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성득, "1866년 평양 양란(洋亂)과 토마스의 순교, 그 해석사," <기독교사상>, 2019년 1월
평양 기독교 역사는 1866(병인, 고종 3)년 9월의 평양 양란(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Robert J. Thomas, 1840~66) 목사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지난 150년간 토마스 사건은 몇 번의 계기를 통해 재구성되면서, 신학교 교회사 교수 중심의 ‘선교사--순교설’과 일반대 한국사 교수 중심의 ‘제국주의자--처형설’이 대립하는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해방 이전에는 토마스의 죽음을 무모한 선교로 비판하다가 순교로 기념하는 쪽으로 바뀌었고, 해방 이후에는 찬양--비판--찬양이 교차하고 있다. 평양 교회사는 출발부터 논쟁사인 셈이다. 이 글은 자료 문제를 거론한 후, 지면 관계로 100주년이던 1966년 이전까지의 해석사를 정리함으로써 토마스의 순교 문제를 성찰하려고 한다.
자료와 사관의 문제
토마스에 대한 해석이 양분된 첫 번째 이유는 자료 문제이다. 1866~75년에 조선 정부나 외국 선교회 등이 생산한 사료들이 존재하지만, 그 작성자들이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나아가 이를 정리하고 편찬한 시기가 1920년대 중후반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며, 편찬자들의 소속 집단의 입장을 탈문맥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첫째, 조선 정부 측 자료인 『高宗實錄』(李王職, 1935)은 1927년부터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쇼고(小田省吾)를 책임자로 한 편찬위원회가 작업했다. 일성록 등에 실린 원사료를 수록하고 있지만, 총독부의 내선일체라는 편집적 관점 때문에 정사로 인정되지 않는다. 평양 양란을 보면, 정부군의 반격과 양이의 처형을 정당화하는 봉건 조선 정부(와 식민 일본 정부)의 입장이 드러나고, 이양선을 격퇴하고 양이를 타살한 군민을 옹호하는 반서양 동아주의가 숨어 있다. 태평양전쟁기의 일본 군국주의 해석과 북한 역사서의 반미주의 사서는 이 노선을 따른다. 정부(조선-일제-북한) 측 자료에 의존하는 한국사 학자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관변 사관과 편협한 민족주의를 주의해야 한다.
둘째, 오문환(1903~1962)의 『朝鮮基督敎會史의 一分水嶺인 平壤洋亂』(평양 광명서관, 1926년)과 『도마스 牧師傳』(도마스牧師殉敎記念會, 1928)은 192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항하는 평양 기독교인들의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일부였다. (옥성득,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 『기독교사상』 (2018년 9월)을 참고하라.) 그가 수집한 목격자 구두 증언은 중요하지만, 사건 발생 60년이 지난 시점의 부정확한 기억들이 혼재되어 있다. 역사가로서 훈련을 받지 않은 20대 초반의 교사가 신앙심으로 정리한 토마스의 전기는 제도 교회의 영웅전으로, 학문적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 목격자들의 파편적인 기억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끼워 맞추기 위해 상상력에 의존했다. 오문환의 글을 인용하는 교회사가가 호교론적 순교사관을 경계하지 않으면,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 사학계나 일반 독자가 읽는 글을 쓰기 어렵다. 순교사관을 가졌던 오문환이 1938년부터 평양기독교친목회를 조직하여 신사참배와 친일에 앞장섰고, 해방 이후 서울에서 자신의 친일 행적을 덮기 위해 ‘순교’에 ‘반공’ 사관을 덧입혀 백령도 ‘선교’를 내세웠던 이유를 숙고해야 한다.
사료 비판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고 기존 문서의 오류를 교정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을 어떤 공동체가 어떤 삶의 자리에서 왜 그렇게 해석했는지를 밝히는 해석사의 정리가 중요하다. 사실과 함께 진실을 찾는 역사가의 재해석은, 사건 → 원 사료(기록자의 관점 + 상황 1) → 해석된 역사(해석자의 관점 + 상황 2)를 놓고, 두 관점과 두 상황에서 벗어난 제3의 관점을 찾기 위해 이중적 탈문맥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거나,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이 시각에서 필자는 재작년에 개인적 평가는 유보한 채 1910년대까지 토마스의 죽음에 대한 해석사를 정리해서 발표했다. 이후 여러 논저가 필자의 글을 오해하거나 비판하며 토론했다.
