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의 개념
평양이 기독교와 관련된 최초의 일은 1866년 9월 토마스가 상선을 타고 대동강을 통해 평양으로 들어오고자 하면서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들 수 있다. 그 후 1880년대 『예수성교전서』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한글 번역의 쪽복음이 평양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평양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890년대 초반 이곳에 장로회와 감리회가 각각 선교지부를 개설하기 위해 전담 선교사를 임명하면서부터였다. 해방 이전 평양의 기독교 교세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평양의 공간적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당시 평양에는 1413년에 정비된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유교적 의미를 담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활용했던 평양부의 구역은 평양성 안팎으로 인흥부, 북서부 지역으로는 의흥부, 동쪽 지역으로는 예안부, 북쪽 지역으로는 지안부로 구획되어 있었다. 각 부에는 각각의 방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들이 지금도 면 단위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곳이 많다. 1896년 전국이 13개 도로 개편될 때에도 평양의 부방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평양의 행정구역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부방체계가 없어지면서 방이 면으로 바뀌었고, 그 밑에 리와 동을 두어 명칭이 세분화되었다. 그 결과 1913년 평양부는 26개 면, 359개 동으로 나뉘었으며, 그중 외천면, 융흥면, 대흥면, 융덕면의 4개 면과 그에 해당하는 51개 동과 정으로 평양을 한정하였다. 그 나머지 동들은 대동군에 편입시켰다. 이는 평양성과 그 주변을 중심으로 평양의 개념을 좁힌 것이다.
이후 1928년 3월 대동군 용산면의 강창리, 서천면의 인흥리, 고평리, 서성리, 평천리, 대동강면의 선교리, 동대원면의 능라리, 신리 등이 편입되고, 동이 리로 바뀌면서 평양은 59개의 리와 정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1943년에는 대동강면의 불당리, 장진리, 오야리, 율리, 정백리, 석암리, 토성리, 조왕리, 문수리, 의암리, 오촌리, 용산면의 봉수리, 대타령리, 서천면의 내리, 상흥리, 임원면의 미산리, 감흥리, 청암리, 용흥리 등이 편입되면서 81개의 리와 정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여기에서는 1943년에 최종 확정된 81개 리와 정으로 구성된 평양을 평양의 기독교 교세를 살펴보기 위한 평양의 개념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상수리, 설암리, 창전리, 경상리, 경제리, 신창리, 기림리, 박구리, 오청리, 유도리, 진향리, 조왕리, 순영리, 이향리, 대찰리, 하수구리, 장벌리, 계리, 관후리, 상수구리, 신양리, 경창리, 죽전리, 염점리, 이문리, 채관리, 평원리, 서성리, 당상리, 인흥리, 능라리, 동대원리, 신리, 선교리, 양각리, 구정리, 선내리, 봉수리, 대타령리, 내리, 상흥리, 감흥리, 용흥리, 미산리, 청암리, 감촌리, 의암리, 문수리, 율리, 외신리, 불당리, 장진리, 오촌리, 정백리, 석암리, 토성리, 옥수정, 항정, 수정, 남문정, 대화정, 욱정, 천정, 산수정, 남산정, 팔천대정, 행정, 남정, 동정, 죽원정, 교구정, 흥매정, 약송정, 서정, 황금정, 암정, 유정, 빈정, 진정, 본정, 앵정
미국북장로회는 서북부 지역인 신양리와 경창리 일대에 15만 평의 광범위한 선교지부를 조성하였으며, 미국북감리회는 그 아래쪽에 위치한 대찰리, 순영리, 남산정에 이르는 지역에 넓은 선교지부를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각각 장대현교회와 남산현교회를 비롯한 대표적인 모교회를 포함하여 중등 과정의 남녀학교, 병원 및 기타 여러 기관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따라서 나머지 교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관들은 이 지역에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간단하게 평양의 교회들이 있었던 곳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943년 당시 평양의 장로교 교회교회명 | 주소 |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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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교회(西城敎會) | 평양부 서성리 14 | 1924년 1월 1일 | 신암교회(新巖敎會) | 평양부 신양리 176의 10 | 