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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평양과 기독교

일제 36년간 장대현교회 강단 위 천장에 태극기 숨기고 설교

[자료 발굴] 김성여, "길선주 목사," <新天地> 제9권 10호(1954년 10월): 162~166.

1945년 8월 19일 해방 후 첫 주일 평양 장대현교회 강단에 오른 김화식 목사의 손에는 커다란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김화식 목사는 말했다. "이 태극기는 일한 합방하던 경술[1910년] 8월 29일에 우리 장대재 예배당 강당 위 천장 밑에 숨겨두어던 것입니다." 감격의 눈물, 환호하는 함성, 흥분의 박수는 예배당이 떠나가는 듯하였다.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 장대재교회는 평양에서도 최고 최대의 교회요, 과거 반세기 동안 전국 교회를 영도하던 본산이었다. 일제 36년 그 무서운 침략 정책 밑에서도 그 꼭대기에 태극기를 비장하고 있었다.   

김성여, "길선주 목사," <신천지> 9권 10호(1954년 10월): 162.

그 태극기를 숨긴 이는 길선주였다. 국망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를 고이 접어 강단 위 천장에 숨길 때 그의 마음은 태산처럼 무거웠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17세에 교사가 되어 장래가 촉망받던 첫 아들 길진형이 붙잡혀 신민회 회원으로 드러나자 심한 고문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져 폐가 상한 채 집에 돌아왔을 때, 길선주의 그 태극기 밑에서 설교했다. 1917년 캘리포니아에 유학을 갔던 아들이 폐가 더 나빠져 고향으로 돌아온 후 이틀만에 죽었을 때에도, 그는 그 태극기 밑에서 설교했다. 주일마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길선주의 입에서는 불이 쏟어져 나왔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바로 길선주 머리 위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 길선주와 삼일운동: 1919년 3월 1일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전 길선주는 평양 광혜녀원(廣惠女院)에서 가짜로 입원해 있던 이승훈을 만나 인장을 주고, 필요할 때 사용하도록 했다. 아들을 민족의 제단에 바쳤으니 이제 자신이 헌신할 때였다. 황해도 사경회를 인도하기 위해 (위 기사를 쓴 김성여 목사가 이때 동행했다) 사리원, 해주를 거쳐 장연읍교회에 갔을 때 장대현교회 박인관 조사를 통해 3월 1일 오후 2시에 서울 명월관에서 독립 선언을 한다는 말을 듣고, 그날 밤 말을 타고 장연을 떠나 이틑날 3월 1일 기차를 탔으나, 기차가 연착해서 서울에 해가 질 무렵에 도착한 길선주는 독립선언서 서명자들이 감옥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인력거를 타고 총독부 경무실로 향했다. 명함을 주고 자신도 서명자 중의 한 명이라고 자수하고 바로 서대문 감옥으로 직행했다.

1년 7개월 미결수로 있으면서 계시록을 읽었다. 재판 과정에서 길선주는 적극 가담하거나 조직, 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없어 결국 1920년 11월 유일하게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가 무죄로 나오자 여론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서명자들은 감옥에 있는데, 어찌 변절하지 않고 석방될 수 있는가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평양역에 마중을 나온 장대현교회 교인들도 속으로는 "독립운동하다가 혼자 빠져나온 영감"으로 바라보았다. 당시 길선주의 나이는 53세였고, 감옥 생활 후라 부쩍 늙어 있었다. 

1920년대가 되자 청년들은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아 반기독교 감정이 높아졌다. 길선주가 강단에서 말세론을 설파하고, 전국을 돌며 부흥사로 이름을 날리는 대신, 장대현교회 목회에 소흘하자, "저 영감, 왜 죽지 않고 살아서 저 모양이야."라며 그를 교회에서 몰아내려는 배척 운동이 1925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청년층과 노인층 교인간의 분쟁이 격화되었고, 1927년 3월에는 강단에서 몸싸움까지 했다. 결국 노회의 결정으로 동사목사인 변인서 목사는 시골 교회에 임명되고, 길선주 목사는 1928 1월 성역 25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된 후 장대현교회 신도 500명과 함께 이향리교회로 분립하고, 반대파 청년들이 장대현교회를 떠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사실 길선주 목사 배척 운동에 앞장선 변 목사는 삼일운동에 참여하라는 선우휘의 제안을 거절했고, 3월 1일 1시에 평양 교인들이 모여 만세를 부를 때 병을 핑게로 방 안에 누워있던 패들이 한술 더 떠서 반대 운동에 나섰다. 길선주는 태극기가 있는 그 강단을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반대가 심해 어쩔 수 없이 교회를 분립하고 떠났다. 이후 길선주 반대파는 길 목사가  삼일운동에 제대로 참여도 하지 않고 일제에 협조해서 무죄로 석방되었다는 비판을 계속하여, 해방 이후까지 길 목사의 명예를 더렵혔고, 그 결과 33인 서명자 중에 독립운동 관련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다가,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2009년 광복절에 가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길선주는 1936년 11월 강서군 고창교회 사경회 새벽기도 인도중 쓰러져 26일 별세했다. 그가 묻힌 평양장대현교회 장지는 그가 기부한 땅으로 만든 것이었다.

소결론

길선주 목사가 1910년 경술국치일에 평양 장대현교회 강단 천장에 숨겼다. 1910년 8월부터 1919년 2월까지 그는 그 태극기 밑에서 설교했다. 길선주는 삼일운동 참여로 서대문감옥에서 1년 7개월 복역한 후, 1921년~1927년 7년간 다시 그 태극기 밑에서 설교했다. 그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6년 별세했다. 그러나 그 태극기는 일제 36년 인고의 세월을 견딘 후 해방을 맞이했다. 그 길선주의 태극기는 평양 개신교의 애국,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다.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그 태극기를 꺼내어 펼칠 때, 김화식 목사와 장대현교인들은 얼마나 감격하며 감사했을까! 지금 그 태극기가 전해진다면 한국 교회의 보물 1호가 될 텐데, 아마도 6.25 전쟁 중에 소실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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