역사적 토마스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에서 태어난 토마스는 뉴칼리지를 졸업한 후, 1863년 6월 하노버 회중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 파송되었다. 12월 상하이에 도착한 후 4개월 만에 아내가 사망하는 슬픔과 선배 선교사들과의 갈등으로, 1864년 12월 선교회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지푸의 세관에 취직하여 독립 선교사가 되었다. 그곳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이후 NBSS] 총무 윌리엄슨은 황해를 건너온 천주교인 김자평과 최선일을 만난 후 1865년 9월 4일 토마스를 한국에 권서로 파송했다. 토마스는 김자평의 안내로 황해도 옹진군 창린도에 도착하여 몇 달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1866년 1월 베이징에 돌아와 조선 동지사를 만나 한국 사정을 탐지했으며, 런던선교회로부터 재임명을 받았다.
조선 선교 기회를 엿보던 토마스는 1866년 7월 NBSS 권서로 재임명받고, 평양행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통역인으로 동행했다. 조선 정부는 유화 정책에 따라 연안에 접근하는 이양선에게 물과 식량은 제공했으나 통상과 내륙 항해는 금지했다. 중무장한 이양선 대항법을 연구해 온 평양감사 박규수는 해방론(海防論) 입장에서 여러 차례 경고를 보내어 충돌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상선은 무역을 요구하며 평양행을 감행했다. 토마스는 강변의 여러 마을에서 한문 성경을 반포했다. 선박은 평양의 양각도까지 접근했고, 평양과 서울에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중군[정3품, 감영의 군사령관] 이현익이 승선하여 협상하던 중 인질로 잡혔으나, 장교 박춘권이 구출했다. 협상을 주도하던 박규수는 상선의 도발적 발포로 민간인이 죽자, 조정에 보고하고 공격을 명령했다. 박규수는 9월 2일(음력 7월 24일) 무기 열세를 제갈량의 적벽대전처럼 화공법으로 극복하고 셔먼호를 전소시켰다. 토마스 등 선원 24명은 군민이 함께 섬멸했다. 전리품인 포와 포탄, 바늘, 성경, 아편, 자기 등은 감영 창고에 보관했으나, 닻은 대동문에 걸어 도성 수호를 기념했다.
여러 자료를 종합한 『조선사』(총독부 조선사편수실, 1938)는 전투와 토마스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제너럴셔먼호가 양각도까지 올라와 총을 쏘며 상선의 양식을 약탈하고 주민 7명을 살해하고 5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에 박규수가 출두하여 종일 감독하는 가운데 중군 백낙연과 서윤 신태정이 지휘하여 화공 포격을 했다. 24일 군민이 함께 화공을 하고 포수와 사수를 동원하여 공격했다. 정오에 셔먼호에서 포와 총을 쏘아 주민 1명이 사망했다. 이를 본 모든 백성과 수비 군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는데, 여러 척의 배에 가득 실은 풀에 불을 붙여 떠내려 보내어 셔먼호가 불에 타게 되었다. 이에 토마스와 조능봉이 뱃전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살려 달라 구하니 바로 잡아서 결박했다. 군민들이 분을 이기고 못하고 일제히 타살하니, 나머지 선원은 화살에 맞아 죽거나 불에 타서 죽었다."
토마스는 결박된 채 군인과 주민에 의해 일요일에 타살되었다.
첫 50년의 해석사, 1866~1915년
부정적 평가: 조선 정부는 병인양요와 달리 내륙인 평양에 침략한 이양선을 격침하고 서양 오랑캐를 섬멸하자 안도했다. 박규수를 비롯한 공로자들에게 포상했다. 기자의 도성에 침략한 야만인의 격퇴를 노래했다. 프랑스의 로즈 제독 함대는 10월 초 프랑스 신부들이 살해된 병인박해와 제너럴셔먼호를 조사하기 위해 탐사한 후, 10월 말에 강화도를 점령하는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대원군은 한불전쟁에서 승리한 후 해안 봉쇄를 강화했다.