1913년 4월 | 신현교회(新峴敎會) | 평양부 장벌리 48 | 1934년 5월 22일 | 창동교회(倉洞敎會) | 평양부 창전리 214 | 1905년 1월 22일 |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 | 평양부 계리 55 | 1906년 1월 7일 | 도마스기념교회(도마스記念敎會) | 평양부 조왕리 101 | 1932년 3월 1일 | 동평양교회(東平壤敎會) | 평양부 선교리 | 1923년 1월 | 대타령교회(大駝領敎會) | 평양부 대타령리 산 40의 2 | 1912년 4월 1일 | 평강교회(平康敎會) | 평양부 서성리 127 | 1926년 1월 15일 | 동대원교회(東大院敎會) | 평양부 동대원리 436의 2 | 1898년 5월 29일 | 하선교리교회(下船橋里敎會) | 평양부 하선교리 103 | 1935년 4월 2일 | 오촌리교회(鰲村里敎會) | 평양부 오촌리 440 | 1904년 1월 5일 | 정오교회(貞梧敎會) | 평양부 오야리 162의 1 | 1930년 11월 11일 | 고정교회(高町敎會) | 평양부 기림리 56의 4 | 1934년 10월 25일 | 의암교회(衣岩敎會) | 평양부 의암리 | 1925년 6월 1일 | 창광산교회(蒼光山敎會) | 평양부 서성리 72 | 1932년 4월 10일 | 서신리교회(西新里敎會) | 평양부 신리 176의 6 | 1934년 5월 2일 | 미산리교회(嵋山里敎會) | 평양부 미산리 | 1922년 8월 10일 | 능라리교회(綾羅里敎會) | 평양부 능라리 | 1909년 | 기림교회(箕林敎會) | 평양부 기림리 | |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 평양부 관후리 | 1893년 | 남문외교회(南門外敎會) | 평양부 남문정 21 | 1903년 10월 31일 | 연화동교회(蓮花洞敎會) | 평양부 팔천대정 40 | 1911년 | 남신리교회(南新里敎會) | 평양부 남신리 56 | | 상수리교회(上需里敎會) | 평양부 상수리 12의 37 | | 명촌교회(明村敎會) | 평양부 평천리 104 | | 북신리교회(北新里敎會) | 평양부 신리 129 | | 서문외교회(西門外敎會) | 평양부 하수구리 109 | 1909년 3월 14일 | 경창문외교회(景昌門外敎會) | 평양부 기림리 141 | 1920년 | 인흥리교회(仁興里敎會) | 평양부 인흥리 132의 2 | | 내리교회(內里敎會) | 대동군 서천면 내리 | 1904년 | 상흥리교회(上興里敎會) | 대동군 서천면 상흥리 | | 가현리교회(加峴里敎會) | 대동군 임원면 용흥리 21의 37 | |
1943년 당시 평양의 감리교 교회교회명 | 주소 |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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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 | 평양부 수옥리 324 | 1893년 4월 | 중앙교회(中央敎會, 드류아펜젤러기념교회) | 평양부 죽전리 142 | | 박구리교회(礴九里敎會) | 평양부 박구리 20 | 1906년 | 신양리교회(新陽里敎會) | 평양부 남산정 43의 3 | 1911년 | 창광산교회(蒼光山敎會) | 평양부 서성리 85 | | 유정교회(柳町敎會) | 평양부 유정 72의 2 | 1912년 | 채관리교회(釵貫里敎會) | 평양부 채관리 86 | 1911년 | 선교리교회(船橋里敎會) | 평양부 선교리 78의 5 | 1896년 | 신리교회(新里敎會) | 평양부 신리 117의 4 | | 외신리교회(外新里敎會) | 평양부 신리 | | 사동교회(寺洞敎會) | 대동강면 의암리 산 28 | | 유신리교회(柳新里敎會) | 대동군 율리면 유신리 711 | 1935년 | 홍교동교회(紅橋洞敎會) | 대동군 율리면 유신리 | | 현교리교회(鉉橋里敎會) | 대동군 율리면 현교리 188 | | 칠산교회(七山敎會) | 대동군 율리면 칠산리 165 | 1899년 | 역포교회(力浦敎會) | 대동군 용연면 검포리 459의 3 | 1910년 | 삼정교회(三井敎會) | 대동군 용연면 향목리 186의 1 | | 사통교교회(四通橋敎會) | 대동군 율리면 현교리 508 | | 장진리교회(將進里敎會) | 평양부 장진리 124 | | 두로도교회(豆老島敎會) | 대동군 고평면 상단리 261 | 1920년 | 건지리교회(乾芝里敎會) | 대동군 시족면 건지리 424 | 1905년 | 명오동교회(明梧洞敎會) | 대동군 부산면 수산리 254 | | 석양교회(石陽敎會) | 중화군 양정면 고잔리 79 | | 검암교회(儉岩敎會) | 중화군 당정면 검암리 92 | | 송오교회(松塢敎會) | 중화군 당정면 양라리 468 | /td>
| 율동교회(栗洞敎會) | 중화군 중화면 진율리 196 | | 용흥교회(龍興敎會) | 중화군 신흥면 용흥리 316 | |
1943년 당시 평양의 성결교 교회교회명 | 주소 |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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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제일교회(平壤第一敎會, 평양상수리교회) | 평양부 상수리 127 | 1925년 8월 30일 | 평양제이교회(平壤第二敎會, 평양유정교회) | 평양부 유정 87 | 1931년 9월 5일 | 평양제삼교회(平壤第三敎會, 평양암정교회) | 평양부 암정 15의 1 | 1931년 11월 2일 | 선교리교회(船橋里敎會) | 평양부 선교리 238 | 1932년 6월 12일 |
평양의 교회
