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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평양과 기독교

1866년 평양 양란(洋亂)과 토마스의 순교, 그 해석사

옥성득, "1866년 평양 양란(洋亂)과 토마스의 순교, 그 해석사," <기독교사상>, 2019년 1월


평양 기독교 역사는 1866(병인, 고종 3)9월의 평양 양란(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Robert J. Thomas, 1840~66) 목사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지난 150년간 토마스 사건은 몇 번의 계기를 통해 재구성되면서, 신학교 교회사 교수 중심의 선교사--순교설과 일반대 한국사 교수 중심의 제국주의자--처형설이 대립하는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해방 이전에는 토마스의 죽음을 무모한 선교로 비판하다가 순교로 기념하는 쪽으로 바뀌었고, 해방 이후에는 찬양--비판--찬양이 교차하고 있다. 평양 교회사는 출발부터 논쟁사인 셈이다. 이 글은 자료 문제를 거론한 후, 지면 관계로 100주년이던 1966년 이전까지의 해석사를 정리함으로써 토마스의 순교 문제를 성찰하려고 한다.

 

자료와 사관의 문제

토마스에 대한 해석이 양분된 첫 번째 이유는 자료 문제이다. 1866~75년에 조선 정부나 외국 선교회 등이 생산한 사료들이 존재하지만, 그 작성자들이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나아가 이를 정리하고 편찬한 시기가 1920년대 중후반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며, 편찬자들의 소속 집단의 입장을 탈문맥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첫째, 조선 정부 측 자료인 高宗實錄(李王職, 1935)1927년부터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쇼고(小田省吾)를 책임자로 한 편찬위원회가 작업했다. 일성록 등에 실린 원사료를 수록하고 있지만, 총독부의 내선일체라는 편집적 관점 때문에 정사로 인정되지 않는다. 평양 양란을 보면, 정부군의 반격과 양이의 처형을 정당화하는 봉건 조선 정부(와 식민 일본 정부)의 입장이 드러나고, 이양선을 격퇴하고 양이를 타살한 군민을 옹호하는 반서양 동아주의가 숨어 있다. 태평양전쟁기의 일본 군국주의 해석과 북한 역사서의 반미주의 사서는 이 노선을 따른다. 정부(조선-일제-북한) 측 자료에 의존하는 한국사 학자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관변 사관과 편협한 민족주의를 주의해야 한다.

둘째, 오문환(1903~1962)朝鮮基督敎會史一分水嶺平壤洋亂(평양 광명서관, 1926)도마스 牧師傳(도마스牧師殉敎記念會, 1928)192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항하는 평양 기독교인들의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담론의 일부였다. (옥성득,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 기독교사상(20189)을 참고하라.) 그가 수집한 목격자 구두 증언은 중요하지만, 사건 발생 60년이 지난 시점의 부정확한 기억들이 혼재되어 있다. 역사가로서 훈련을 받지 않은 20대 초반의 교사가 신앙심으로 정리한 토마스의 전기는 제도 교회의 영웅전으로, 학문적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 목격자들의 파편적인 기억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끼워 맞추기 위해 상상력에 의존했다. 오문환의 글을 인용하는 교회사가가 호교론적 순교사관을 경계하지 않으면,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 사학계나 일반 독자가 읽는 글을 쓰기 어렵다. 순교사관을 가졌던 오문환이 1938년부터 평양기독교친목회를 조직하여 신사참배와 친일에 앞장섰고, 해방 이후 서울에서 자신의 친일 행적을 덮기 위해 순교반공사관을 덧입혀 백령도 선교를 내세웠던 이유를 숙고해야 한다.

사료 비판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고 기존 문서의 오류를 교정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을 어떤 공동체가 어떤 삶의 자리에서 왜 그렇게 해석했는지를 밝히는 해석사의 정리가 중요하다. 사실과 함께 진실을 찾는 역사가의 재해석은, 사건 원 사료(기록자의 관점 + 상황 1) 해석된 역사(해석자의 관점 + 상황 2)를 놓고, 두 관점과 두 상황에서 벗어난 제3의 관점을 찾기 위해 이중적 탈문맥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거나,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이 시각에서 필자는 재작년에 개인적 평가는 유보한 채 1910년대까지 토마스의 죽음에 대한 해석사를 정리해서 발표했다. 이후 여러 논저가 필자의 글을 오해하거나 비판하며 토론했다.


역사적 토마스

184097일 영국 웨일즈에서 태어난 토마스는 뉴칼리지를 졸업한 후, 18636월 하노버 회중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 파송되었다. 12월 상하이에 도착한 후 4개월 만에 아내가 사망하는 슬픔과 선배 선교사들과의 갈등으로, 186412월 선교회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지푸의 세관에 취직하여 독립 선교사가 되었다. 그곳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이후 NBSS] 총무 윌리엄슨은 황해를 건너온 천주교인 김자평과 최선일을 만난 후 186594일 토마스를 한국에 권서로 파송했다. 토마스는 김자평의 안내로 황해도 옹진군 창린도에 도착하여 몇 달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18661월 베이징에 돌아와 조선 동지사를 만나 한국 사정을 탐지했으며, 런던선교회로부터 재임명을 받았다.