미국 언론은 1866년 11월 7일 『뉴욕 타임즈』가 제너럴셔먼호가 좌초되어 40명의 선원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병인양요는 더 자세히 보도하여, 미국 대중에게 한국의 존재를 알렸다. 12월부터 영미 언론은 내륙까지 들어간 상선의 책임을 거론했다. 미국 정부는 1871년 신미양요까지 무력 해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에는 통상 조약을 추진하여 1882년 한미조약을 체결했다. 그 주역은 슈펠트 제독이었다.
아펜젤러는 1887년 슈펠트로부터 받은 한미조약 관련 원고를, 10주년이던 1892년 Korean Repository에 소개하면서, 제너럴셔먼호의 평양행을 비판하고, 조약을 통해 은자의 나라 조선을 개방하고 서구 문명을 소개한 슈펠트를 콜럼버스에 비유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한미조약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로 조약이 체결되고 선교사들도 합법적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았다. 초기 선교사들은 19세기 중반의 군함(무력)이나 상선(무역)을 이용한 선교 방법론을 배척했다. 서구 제국주의 전성기(1880~1914)에 선교사들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평가하지 않았다. 1866년 런던선교회는 상처한 젊은 선교사가 무모한 여행으로 불필요한 죽음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윌리엄슨도 1867년 10월 고려문에 가서 수소문했으나, 방문기인 Journeys in North China(1870)에서 토마스의 권서 활동을 적극 설명하지 않았다. NBSS도 침묵했다. 로스의 History of Corea(1878)와 그리피스의 Corea, The Hermit Nation(1882)은 간단한 사건 묘사에 머물렀다.
1890년대 초 마페트가 평양 전도를 시작할 때, 주민들은 서양 오랑캐의 침략을 기억하고 서양 종교를 배척했다. 그는 토마스의 성경 반포를 평양의 첫 선교 활동으로 인정했으나 힘을 앞세운 불법적 방법을 비판했고, 양란이 없었더라면 복음의 문이 더 쉽게 열렸을 것으로 보았다. 청일전쟁 후 1895년 주민의 목격담을 Korean Repositoryd에 처음 소개한 게일은 토마스를 순교자로 표현하지 않았다. 결박되어 주민들에게 난자당한 것만 언급하고 성경 투척이나 기도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미륵불 석상이 외침으로부터 평양을 지켰다는 사공들의 미륵신앙을 소개했는데, 민간 불교 신앙과 기독교의 갈등 상황을 반영했다.
선교사들의 한국사 저술을 대표하는 헐버트의 History of Korea(1905)는 상선의 무모한 내륙 항해와 침략 행위를 비난했다. “이 문제의 양측을 편견 없이 공부한 학생이라면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배는 경고를 받았으나 모든 여건이 좋았더라고 해도 좌초할 수밖에 없는 항해를 무모하게 감행했다. 한국인들은 이것이 단순한 실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자연히 적대적인 배로 간주했고 그렇게 처리했다.”
긍정적 평가: 토마스의 죽음에 대한 첫 공식 긍정적 평가는 평양 부흥이 지나간 1909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북장로회 선교 25주년 기념식에서 이루어졌다. 마페트는 토마스가 NBSS 권서로 성경을 반포하다가 피살되었다고 소개하고, 학습교인 중에 그때 받은 성경을 몰래 보관해 온 자도 있다고 소개했다. 다만 성경 반포 결과로 개종의 열매가 맺혔다는 식으로 과장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마페트의 연설을 계기로 토마스 목사의 매장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소위원회가 임명되었다. 마페트는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할 때 글래스고우 소재 NBSS 본부를 방문하고 토마스기념교회 설립 후원을 부탁했다.
1911년 10월 총독암살음모사건(105인 사건)이 일어나 교인들이 투옥되자, 평양을 중심으로 1916년 토마스 50주기를 바라보면서 그의 죽음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1911년 9월 북장로회 한국선교회는 토마스기념특별위원회(위원 Moffett, F. S. Miller, McCune)를 임명했다. 마페트는 토마스를 기념하는 평양 제5장로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NBSS에 500파운드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공회가 재정 악화로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기념교회 설립은 포기되었고, 1915년 위원회도 해산되었다. 50주년은 큰 기념행사 없이 지나갔다.