“평양에 몇 개의 교회가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그것이 어느 시점을 말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1943년 평양부 81개 리와 정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당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그리고 성결교회의 교회 숫자와 분포 지역을 대략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사용한 자료는 『조선예수교장로회연감』(경성: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사무소, 1940), 『평양노회지경각교회사기』(평양: 광문사, 1925), 『1938년도 재단법인 기독교조선감리회유지재단규칙급설명서』(경성: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1939),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제2회총회회의록』(경성: 동양선교회성결교회출판부, 1934) 등이다.
장로교회의 경우 평양노회와 평서노회 교회 주소를 확인한 결과 33개로 나타났으며, 감리교회의 경우 13개가 평양에 있었으나 나머지 15개 교회 역시 같은 평양구역에 있었기 때문에 참고로 밑줄을 그어놓았다. 성결교회의 경우 1925년에 평양에 진출하였으며 평양제일교회, 평양제이교회, 평양제삼교회를 설립하였는데, 1934년 평양상수리교회, 평양유정교회, 평양암정교회로 명칭이 바뀐 점이 특이하다. 순서는 자료에 나오는 순서이고, 창립 연대가 나오지 않는 곳은 따로 확인하였다.
평양의 학교
평양의 장로회와 감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사업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이를 발판으로 각종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감리회 선교사 홀은 평양 선교지부를 개척하면서 1894년 13명의 소년으로 서구식 학교인 광성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1915년 고등과를 설치하고 광성고등보통학교의 인가를 받았다. 1942년 사립 광성중학교는 10학급에 608명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다. 장로회에서는 1897년 선교사 베어드가 중학 과정의 남자학교인 숭실학당을 설립하였다. 이는 교인들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함이었는데 점차 고등한 수준의 교육이 필요해지면서 1905년 대학부를 병설하였으며, 이후 전국에서 유일한 대학 과정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이 과정은 당시 장로회와 감리회가 연합하여 운영하였는데 광성학교 출신의 학생들도 다수 입학하였다.
한편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평양의 기독교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교역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이 요청되는 상황에서 평양 선교지부 개척 선교사인 사무엘 모펫은 1901년 자신의 거처에서 두 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평양신학교를 개설하였다. 이후 1905년 독노회가 구성되고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면서 총회 직영 신학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북장로회, 미국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장로회 산하 각 노회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전국 단위의 학교라는 위상을 지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학교는 하수구리 100번지에 있었다. 반면 1923년 경창리에 설립된 장로회 여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기관으로 평양여자신학교가 있었다. 이곳에는 전국에서 추천받은 학생들이 입학하였다.
또한 감리회의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와 남산정의 요한성경학교 역시 교역자 후보생 및 평신도 지도자를 교육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는 1916년 수옥리에 설립된 감리회 신학교육기관으로 선교사 로빈스가 남산현교회 주일학교 교실에서 시작하였다. 1936년 4년 정규교육과정의 학교로 발전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일제 말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해방 후 남녀공학의 성화신학교로 이어졌다. 평양요한학교는 1931년 선교사 무어가 설립한 남자 성경학원으로 감리회 신학교육기관이었다. 1938년 3월 각종학교 인가를 받아 평양요한학교로 개칭하였다. 중등교육 2년 이상 수료자가 본과에 입학하여 3년 동안의 전문교육을 받는 학교였으나 1943년 폐교되었다.