조선 선교 기회를 엿보던 토마스는 18667NBSS 권서로 재임명받고, 평양행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통역인으로 동행했다. 조선 정부는 유화 정책에 따라 연안에 접근하는 이양선에게 물과 식량은 제공했으나 통상과 내륙 항해는 금지했다. 중무장한 이양선 대항법을 연구해 온 평양감사 박규수는 해방론(海防論) 입장에서 여러 차례 경고를 보내어 충돌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상선은 무역을 요구하며 평양행을 감행했다. 토마스는 강변의 여러 마을에서 한문 성경을 반포했다. 선박은 평양의 양각도까지 접근했고, 평양과 서울에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중군[3, 감영의 군사령관] 이현익이 승선하여 협상하던 중 인질로 잡혔으나, 장교 박춘권이 구출했다. 협상을 주도하던 박규수는 상선의 도발적 발포로 민간인이 죽자, 조정에 보고하고 공격을 명령했다. 박규수는 92(음력 724) 무기 열세를 제갈량의 적벽대전처럼 화공법으로 극복하고 셔먼호를 전소시켰다. 토마스 등 선원 24명은 군민이 함께 섬멸했다. 전리품인 포와 포탄, 바늘, 성경, 아편, 자기 등은 감영 창고에 보관했으나, 닻은 대동문에 걸어 도성 수호를 기념했다.

여러 자료를 종합한 조선사(총독부 조선사편수실, 1938)는 전투와 토마스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제너럴셔먼호가 양각도까지 올라와 총을 쏘며 상선의 양식을 약탈하고 주민 7명을 살해하고 5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에 박규수가 출두하여 종일 감독하는 가운데 중군 백낙연과 서윤 신태정이 지휘하여 화공 포격을 했다. 24일 군민이 함께 화공을 하고 포수와 사수를 동원하여 공격했다. 정오에 셔먼호에서 포와 총을 쏘아 주민 1명이 사망했다. 이를 본 모든 백성과 수비 군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는데, 여러 척의 배에 가득 실은 풀에 불을 붙여 떠내려 보내어 셔먼호가 불에 타게 되었다. 이에 토마스와 조능봉이 뱃전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살려 달라 구하니 바로 잡아서 결박했다. 군민들이 분을 이기고 못하고 일제히 타살하니, 나머지 선원은 화살에 맞아 죽거나 불에 타서 죽었다."

토마스는 결박된 채 군인과 주민에 의해 일요일에 타살되었다.

 

50년의 해석사, 1866~1915

부정적 평가: 조선 정부는 병인양요와 달리 내륙인 평양에 침략한 이양선을 격침하고 서양 오랑캐를 섬멸하자 안도했다. 박규수를 비롯한 공로자들에게 포상했다. 기자의 도성에 침략한 야만인의 격퇴를 노래했다. 프랑스의 로즈 제독 함대는 10월 초 프랑스 신부들이 살해된 병인박해와 제너럴셔먼호를 조사하기 위해 탐사한 후, 10월 말에 강화도를 점령하는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대원군은 한불전쟁에서 승리한 후 해안 봉쇄를 강화했다.

미국 언론은 1866117뉴욕 타임즈가 제너럴셔먼호가 좌초되어 40명의 선원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병인양요는 더 자세히 보도하여, 미국 대중에게 한국의 존재를 알렸다. 12월부터 영미 언론은 내륙까지 들어간 상선의 책임을 거론했다. 미국 정부는 1871년 신미양요까지 무력 해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에는 통상 조약을 추진하여 1882년 한미조약을 체결했다. 그 주역은 슈펠트 제독이었다.

아펜젤러는 1887년 슈펠트로부터 받은 한미조약 관련 원고를, 10주년이던 1892Korean Repository에 소개하면서, 제너럴셔먼호의 평양행을 비판하고, 조약을 통해 은자의 나라 조선을 개방하고 서구 문명을 소개한 슈펠트를 콜럼버스에 비유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한미조약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로 조약이 체결되고 선교사들도 합법적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았다. 초기 선교사들은 19세기 중반의 군함(무력)이나 상선(무역)을 이용한 선교 방법론을 배척했다. 서구 제국주의 전성기(1880~1914)에 선교사들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평가하지 않았다. 1866년 런던선교회는 상처한 젊은 선교사가 무모한 여행으로 불필요한 죽음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윌리엄슨도 186710월 고려문에 가서 수소문했으나, 방문기인 Journeys in North China(1870)에서 토마스의 권서 활동을 적극 설명하지 않았다. NBSS도 침묵했다. 로스의 History of Corea(1878)와 그리피스의 Corea, The Hermit Nation(1882)은 간단한 사건 묘사에 머물렀다.

1890년대 초 마페트가 평양 전도를 시작할 때, 주민들은 서양 오랑캐의 침략을 기억하고 서양 종교를 배척했다. 그는 토마스의 성경 반포를 평양의 첫 선교 활동으로 인정했으나 힘을 앞세운 불법적 방법을 비판했고, 양란이 없었더라면 복음의 문이 더 쉽게 열렸을 것으로 보았다. 청일전쟁 후 1895년 주민의 목격담을 Korean Repositoryd 처음 소개한 게일은 토마스를 순교자로 표현하지 않았다. 결박되어 주민들에게 난자당한 것만 언급하고 성경 투척이나 기도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미륵불 석상이 외침으로부터 평양을 지켰다는 사공들의 미륵신앙을 소개했는데, 민간 불교 신앙과 기독교의 갈등 상황을 반영했다.

선교사들의 한국사 저술을 대표하는 헐버트의 History of Korea(1905)는 상선의 무모한 내륙 항해와 침략 행위를 비난했다. “이 문제의 양측을 편견 없이 공부한 학생이라면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배는 경고를 받았으나 모든 여건이 좋았더라고 해도 좌초할 수밖에 없는 항해를 무모하게 감행했다. 한국인들은 이것이 단순한 실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자연히 적대적인 배로 간주했고 그렇게 처리했다.”

긍정적 평가: 토마스의 죽음에 대한 첫 공식 긍정적 평가는 평양 부흥이 지나간 19098월 평양에서 열린 북장로회 선교 25주년 기념식에서 이루어졌다. 마페트는 토마스가 NBSS 권서로 성경을 반포하다가 피살되었다고 소개하고, 학습교인 중에 그때 받은 성경을 몰래 보관해 온 자도 있다고 소개했다. 다만 성경 반포 결과로 개종의 열매가 맺혔다는 식으로 과장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마페트의 연설을 계기로 토마스 목사의 매장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소위원회가 임명되었다. 마페트는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할 때 글래스고우 소재 NBSS 본부를 방문하고 토마스기념교회 설립 후원을 부탁했다.