다만 한국 선교지에서 은퇴하고 1911년부터 뉴욕 북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 편집 총무로 일하던 존스 목사가 1915년 보스턴대 신학대학원에서 한국교회사를 강의할 때 제너럴셔먼호사건과 병인박해를 연결해서 이해하고, 프랑스 선교사들과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순교로 정의했다. 강의록은 출판되지 않아 영향력은 없었다. 사실 1918년 클라크 목사가 편찬한 『長老敎會史典彙集』의 서술처럼 토마스의 권서 활동은 인정했으나, “該商民等이 不善 事이 잇셔 平壤城人이 交戰야 該船船夫等과 도마스氏가 不幸同死”했다고 하여, 불행한 죽음으로만 보고 순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50주년부터 100주년 이전까지 (1) 1916~1945년
국내에서 토마스를 순교자로 본 글들은 반기독교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난 1925년부터 등장했으며 1926년 60주년을 계기로 자리를 잡았다. 1926년 7월 말 안식교회 순안병원의 헤이스머 의사 사건은 반기독교-반미-반선교사 운동에 기름을 부어 지방에서도 선교사 규탄대회가 열렸다. 1927년 장대현교회에 노년파와 청년파 간의 분규가 발생해 길선주 목사가 사임했다. 이 상황에서 토마스기념사업으로 유명하게 된 20대의 오문환은 보수적인 마페트-길선주의 노년층과 노회-총회 측에 서서 친선교사-친미 노선을 옹호했다.
1926년 토마스 순교 60주년 기념: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서술한 첫 책은 1925년 7월 평양의 강규찬, 김선두, 변인서가 공저한『平壤老會地境 各敎會 史記』였다. 총론 첫머리에서 영국 선교사 토마스가 “監司의 습격을 당하여 대동강에서 殉敎하니 이는 예수교 신교도의 血이 我國江山에 始滴한 일”이라고 밝혔다. 아마도 1925년 7월 5일 로마의 성베드로성당에서 거행된 한국 천주교 순교자 시복식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신문기자로부터 평양 양란 60주년 기고를 요청받은 숭의여학교 영어 교사 오문환(1903~62)은 마페트 목사와 의논한 후, 토마스 활동과 최후에 대해 40명 이상의 노인들의 목격담을 수집·정리하고 연구하여 1926년 8월 『朝鮮基督敎會史의 一分水嶺인 平壤洋亂』을 발간했다. 서문에서 채필근 목사는 1925년 7월 경성교역자연합회 수련회에서 토마스 목사 치명 60주년을 기념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을 밝혔다. 오문환은 토마스의 “입국은 즉 신기독교 조선선교의 선봉자이다. 비록 장구히 조선에 체재하면셔 전도하지는 못하엿스나 씨의 지래한 한역성경은 다수히 전파되야 금일 사십만의 신도를 유한 조선신기독교회의 기초가 되엿다.”고 주장했다. (오문환, 『朝鮮基督敎會史의 一分水嶺인 平壤洋亂』(평양: 광명서관, 1926), 14~15.) 토마스가 장로교인으로서 순교했다고 잘못 서술했지만, 그의 옆구리에서 흐른 순교의 피는 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피와 같이 의로운 피였고, 그 피에서 수십 만 교인이 나왔으므로 한국 장로교회의 시조라고 강조했다. 오문환은 이 소책자를 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와 장로회신학교 강당에서 모인 개신교선교회공의회에서 발표했다. 이때 평양을 방문한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스피어가 오문환의 작업을 격려했다. 결국 1925~26년 평양에서 한국인 목회자들, 선교사들, 숭실 졸업생 등이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이해하는 합의가 이루어졌고, 조왕리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오문환이 그 작업을 주도하는 장본인이 되면서, 일약 유명 인물이 되었다.
한편 경성교역자연합회 148인의 발기로 1926년 11월 14일에 3대 기념식--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 대영성서공회 조선지부 설립 30주년, 밀러 총무 봉사 25주년--이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렸다. 서경조 목사는 토마스가 불타는 배에서 성경을 반포하며 순교하는 장면을 실감나게 연설했다. 성서공회 서기 최재학은 『기독신보』에 토마스 목사의 약력을 소개하고, 권서로서 최후까지 성경을 전하다가 선원들과 옥석구분 없이 창에 찔려 죽어 순교자가 되었다고 정리했다. 서울에서는 성서공회기념사업과 토마스순교기념사업을 이어준 연결고리인 성서 반포를 강조했다.
