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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평양과 기독교

시골 빈대, 서울 빈대

최정숙, "평양 연광정에 각도 빈대들이," 대한매일신보, 1908. 7. 30.

서울 빈대는 살지고 빛깔도 곱다. 여러 양반들과 부자들의 호의호식하는 꿀같은 단피를 빨아 먹기 때문이다. 이를 알게 된 시골 빈대들이 깨닫기를, 서울 양반들이 시골에 와서 수령이나 방백으로 와서 각도 백성의 피를 다 빨아 먹은고로 살이 많이 쪘으니, 그 놈들을 빨아먹으러 서울로 가서, 그 좋은 피를 다 빨아먹어 전일 원수를 갚아야 겠다고 결정, 대표를 서울로 보내니, 시골 빈대들이 서울로 몰려들더라.

왜 시골 빈대들이 서울이 아닌 평양에 다 모여서 의논을 했을까? 당시 평양은 대부흥운동 후 기독교인이 늘어나고 있었다. 평양 대표들이 왜 서울로 가서 백성을 압제한 관찰사와 군수들을 비판하며 성토했을까?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기독교인들이 서울에 모여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기도회를 시작한 이후, 많은 유지청년들이 교회에 모여들었고, 근대 '국가' 건설을 논의했다.

 

대동문 옆 연광정

 

요즘 서울에도 빈대가 급속히 퍼진다고 한다. 

서울에 살진 피, 고운 피, 맛있는 피가 많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