191110월 총독암살음모사건(105인 사건)이 일어나 교인들이 투옥되자, 평양을 중심으로 1916년 토마스 50주기를 바라보면서 그의 죽음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19119월 북장로회 한국선교회는 토마스기념특별위원회(위원 Moffett, F. S. Miller, McCune)를 임명했다. 마페트는 토마스를 기념하는 평양 제5장로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NBSS500파운드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공회가 재정 악화로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기념교회 설립은 포기되었고, 1915년 위원회도 해산되었다. 50주년은 큰 기념행사 없이 지나갔다.

다만 한국 선교지에서 은퇴하고 1911년부터 뉴욕 북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 편집 총무로 일하던 존스 목사가 1915년 보스턴대 신학대학원에서 한국교회사를 강의할 때 제너럴셔먼호사건과 병인박해를 연결해서 이해하고, 프랑스 선교사들과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순교로 정의했다. 강의록은 출판되지 않아 영향력은 없었다. 사실 1918년 클라크 목사가 편찬한 長老敎會史典彙集의 서술처럼 토마스의 권서 활동은 인정했으나, “該商民等不善이 잇셔 平壤城人交戰該船船夫等과 도마스不幸同死했다고 하여, 불행한 죽음으로만 보고 순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50주년부터 100주년 이전까지 (1) 1916~1945

국내에서 토마스를 순교자로 본 글들은 반기독교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난 1925년부터 등장했으며 192660주년을 계기로 자리를 잡았다. 19267월 말 안식교회 순안병원의 헤이스머 의사 사건은 반기독교-반미-반선교사 운동에 기름을 부어 지방에서도 선교사 규탄대회가 열렸다. 1927년 장대현교회에 노년파와 청년파 간의 분규가 발생해 길선주 목사가 사임했다. 이 상황에서 토마스기념사업으로 유명하게 된 20대의 오문환은 보수적인 마페트-길선주의 노년층과 노회-총회 측에 서서 친선교사-친미 노선을 옹호했다.

1926년 토마스 순교 60주년 기념: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서술한 첫 책은 19257월 평양의 강규찬, 김선두, 변인서가 공저한平壤老會地境 各敎會 史記였다. 총론 첫머리에서 영국 선교사 토마스가 監司의 습격을 당하여 대동강에서 殉敎하니 이는 예수교 신교도의 我國江山始滴한 일이라고 밝혔다. 아마도 192575일 로마의 성베드로성당에서 거행된 한국 천주교 순교자 시복식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신문기자로부터 평양 양란 60주년 기고를 요청받은 숭의여학교 영어 교사 오문환(1903~62)은 마페트 목사와 의논한 후, 토마스 활동과 최후에 대해 40명 이상의 노인들의 목격담을 수집·정리하고 연구하여 19268朝鮮基督敎會史一分水嶺平壤洋亂을 발간했다. 서문에서 채필근 목사는 19257월 경성교역자연합회 수련회에서 토마스 목사 치명 60주년을 기념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을 밝혔다. 오문환은 토마스의 입국은 즉 신기독교 조선선교의 선봉자이다. 비록 장구히 조선에 체재하면셔 전도하지는 못하엿스나 씨의 지래한 한역성경은 다수히 전파되야 금일 사십만의 신도를 유한 조선신기독교회의 기초가 되엿다.”고 주장했다. (오문환, 朝鮮基督敎會史一分水嶺平壤洋亂(평양: 광명서관, 1926), 14~15.토마스가 장로교인으로서 순교했다고 잘못 서술했지만, 그의 옆구리에서 흐른 순교의 피는 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피와 같이 의로운 피였고, 그 피에서 수십 만 교인이 나왔으므로 한국 장로교회의 시조라고 강조했다. 오문환은 이 소책자를 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와 장로회신학교 강당에서 모인 개신교선교회공의회에서 발표했다. 이때 평양을 방문한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스피어가 오문환의 작업을 격려했다. 결국 1925~26년 평양에서 한국인 목회자들, 선교사들, 숭실 졸업생 등이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이해하는 합의가 이루어졌고, 조왕리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오문환이 그 작업을 주도하는 장본인이 되면서, 일약 유명 인물이 되었다.

한편 경성교역자연합회 148인의 발기로 19261114일에 3대 기념식--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 대영성서공회 조선지부 설립 30주년, 밀러 총무 봉사 25주년--이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렸다. 서경조 목사는 토마스가 불타는 배에서 성경을 반포하며 순교하는 장면을 실감나게 연설했다. 성서공회 서기 최재학은 기독신보에 토마스 목사의 약력을 소개하고, 권서로서 최후까지 성경을 전하다가 선원들과 옥석구분 없이 창에 찔려 죽어 순교자가 되었다고 정리했다. 서울에서는 성서공회기념사업과 토마스순교기념사업을 이어준 연결고리인 성서 반포를 강조했다.