이어서 오문환이 12월에 평양 양란을 3회에 걸쳐 『기독신보』에 소개했다. 2회에서는 토마스 목사가 불타는 배에서 뛰어내린 후 붙잡혀 붉은 줄로 결박을 당한 채 친족을 잃은 주민들에 의해 칼에 찔러 죽었다고 묘사했다. 그런데 3회에서는 이재풍 목사의 사촌처남이 양란 당시 군인이었는데 선원들을 살해할 때 한 사람이 붉은 표지의 책을 받으라고 애걸했다고 증언한 사실을 새로 소개했다. 곧 최후의 순간에 군인에게 신약 성경을 주었으며, 그 붉은 표지의 신약전서가 토마스의 순교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오문환, “平壤洋亂閑話 (3),” 『기독신보』 , 1926년 12월 22일.) 오문환은 상충되는 증언들을 비판 없이 소개했다. 그러나 이재풍 목사의 증언을 듣고 주민이 아닌 군인을 처형자로 지목했고, 최후의 기도와 성경 전달 노력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평양 출신 李在豊 목사는 거창에서 목회한 후 통영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27년 3월 20일에 별세했다. 장남 永漢은 숭실전문 졸업 후 동경 유학 중이었고, 차남 永泰는 1926년 숭실전문 영문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銀峰, “故李在豊牧師 葬禮,” 『기독신보』 , 1927년 4월 20일.) 레이놀즈의 번역 조사가 된 이영태의 어머니(이재풍 목사의 처)가 토마스를 죽인 군인의 조카였다. 오문환의 이 글에서 처삼촌을 사촌처남으로 잘못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이재풍 목사는 이런 관계를 숨기고 있다가 60주년 때 오문환이 조사하자 알려주고 얼마 후 사망했다.)
60주년 기념식과 토마스 목사 순교 전말을 보도한 『동아일보』는 최후까지 전도에 정성을 바친 부분은 인정했으나, 기자릉 도굴로 일확천금을 꿈꾼 제너럴셔먼호의 상업적 동기와 선제공격을 비난했다. 조선일보는 침묵했고, 일부 잡지는 평양 양란을 일으킨 제너럴셔먼호의 침략행위를 비판했다.
토마스목사순교기념회의 활동: 1927년 5월 7일 숭실대 강당에서 토마스목사순교기념회(회장 마페트, 서기 오문환)가 창립되어 전기 발간, 기념교회 설립, 기념 전도사업을 추진했다. 5월 8일 주일에 토마스 목사가 묻힌 봉래도(쑥섬)에서 1,000 여 명의 교인이 모여 노천에서 순교 기념예배를 드렸는데, 민휴 총무의 연설, “토마스 목사 기념의 세 가지 큰 이유”라는 제목의 오문환의 연설, 그리고 토마스로부터 성경을 받은 노인의 증언이 있었다. 이 추도회에서 최후까지 성경을 전한 토마스 목사의 순교를 기렸다. 기념회는 6월에 그 취지서를 마포삼열, 김성택 외 48명의 이름으로 신문에 발표하고, 위의 세 사업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취지서는 오문환이 쓴 것으로 보이는데, 이듬해 나온 전기의 기초가 되었다. 취지서는 토마스의 생애와 조선 선교 활동과 최후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했다. 특히 토마스를 죽인 군인이 후회한 점과 받은 성경을 가족에게 전달한 점을 강조했다. 이때 기념예배당 건립을 위해 조왕리에 1,009평의 부지를 매입했다.
8월에 기념회는 순교기념비를 설립하기 위해 모금했다. 이 기사에서 보듯이 토마스를 미국인으로, 평양 양란을 병인양요의 일부로 인식하는 신문 기자의 시각이 존재했다. 그러나 1926년 11월의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일보도 ‘순교’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썼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 ‘순교’라는 단어와 담론이 1927년 5월에 조직된 토마스목사순교기념회로 인해 확산되었다. 1928년부터 일반 신문은 물론 천도교와 천주교까지 치명 대신 순교, 치명자 대신 순교자를 사용했다.