당시 한국에 설립된 선교지부들은 중등과정의 남녀학교를 별도로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양에서도 감리회의 경우 선교사 노블 부인이 1896년 정의여학교를 설립하였고, 장로회에서는 선교사 모펫이 1903년 숭의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정의여학교는 1918년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 인가를 받았으며 1938년 정의고등여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1942년 당시 8학급에 460여 명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다. 숭의여학교는 1906년 9월 감리회의 정의여학교와 통합하였다가 1920년 5월 다시 분리되었다. 1931년 학력인정학교로 인가되었으나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로제타 셔우드 홀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맹아학교를 설립하였으며 한국 최초로 한글 점자를 만들었다. 또한 계암학교를 설립하여 최초로 농아교육을 실시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장로회에서도 독자적인 맹아학교를 운영하였다. 그 밖에 당시 한국에 주재하는 선교사나 외교관, 또는 사업가 등의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한 평양외국인학교가 있었다. 1900년에 시작된 이 학교는 미국 규정을 따르는 학교였기 때문에 졸업생들은 미국 고등학교로 바로 진학할 수 있었다.
평양의 병원 및 기타 기관
감리회 평양 선교지부 개척을 책임진 선교사 홀이 의료선교사였던 까닭에 평양에서는 처음부터 의료사업이 병행되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의료사업은 중단되었다. 그의 부인 로제타 홀이 평양에 기홀병원을 개원하면서 다시 본격적인 의료사업이 전개되었다. 그녀는 박에스더와 함께 여성전문병원인 광혜여원을 별립하는 한편 아이들을 치료하기 위한 에디스 마가렛 기념병동을 건립하였으며, 1908년 병원을 신축하여 사업을 확장하였다.
장로회에서는 1895년부터 웰즈에 의해 의료사업이 진행되었으며 1906년 래드기념병원(평양장로회병원, 제중병원)을 신축하였다. 1915년 제중병원 원장 웰즈가 사임하고 귀국하면서부터 미국북장로회 선교부에서 감리교 병원과의 합병이 논의되었고, 그해 정식으로 합병이 결정되어 추진되었다. 그 결과 제중병원은 1920년 기홀병원과 통합되었고 또 광혜여원(평양부인병원)과 통합하여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다.
평양YMCA는 조만식을 총무로 하여, 광성고등보통학교 교장 김득수를 초대 회장으로, 평양의 기독교계 인사들이 망라한 가운데 1921년 3월 남산현교회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천애인의 복음으로 경을 삼고 청년의 지덕체 삼육의 발달로 위를 삼아” 인도정의의 지상천국을 건설할 것을 앞세우며 민족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밖에 1935년 정지강 목사에 의해 설립된 사회사업기관인 평양애린원은 고아를 비롯한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감리회 기관이었다. 이처럼 오늘날 사회적 약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당시 장로회와 감리회가 각각 또는 연합으로 사회사업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기독교 세력이 서울에 비해 훨씬 더 크게 성장한 평양 장로회의 경우 서울의 예수성교서회를 통한 문서선교 사업에 한계를 느끼며 1904년 별도의 평양 예수교서원을 설립하여, 서북지역에서 많이 불렸던 『찬성시』를 비롯한 각종 선교문서를 제작하였다. 평양 예수교서원은 단순한 서점이나 출판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신민회와 연결되어 있는 민족운동의 거점이었으며, 3・1운동 당시 예수교서원에 근무한 안세환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전국적 규모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글을 마치며
얼마 전 북한 기독교와 관련된 회의석상에서 북한 교회들의 예전 주소를 오늘날의 주소로 바꾸는 작업을 통해 통일 이후 기존의 교회 자리를 찾아갈 네비게이션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유관지 목사의 언급을 인상 깊게 들었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평양의 교회와 학교, 병원 및 기타 기관에 대해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각 시대별로 평양의 교회가 어떻게 변천해왔는지에 주목하고자 하였으나, 정작 ‘평양’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개념을 규정하는 일에 더 몰두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사정도 겹치고 해서, 평양의 교회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원고를 마감하게 되었다. 이는 앞으로 발간될 『북한기독교사전』 등 관련 자료들의 편찬을 통해 보완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이용민 | 성결대학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교회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총무이사를 맡고 있으며, 만남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광성교회 56년사』, 『내 길의 한 줄기 빛: 성봉 이만영 장로 회고록』 등이 있다.
교회 결혼식,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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