이어서 오문환이 12월에 평양 양란을 3회에 걸쳐 기독신보에 소개했다. 2회에서는 토마스 목사가 불타는 배에서 뛰어내린 후 붙잡혀 붉은 줄로 결박을 당한 채 친족을 잃은 주민들에 의해 칼에 찔러 죽었다고 묘사했다. 그런데 3회에서는 이재풍 목사의 사촌처남이 양란 당시 군인이었는데 선원들을 살해할 때 한 사람이 붉은 표지의 책을 받으라고 애걸했다고 증언한 사실을 새로 소개했다. 곧 최후의 순간에 군인에게 신약 성경을 주었으며, 그 붉은 표지의 신약전서가 토마스의 순교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오문환, “平壤洋亂閑話 (3),” 기독신보, 19261222.) 오문환은 상충되는 증언들을 비판 없이 소개했다. 그러나 이재풍 목사의 증언을 듣고 주민이 아닌 군인을 처형자로 지목했고, 최후의 기도와 성경 전달 노력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평양 출신 李在豊 목사는 거창에서 목회한 후 통영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27320일에 별세했다. 장남 永漢은 숭실전문 졸업 후 동경 유학 중이었고, 차남 永泰1926년 숭실전문 영문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銀峰, “故李在豊牧師 葬禮,” 기독신보, 1927420.) 레이놀즈의 번역 조사가 된 이영태의 어머니(이재풍 목사의 처)가 토마스를 죽인 군인의 조카였다. 오문환의 이 글에서 처삼촌을 사촌처남으로 잘못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이재풍 목사는 이런 관계를 숨기고 있다가 60주년 때 오문환이 조사하자 알려주고 얼마 후 사망했다.) 

60주년 기념식과 토마스 목사 순교 전말을 보도한 동아일보는 최후까지 전도에 정성을 바친 부분은 인정했으나, 기자릉 도굴로 일확천금을 꿈꾼 제너럴셔먼호의 상업적 동기와 선제공격을 비난했다. 조선일보는 침묵했고, 일부 잡지는 평양 양란을 일으킨 제너럴셔먼호의 침략행위를 비판했다.

토마스목사순교기념회의 활동: 192757일 숭실대 강당에서 토마스목사순교기념회(회장 마페트, 서기 오문환)가 창립되어 전기 발간, 기념교회 설립, 기념 전도사업을 추진했다. 58일 주일에 토마스 목사가 묻힌 봉래도(쑥섬)에서 1,000 여 명의 교인이 모여 노천에서 순교 기념예배를 드렸는데, 민휴 총무의 연설, “토마스 목사 기념의 세 가지 큰 이유라는 제목의 오문환의 연설, 그리고 토마스로부터 성경을 받은 노인의 증언이 있었다. 이 추도회에서 최후까지 성경을 전한 토마스 목사의 순교를 기렸다. 기념회는 6월에 그 취지서를 마포삼열, 김성택 외 48명의 이름으로 신문에 발표하고, 위의 세 사업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취지서는 오문환이 쓴 것으로 보이는데, 이듬해 나온 전기의 기초가 되었다. 취지서는 토마스의 생애와 조선 선교 활동과 최후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했다. 특히 토마스를 죽인 군인이 후회한 점과 받은 성경을 가족에게 전달한 점을 강조했다. 이때 기념예배당 건립을 위해 조왕리에 1,009평의 부지를 매입했다.

8월에 기념회는 순교기념비를 설립하기 위해 모금했다. 이 기사에서 보듯이 토마스를 미국인으로, 평양 양란을 병인양요의 일부로 인식하는 신문 기자의 시각이 존재했다. 그러나 192611월의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일보도 순교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썼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 순교라는 단어와 담론이 19275월에 조직된 토마스목사순교기념회로 인해 확산되었다. 1928년부터 일반 신문은 물론 천도교와 천주교까지 치명 대신 순교, 치명자 대신 순교자를 사용했다.

19279월에는 선교사 해밀턴이 오문환의 글과 취지서를 바탕으로 한국의 첫 개신교 순교자토마스를 영문으로 소개했다. 그는 오문환이 수용한 이재풍 목사의 말을 근거로 군인이 토마스를 죽였다고 서술했다. 나아가 그 군인의 여자 조카는 숭실대를 졸업(1926)하고 레이놀즈 선교사의 성경 번역 조사가 된 이영태의 모친이라고 밝혔다. (Floyd E. Hamilton,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 Korea Mission Field (Sept. 1927): 185. 군인의 조카가 이영태라고 잘못 쓴 Rhodes의 책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서술하는 글이 많다. 어떤 글은 이영태가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해밀턴의 글을 잘못 번역하고 있다. 이영태는 1926년 숭실대를 졸업하였으므로 당시 23(1903년 생?)로 보면, 1980년 전후 70대 후반의 나이에 공동번역성서 평양교정본을 만들었다.오문환과 해밀턴의 글을 종합하면 [그림 1]과 같은 관계를 알 수 있다. 해밀턴의 글을 바탕으로 런던선교회는 소식지에 60년 전에 비판했던 토마스를 순교자로 소개하고 평양 교회 발전을 높이 평가했다. 19279월 원산에서 모인 장로회 총회는 1030일을 토마스순교기념주일로 지키고 헌금하기로 결의했다. 차재명의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1927, 7)도 선교사 토마스의 죽음을 예수播種義血로 칭했다. 

[그림 1] 군인 전 씨와 이영태의 관계        ⓒ옥성득

 그러나 예일대에서 박사논문을 쓰면서 존스의 원고를 읽은 백낙준은 귀국 후 서울에서 출판한 책(1929)에서 존스처럼 병인박해와 제너럴셔먼호사건을 연결시켰으나, 토마스를 순교자로 정의하지 않았다. 사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측에서는 1930년대까지 토마스의 죽음에 대해서 큰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자들은 평양 양란을 외국과의 경쟁에서 이긴 전투로 규정하고, 단순 통상 교섭을 넘어 평양까지 와서 중군을 욕보이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며 재산을 약탈하고 심지어 婦女子(부녀자)까지 凌辱(능욕)”했다고 비판했다. 1928년 「별건곤」의 한 기사는 양인들의 몰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냉정하게 묘사했다. 

“주머니 속에 들은 窮鼠(궁서)와 가튼 洋人(양인)들은 그 凶暴(흉포) 頑慢(완만)하든 氣色(기색)이 다 어듸로 가고 船頭(선두)에 나서서 두 손을 싹싹 빌며 殘命(잔명)을 구하얏다. 그러나 그때가 어느 때라고 될 번이나 한 수작이냐. 彼等(피등) 일행은 속절업시 모다 朝鮮(조선)군에게 捕縛(포박)되야 亂刀之下(난도지하)에 大洞江口(대동강구)의 異域孤魂(이역고혼)이 되고 말엇다.” 