1927년 9월에는 선교사 해밀턴이 오문환의 글과 취지서를 바탕으로 “한국의 첫 개신교 순교자” 토마스를 영문으로 소개했다. 그는 오문환이 수용한 이재풍 목사의 말을 근거로 군인이 토마스를 죽였다고 서술했다. 나아가 그 군인의 여자 조카는 숭실대를 졸업(1926)하고 레이놀즈 선교사의 성경 번역 조사가 된 이영태의 모친이라고 밝혔다. (Floyd E. Hamilton,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 Korea Mission Field (Sept. 1927): 185. 군인의 조카가 이영태라고 잘못 쓴 Rhodes의 책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서술하는 글이 많다. 어떤 글은 이영태가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해밀턴의 글을 잘못 번역하고 있다. 이영태는 1926년 숭실대를 졸업하였으므로 당시 23세(1903년 생?)로 보면, 1980년 전후 70대 후반의 나이에 공동번역성서 평양교정본을 만들었다.) 오문환과 해밀턴의 글을 종합하면 [그림 1]과 같은 관계를 알 수 있다. 해밀턴의 글을 바탕으로 런던선교회는 소식지에 60년 전에 비판했던 토마스를 순교자로 소개하고 평양 교회 발전을 높이 평가했다. 1927년 9월 원산에서 모인 장로회 총회는 10월 30일을 토마스순교기념주일로 지키고 헌금하기로 결의했다. 차재명의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1927, 7쪽)도 선교사 토마스의 죽음을 “예수敎의 播種한 義血”로 칭했다.
[그림 1] 군인 전 씨와 이영태의 관계 ⓒ옥성득
그러나 예일대에서 박사논문을 쓰면서 존스의 원고를 읽은 백낙준은 귀국 후 서울에서 출판한 책(1929)에서 존스처럼 병인박해와 제너럴셔먼호사건을 연결시켰으나, 토마스를 순교자로 정의하지 않았다. 사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측에서는 1930년대까지 토마스의 죽음에 대해서 큰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자들은 평양 양란을 외국과의 경쟁에서 이긴 전투로 규정하고, 단순 통상 교섭을 넘어 평양까지 와서 중군을 욕보이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며 재산을 약탈하고 심지어 婦女子(부녀자)까지 凌辱(능욕)”했다고 비판했다. 1928년 「별건곤」의 한 기사는 양인들의 몰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냉정하게 묘사했다.
“주머니 속에 들은 窮鼠(궁서)와 가튼 洋人(양인)들은 그 凶暴(흉포) 頑慢(완만)하든 氣色(기색)이 다 어듸로 가고 船頭(선두)에 나서서 두 손을 싹싹 빌며 殘命(잔명)을 구하얏다. 그러나 그때가 어느 때라고 될 번이나 한 수작이냐. 彼等(피등) 일행은 속절업시 모다 朝鮮(조선)군에게 捕縛(포박)되야 亂刀之下(난도지하)에 大洞江口(대동강구)의 異域孤魂(이역고혼)이 되고 말엇다.”
다시 말해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세간에 ‘최난헌(토마스의 우리나라식 이름) 사건’이라고 불리며 외국인과 상관이 없는 사건처럼 여겨지지만, 미국과의 전쟁인 신미양요로 연결되었으므로, 기고자는 통상을 위한 내륙여행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선장이나 토마스는 교섭 실무자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반면 총독부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일하던 이능화는 한국인이 쓴 최초의 한국교회사인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1928)에서 조선 패망의 원인이 양반 사회와 유교에 있다고 보았으며, 신분차별과 지방차별을 철폐하고 사회를 개조하기 시작한 기독교의 공헌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22장 “병인 평양 양선사건”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9월 3일 화공선을 준비하여 셔먼 호 쪽으로 흘러내려가게 하니 곧 배가 화염에 휩싸이면서 연기와 불이 하늘에 닿았다. 외국인들이 뱃머리에 나와서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한국인들은 듣지 아니하고 그들을 육지로 끌고 와서 민중과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죽였다.” 곧 고종실록에 있는 내용을 대부분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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