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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평양과 기독교

1938 오문환은 왜?

[알 수 없는 일]

1. 1923년부터 1936년까지 토마스 목사 순교자 만들기에 앞장선 오문환은, 왜, 1938년부터 신사참배와 친일 행위에 앞장섰을까?

2. 왜 한국의 보수적 신학자와 교회사가들은 토마스 목사에 대한 오문환의 논리나 해석을 그대로 따를까? 왜 오문환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침묵할까?

1923년 『조선기독교사의 분수령인 평양양란(平壤洋亂)』을 저술한 오문환은 약관의 나이에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1번에 대한 짐작

1903년생인 오문환은 1923년 20세로 숭실대 학생이었다. 졸업과 함께 숭의여학교 교사가 되면서 토마스 연구서인 『조선기독교사의 분수령인 평양양란(平壤洋亂)』 저술로 일약 교계 유명 인물이 되었다. 젊었을 때 너무 일찍 떴다. 이후 1938년이면 그의 나이 35세. 평양기독교친목회 상임간사가 되어 평양 교계를 대표하는 친일 인사가 되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의 자리로 나아갔다.

1938년 12월 말 평양기독교친목회 상임간사 오문환은 교계 대표를 이끌고 중일전쟁 중인 일본군을 위문했다

오문환은 1938년 4월 평양기독교친목회를 조직, 회장이 되었다. 이 단체는 신사참배 지지와 선교사 배척을 주장한 친일 단체였다. 같은 해 12월 평양지역의 유력한 목사와 장로 등 12명을 인솔하여 북중국 지역의 일본군을 위문했다. 1939년에는 『비상시국과 기독교』를 저술했고, 1940년 6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기관지인 『총동원』에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회전」을 기고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기원 2600년 봉축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총무가 되었다. 1942년 1월 재단법인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이사, 4월에는 기독교신문협회의 이사가 되었다. 또한 6월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대표로 일본군에 자동차 2대를 헌납했다.

해방 후 경성일보의 초대 사장에 취임했고, 1946년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상임고문이 되고, 1948년에는 기독공보를 맡아 운영했으며, 1949년에는 한국일보를 인수했다. 1946년에는 숭문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1954년 서울 수복 후에는 광신상업고등학교를 재건했으며, 1958년 학교법인 계명의숙을 설립, 장안중학교와 남산고등학교를 재건했다. 해방 이후에도 전도 사업을 계속하여 1951년에 150t급의 제2복음선 토마스 호를 건조해 도서지방의 전도에 주력함으로써 그의 전도 사업으로 71개 처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주요 저서로 『사적탐방교회순례기』· 『윌리엄스박사전』 등 다수가 있다. 1962년 사망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243






빨리 가는 것보다 멀리 가는 게 중요하고
멀리 가는 것보다 바른 길로 가는 게 더 중요하다.
옥성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