다시 말해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세간에 ‘최난헌(토마스의 우리나라식 이름) 사건’이라고 불리며 외국인과 상관이 없는 사건처럼 여겨지지만, 미국과의 전쟁인 신미양요로 연결되었으므로, 기고자는 통상을 위한 내륙여행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선장이나 토마스는 교섭 실무자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반면 총독부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일하던 이능화는 한국인이 쓴 최초의 한국교회사인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1928)에서 조선 패망의 원인이 양반 사회와 유교에 있다고 보았으며, 신분차별과 지방차별을 철폐하고 사회를 개조하기 시작한 기독교의 공헌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22장 “병인 평양 양선사건”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9월 3일 화공선을 준비하여 셔먼 호 쪽으로 흘러내려가게 하니 곧 배가 화염에 휩싸이면서 연기와 불이 하늘에 닿았다. 외국인들이 뱃머리에 나와서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한국인들은 듣지 아니하고 그들을 육지로 끌고 와서 민중과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죽였다.” 곧 고종실록에 있는 내용을 대부분 수용했다. 


1) 『도마스 목사전』, 1928년 
1928년에 출판된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확정했고, 이후 한국교회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추모했다. 오문환은 2년간의 초인적인 노력으로 문서자료를 수집하고, 목격자 200여 명을 만나 증언을 수집했다. 이 책은 조선시대 인물전이나 한국 개화기의 영웅전 소설이나 1910년대 전도문서인 ‘예수전’과 달리, 문서사와 구술사의 방법을 종합한 전기로서, 한국인이 쓴 학문적인 근대 전기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서적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 김익두 부흥회 반대 운동, 반선교사 운동이 고조되었기 때문에, 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 프로젝트는 호교론적 관점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교회 언론은 청년층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 사회주의와 기독교, 과학과 기독교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 주류는 토마스 담론으로 교회를 이끌었다. 


『도마스 목사전』은 제너럴셔먼호의 평양 항해를 “洋船 侵入”(양선 침입)으로 인정했다.(48쪽) 그러나 이 책은 토마스의 성경 반포 활동과 최후 순교 장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8월 20일 대동강 입구 보산에서 천주교인들에게, 포리에서 홍신길 등에게 반포하고, 21일 석정호 부근 마을에서 김영섭 등에게 『진리역지』(眞理易知) 등의 전도책자와 성경을 반포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백기게양(白旗揭揚)과 성경분급(聖經分給)’ 항에서 화살과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토마스 목사가 불타는 배 위에서 “예수”를 외치며 “한손에는 白旗(백기) 잡고 한 손에는 聖經(성경) 들어” 많은 성경을 뿌렸다고 서술했다. ‘최후기도(最後祈禱)와 순교(殉敎)’ 항에서는 체포 후 처형하는 군인에게 성경을 전하고 기도한 순교자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도마스牧師(목사)는 두 무릅을 沙場(사장)에 고 머리를 숙여 에 대인 後(후) 얼마동안 最後(최후)의 祈禱(기도)를 올니고 다시 니러나서 軍人(군인)의게 聖經(성경) 밧기를 勸(권)하엿스나 其軍人(기군인)은 그의 말을 充分(충분)히 理解(이해)치 못하엿슬 것도 事實(사실)이려니와 環境(환경)이 그것을 許諾(허락)지 안는지라 맛참내 칼을 그 가삼에 대여 하나님의 充腹(충복) 도마스牧師(목사)의 貴(귀)여운 生命(생명)을 앗고 말엇다.”(58쪽) 


오문환은 이 극적인 광경을 목격한 인물로 외성에 거주하던 황명대(당시 약 20세, 1928년 조왕리교회 출석)를 제시하고, 대동군 거주자로 현장을 목격하고 성경과 포탄을 보관한 김정필의 아들 김진효(1928년 강서군 동진면 난포리교회 출석), 1892년 초기 전도 때 토마스의 최후에 대해서 들었다는 한석진 목사(1928년 1월 16일 자 편지)를 간접 증인으로 제시했다. 한석진의 편지처럼 토마스가 배에서 성경을 투척한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최후 기도나 처형하는 군인에게 성경을 주었다는 것은 지나친 미화 작업으로 보인다. 또한 부록에서는 한문 자료의 ‘최난헌’(崔蘭軒)을 ‘토마스’의 음역이 아닌 ‘제너럴셔먼’의 음역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오문환은 토마스의 성경 반포와 순교의 결실로 개종자들이 나왔으며,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처형에 참여한 박춘권이 초기 교인이 되었다; 12세 소년 최치량이 가지고 온 한문 성경을 벽지로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이 개종했다; 나중에 그 집을 사서 여관을 경영한 최치량은 개종 후에 여관을 널다리교회로 기부했다; 20세 부인 이신행이 성경을 받고 개종하여 장대현교회 전도부인이 되었다; 김창구도 성경을 받아 후에 개종했다고 연결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개종을 토마스의 성경 반포의 직접적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반포된 성경은 수거되어 불태워졌으며, 25년 이상 그 책을 읽고 개종한 자는 없었다. 오문환이 정리했듯이, 강서군 지포리의 천주교인들은 토마스를 만나고 성경을 받은 것이 발각되어 1866년 9월 23일 9명이 체포되었다. 지달유는 옥에서 사망하고, 지달해와 지달수는 이듬해 1월 22일 보통문에서 참수되었기 때문에, 감히 양인과의 접촉 사실을 밝히거나 성경을 읽는 자는 없었다. 1893년 1월 최치량과 평양 장로교인 7명의 첫 세례는 마페트의 전도 결과였다. 10월에 학습교인 중에서 과거 토마스로부터 성경을 받았다는 증언이 있었으나, 그것이 개종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박춘권은 토마스 처형에 참여한 자가 아니고 목격자였으며, 사건 발생 후 33년이 지난 1899년에 77세 노인으로 세례를 받았다. 


