차 세대 갈등이 있었다면, 1910년대 후반은 이광수로 대변되는 (일본어를 익히고 일본어 서적을 읽은) 신세대와 한문과 국한문만 읽은 구세대 간의 제2차 세대 갈등이 있었다. 『無情』 (1917)은 일본 유학과 미국 유학을 배경으로 한 종교론, 문명론 소설이다. 동시에 세대 간의 갈등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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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구세대는 무식한가?

김 장로에 대해 소설의 화자(이광수)는 선교사의 입을 빌어, 김 장로가 비록 서양식 풍속을 따르고 침대에서 자고 양복을 입고 예수교를 믿지만, 서양 흉내만 낼 뿐 “과학, 철학, 종교, 예술, 경제, 산업, 사회 제도 등을 총칭하는” 문명, 곧 서양의 신문명을 모른다고 간주한다. [물론 선교사의 오리엔탈리즘과 화자의 일본 문명에 대한 우월감이 자리 잡고 있지만, 소설 화자의 구세대에 대한 비판에는 일리가 있다.] 김 장로에 대해 화자는 매섭게 비판한다. 김 장로는

 

다만 허명심으로 서양을 슝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서양이 우리보다 우승함과 따라서 우리도 불가불 서양을 본받아야 할 줄을 믿음(깨달음이 아니오)이니 무식하여 그러는 것을 우리는 책망할 수가 없는 것이라. 그는 과연 무식하다.

 

연구하여 깨달아 아는 대신, 서양 문명이 우월하다고 믿고, 우리도 서양 문명을 본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맹목적 믿음 혹은 무식한 믿음(=반지성주의)이라고 한다. 믿음이 신앙에서 작동할 때는 귀하지만, 세상과 과학과 문명을 볼 때는 盲目이 될 수 있다.

수십 년을 책을 보고 연구하여 깨달아도 특별히 재주 있고 부지런하고 눈이 밝은 사람이라야 처음 보는 남의 문명을 전반적으로 깨달을 수 있을까 말까 하거든, 김 장로가 아무리 천질이 명민한다고 해도, 눈으로 쓸쩍 보아 가지고 서양문명을 알 수 있을까?

 

책 한 권 아니 보고 무슨 재조가 복잡한 신문명의 참 뜻을 깨달으리오.

 

오늘의 문명은 근대 후기 문명이다. 지금 한국교회 구세대 목사는 70-80년대 근대주의와 성장주의에서 자랐다. 그들은 후기근대 문명 전반을 공부하고 깨달은 적이 없다. 그래서 신세대로부터 무식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들이 대학과 신학교를 나오고 공부를 했지만, 20-30년간 목회하면서 변해 버린 세상 학문을 공부해 본 적이 없다. 21세기 신문명에 대한 책들을 제대로 읽고 공부한 적이 없다. 눈으로 슬쩍슬쩍 본 독서로는 포스트모더니즘, 세계화, 탈식민주의, 다문화주의, 신자유주의, 종교다원주의, 탈종교현상, 페미니즘, '4차 산업혁명' 등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깨달을 수 없다. 그래서 이슬람이나 동성애에 대한 SNS에 떠도는 선동적 구호나 가짜 뉴스에 쉽게 속히고 넘어간다. 자기도 모르게 '단순 무식한 목사'가 된다.

 

2. 왜 낡은 세대는 새 세대와 충돌하는가?

신세대는 학교와 독서와 여러 매체 곧 문화 전체를 통해서 신문명을 체계적, 체험적으로 배운다. 신문명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없는 구세대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신세대를 통제하고 새 사상을 이단시하고 박멸하려고 한다. 그런 교조적 '믿음'이 문제이다.

오직 한 가지 위험한 것이 있다. 그것은 김 장로 같은 이가 자기의 지식을 너무 믿어 학교에서 배워 신문명을 깨달아 알게 되는 자녀의 사상을 간섭함이다. 자기가 일찍 생각하지 않던 바를 자녀들이 생각하면 이는 무슨 이단(異端) 같이 여겨서 기어이 박멸하려고 애를 쓴다. 이리하여 소위 신구 사상의 충돌이라는 신문명이 들어 올 때에 의례히 있는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지 못하던 바를 생각함은 낡은 사람이 보기에 이단 같지만 기실은 낡은 사람들이 모르던 새 진리를 안 것이라. 아들은 매양 아버지보다 더 나아야 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진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신구 사상의 충돌은 1차적으로 낡은 세대의 굳은 사고, 공부하지 않고 무식한 반지성주의에 그 원인이 있다. 동시에 부모 세대와 다른 새로운 사상을 이해하고 소화하여 변화된 세상에 적절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아들과 딸에게도 2차적 책임이 있다. 한국 교회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새 세대에게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1920년대처럼 딱딱한 근본주의에 매몰되거나 매마른 기구주의(종교제도화)에 빠져서, 1930년대 우상숭배(신사참배)에 굴복한 역사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옥성득 201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