1928년 10월 서울 경신학교에서 선교사 쿤즈의 선교 25주년 겸 교장 15주년 행사가 열렸을 때, 특이하게 연극 ‘순교자’ 공연이 있었다. 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토마스의 순교를 주제로 한 연극으로 짐작된다. 그만큼 토마스 순교 담론은 한국교회에 수용되고 있었다. 1932년 3월 27일부터 4월 8일까지 소설가 김동인은 「동아일보」에 소설 <순교자>를 12회 연재했다. 이는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에 감명을 받고 이를 서간체로 극화한 것으로, 오문환의 서술을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 


1932년 5월 오문환은 자신의 전기를 영어로 정리하여 왕립아시아학회 조선지부에서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는 토마스의 최후에 대해서, 선상에서 불에 타서 죽었다, 강에 익사했다, 군인의 손에 처형되었다는 세 가지 증언에 대해 조사한 결과, 앞의 두 내용은 소문에 불과하고, 세 번째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1927년, 처형한 군인의 친척으로부터 이를 들었으며, 수많은 목격자의 증언이라고 말했다. 또한 토마스를 처형한 군인 전 씨는 선한 사람을 죽인 것을 후회하고 받은 성경을 가지고 집으로 갔으며, 그 처남의 증손자가 이재풍 목사의 두 아들로서 자신과 함께 숭실대를 다녔다고 보완했다. 



1932년 3월 토마스기념예배당이 착공되어 7월에 완공되었다. 공사비 5,000여 원으로 T자형 평면에 고딕 양식으로 건축했는데 유물과 사료를 보관한 기념실과 연구실도 마련했다. 위치는 토마스의 무덤이 있는 봉래도 남쪽, 강 건너편 언덕 조왕리였다. 평양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 기간인 9월 14일 낙성식이 열렸다. 1927년부터 전국 교회와 선교사들이 헌금하고, 토마스의 유가족을 비롯한 스코틀랜드 회중교회가 동참했으며, 런던선교회, 영국성서공회도 기부에 참여했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NBSS)는 터툴리안의 말 “The blood of martyrs is the seed of the church.”를 새긴 머릿돌을 기증했다. 기념회는 기념엽서도 발행했다. 

2) 선교 희년과 토마스, 1934년 
1934년 9월 선교 희년대회가 평양에서 열렸을 때,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을 만든 ‘장로교회 목사’ 토마스를 ‘조선장로교회의 최초 선교자’요 교회를 세운 희생 제물로 ‘순직’했다고 부각시켰다. 로즈는 1934년에 발간한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of Presbyterian Church, USA, 1884-1934에서 토마스와 관련된 항을 오문환의 전기를 바탕으로 서술했다. 오문환의 전기와 달리 건조하게 토마스의 최후 기도와 성경 전달을 묘사했으며, 해밀턴(Floyd. E. Hamilton)을 따라 “한국의 첫 개신교 순교자”로 불렀다. 다만 처형한 군인의 조카가 이영태라고 잘못 서술했다. 


마페트를 편집인으로 토마스목사순교기념전도회의 기관지 「殉敎者」(순교자)가 발간되었다. 9월 7일 창간호에 실린 “희년 기념과 초대교회 운동”에서 오문환은 “반도를 그리스도화 하도록 용주매진하여야 할지니 삼십만의 교우여! 형제자매여! 초대교회의 사랑, 초대교회의 열정, 초대교회의 전도로 도라가자!”라고 외쳤다. 이때 전도회가 추진한 5대 사업은 역 대합실 전도 간판 설치, 전도 씰 발행, 도마스호 건조, 낙랑 전도계획, 회보 발간이었다. 계획대로 1935년 7월 대동강 전도를 위한 ‘도마스호’가 진수되었다. 이때 한국을 방문한 영국성서공회의 템플 총무는 12세 때 토마스의 순교 장면을 목격한 장 씨를 만났다. 


한편 일반 학계에서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지속적으로 평양 양란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문일평은 1934년 3월 31일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를 ‘米船燒破事件’(미선소파사건)으로 부르며 침략한 미국 선박을 전소시키고 파멸한 사건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은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 더 강화되었다. 


연희전문학교 교수 케이블 선교사는 여러 해 동안 제너럴셔먼호 관련 자료를 정리하여 1938년에 The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 1866-1871를 출판했다. 그때까지 이용 가능한 다양한 1차 한문 자료를 번역하고 한국인들의 연구서까지 정리한 230쪽의 책이었다. 오문환이 토마스가 한국어를 배운 후 성경반포와 전도를 통해 개신교 선교회를 수립하기 위해서 평양에 왔다는 순수 선교적 동기를 주장한 것에 대해서 케이블은 “나는 그의 가설이 맞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평가했다.(8쪽) 선교사들 중에는 토마스의 순교를 수용하면서도 오문환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3) 오문환의 친일 행위, 그리고 토마스를 미제 침략의 선봉으로 만든 일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신사참배 문제로 숭의여학교가 폐교되는 위기가 닥치자, 34세의 야심가 오문환은 친일파가 되어 돈과 권력의 자리로 나아갔다. 그는 1938년 4월 평양기독교친목회를 조직하고 상임간사로서 신사참배를 지지하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했다. 또한 1938년 12월에는 평양의 목사와 장로 등 12명을 인솔하여 북중국 지역의 일본군을 위문했다. 1939년 총독부는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외국 선교사 기념사업을 중단시켰다. 토마스기념교회도 조왕리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교회에 세워졌던 NBSS의 기념비도 시멘트로 뒤덮였다. 오문환은 『비상시국과 기독교』를 저술하고 내선일체에 앞장섰다. 그는 1940년 6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기관지인 「총동원」에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회전”을 기고했다. 그리고 12월에는 ‘기원 2600년 봉축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총무로 일했다. 1941년 4월 기독교서회 임원진을 조선인으로 재조직할 때, ‘松浦文雄’으로 창씨개명한 오문환이 영업총무로 선임되었다.(
朝鮮基督敎界 人事變動,” 삼천리(19416): 47.) 6월에는 양주삼, 정인과, 백낙준과 함께 일본 기독교 출판계를 시찰했다. 신궁참배도 겸했다. 당시 전 일본 개신교 교파 합동으로 ‘일본기독교단’(日本基督敎團) 창립 총회가 열렸으므로, 양주삼과 오문환 등은 단일 조선교단을 형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연극 <대동강>과 <낙랑>을 상연하고 토마스의 내한을 미제 침략의 선봉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오문환은 신사에서 일본의 승전을 기원했다. 그는 1942년 1월 재단법인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이사, 4월에는 기독교신문협회의 이사가 되었으며, 6월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대표로 일본군에 자동차 2대를 헌납했다. 



|                                                       50주년부터 100주년 이전까지 (2), 1945-65년 

1) 해방 이후 오문환의 토마스기념사업과 반공 
1945년 해방이 되고 이후 러시아가 북한을 점령하자 친일파였던 오문환은 서울로 내려와 언론과 교육 사업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토마스순교기념사업에 반공을 더하여 과거를 지웠다. 2011년 오문환의 자녀들이 편찬한 부친의 논저 자료집은 오문환의 신사참배 문제 등은 침묵하고, 대신 1944년 오문환이 정방산 사건에 연루되어 간첩으로 몰려 평양 일본 헌병대에 검거되어 투옥되었으나, 해방으로 살아났다고 강조했다.(
오성식 편, 오문환의 토마스목사 순교기념선교사업(은혜기독대안학교, 2011), 7.) 이는 그가 해방 직후부터 남한에서 생존하기 위해 주장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는 곧 「경성일보」의 초대 사장에 취임했고, 1946년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상임고문이 되었으며, 1946년에는 숭문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46년 8월 19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주기철, 최봉석, 최상림, 박관준 등 신사참배 관련 순교자 50명에 대한 추도회가 단체 ‘새사람’ 주최와 「기독교신문」 후원으로 열렸다. 김구 등 기독교 민족 지도자와 교계 지도자들이 참석하여 우상숭배인 신사참배에 맞서 불멸의 투혼을 다해 죽음으로 항거하고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희생한 순교자들을 한국 개신교 60년 청사(靑史)의 꽃이요 선지자로 기념했다. 특히 주기철 목사가 “우리는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거짓 신에 절할 수 없고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더욱 거짓 신을 섬길 수 없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민족은 자주 독립해야 한다.”라는 결의를 이끌어냈다.(
朱基徹牧師等嚴肅追悼式,” 동아일보, 194693.


이런 분위기에서 오문환은 1947년 토마스목사순교기념전도회를 조직했다.(총무 겸 사업부장 오문환, 전도부장 이승길, 교육부장 김낙수, 편집부장 정재면, 후생부장 박승원) 기관지 「백령」을 발행하고, 복음선 2척과 회원 15명으로 연안, 옹진, 연평도, 백령도에 전도하여, 황해노회를 설립했다. 1947년 9월 3일에는 토마스 목사 순교 81주년을 기념했다. 1948년 「기독공보」를 맡아 운영했으며, 1949년 흥사단이 발행하던 「한국일보」를 인수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간 오문환은 1950년 9월 토마스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부산에 본부를 설치하고 피난민 수송을 후원하는 시국봉사를 하는 한편, 친일파였던 김길창 목사와 손잡고 1951년 2월 도마스호를 진수하여 거제도 등 섬 전도를 계속했다. 그해 4월에는 『토마스목사기념 25년 약사』를 출판했다. 1951년 성탄절에는 어린이용으로 소설 『순교자 도마스 목사』(남향문화사)를 발간했다. 대화체로 주요 장면마다 삽화를 넣어 토마스에 대한 영웅적 이미지를 만들었는데, 마지막 기도와 처형 장면은 1985년 김학수 장로의 토마스 처형 장면과 유사했다. 

2) 토마스 순교 90주년(1956년)과 오문환의 친미 사관 
오문환은 1953년 서울에 돌아온 후 광신상업고등학교를 재건했으며, 1954년 미군대한원조(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와 미국기독교아동복리회(Christian Children’s Fund)의 원조를 받아 영등포구 상도동에 남북애육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았다. 1958년에는 학교법인 계명의숙을 설립, 장안중학교와 남산고등학교를 재건했다. 


오문환은 1956년 토마스 목사 순교 90주년 기념사업을 주도했다. 그는 소책자 The Cross at the Mouth of Taedong River(Seoul: Thomas Memorial Mission, 1956)를 발간하고, 토마스의 행방을 조사하기 위해 평안도 연안을 탐사한 쉐난도어호를 타고 방문한 마티어(Calvin W. Mateer)의 한국 활동을 소개했다. 대동강 입구의 한 섬에서 마티어가 본 십자가를 토마스가 세운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제목으로 영문 소책자를 발간했다. 그러나 오문환은 마티어가 군함 선상에서 군인과 승무원 몇 사람과 함께 4월 19일과 26일, 5월 3일 주일예배를 드린 것을 육지에서 한국인과 예배한 것으로 오해했다. 오문환은 1961년 11월 1일 왕립아시아학회 한국 지부 서울 모임에서 이 소책자를 요약하여 쉐난도어호 사건과 마티어의 한국 방문을 소개했다. 


1956년 10월에는 「조선일보」에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관련된 신미양요와 작약도에 대한 글을 연재했다. 오문환은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군이 “한국과 전쟁하러 온 것이 아니요 문호를 개방하고자 하였던 것이요, 양측의 이해와 연락의 불충분으로 충돌”한 것으로, 신미양요로 인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이후 서구 열강이 작약도에 정박하면서 조약을 맺었던 점, 그리고 1950년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때에도 작약도에 정박한 후 서울을 수복하고 공산군을 격퇴시킨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신미양요 때 사망하여 작약도에서 묻힌 미 해병대 3명을 애도하고 한미 간의 우호적 관계를 강조했다. 지나친 친미적 역사 이해였다. 



|                                                                                           결 론 
앞에서 우리는 1866년 평양 양란과 토마스의 순교에 대한 100년 간의 해석사를 살펴보았다. 1876년 개항 이전 개신교 선교사가 조선에 오려면 불법적인 방법밖에 없었다. 토마스는 정기 항로가 없는 상황에서 무장한 아편선을 타고 조선의 내륙 평양까지 침입해 들어오는 제국주의 시대 선교 방법론을 가진 인물이었다. 무고한 양민을 죽이고 평양 중군을 인질로 삼는 등 침략 행위를 한 이양선의 통역자요 대변자였기 때문에, 상선 파괴와 선원 몰살에 관하여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와 권서의 자격으로 대동강을 따라 여러 마을에 성경을 전파했으며, 평양에서도 죽는 날까지 성경을 전했다. 비록 개종자를 만들지 못한 짧은 체류였고, 아름답지 못한 모습도 있었지만, 토마스는 순교자로서 죽었다. 만일 오문환이 1926-28년에 지나친 미화 없이 목격자들의 증언과 대담을 충실하게 기록한 구술 자료와 전기를 남겼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완벽한 순교자나 성자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20대 청년 선교사로서 성경을 전했던 토마스의 모습을 상반된 증언들까지 그대로 서술했더라면 오히려 토마스를 순교자로 보는 일에 대한 논쟁은 지금보다 줄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주교회가 병인박해 60주년을 맞아 순교자들을 복자로 시복하는 일에 자극을 받았는지, 오문환과 교회 지도자들은 개신교회와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의 장로교회에도 유사한 순교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완벽하지 못한 시대적 한계를 지닌 순교자였더라도 좋았겠지만, 그들은 영웅을 만들고자 했다. 토마스의 부족한 모습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서술할 수 없었던 청년 오문환의 시대적 한계도 아쉽게 생각한다. 


토마스의 죽음이 순교인가에 대한 논의 외에 다음 몇 가지 생각을 추가하고자 한다. 첫째, 1866년 대동강에서 실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사실 규명 못지않게 그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했는지를 연구하는 해석사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지난 50년간 많은 학자들이 사건의 실체 규명을 위해서 많은 논문과 저술을 발표했다. 그러나 해석 작업이 더해지면서 이 사건에 대한 실체적 접근은 어려운 실정이다. 1860년대의 척양론, 그리고 1920년대의 사회주의의 반기독교론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순교론이 대립함으로 인해 사실, 증언, 기억이 왜곡되었다. 더욱이 북한은 주체사상과 김일성 우상화 작업으로 조작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교회사학자들도 지나친 호교론적 순교론만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관과 신학은 변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한 시대의 신학의 약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해석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의견이나 반대파 학자들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태도가 중요하다. 지난 150년간 정부(조선 1860년대 →총독부 1940년대→북한 1980년대→남한 1990년대) 측은 민족주의 입장에서 평양 양란을 제국주의 침략으로 비판해왔고, 1920년대의 사회주의자들과 1930년대 이후 국사학계는 유사한 입장을 유지해 왔다. 반면 1920년대부터 보수화된 서북 기독교와 한국교회는 토마스의 순교를 기념하고 선양해왔다. 해방 이후의 상반된 견해가 해방 이전에 이미 강하게 존재했다. 따라서 보수적인 교회사학자들이 전자 측에 있는 사학자들을 종북 좌파로 매도하는 무례한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민족주의적 입장은 1860년대 이후 지속된 정치계와 학계의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한 사관이 진실을 다 보여주지는 못하고 진리를 독점할 수도 없다. 현 사학계는 보혁으로 양분된 구도도 아니고 좌우가 선명하지도 않다. 다양한 담론이 생산되지 않는 한국교회 사학계의 신학적 경직성과 학자들의 나태가 문제이다. 과거를 하나의 틀로 해석하려는 단선적 사고가 바로 과거라는 시공간을 식민지로 만드는 제국주의적 사고이다. 과거는 우리의 점령과 통치를 기다리는 수동태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경청하고 배워야 하는 능동태적 생태계이다. 


셋째, 순교 담론을 생산하는 학자나 작가가 반드시 삶에서 순교 정신을 구현하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위에서 우리는 1926년부터 1962년까지 저술과 기념사업으로 40년 가까이 토마스 순교 담론을 생산하고 전파한 장본인인 오문환의 저술과 생애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우리는 그가 왜 그렇게 토마스의 순교에 매달렸는지 질문하게 된다. 1936년까지 10년간 순교를 강조한 그의 모습과 일제 말의 친일 행적, 다시 해방 이후 10년 이상 친미 노선에 서서 순교기념사업을 하며 언론사업과 교육사업을 성공적으로 성취한 사실에서 석연치 않음을 느낀다. 기독교인의 모습은 선명한 사관이나 성공한 사업보다 일관된 인격과 깨끗한 삶에서 드러난다. 선교사 토마스의 순교를 순교답게 하는 것은 필자를 포함한 역사가들의 책임인 동시에 그의 순교를 기리려는 기독교 공동체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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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득 |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였다. 저서로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등이 있다.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