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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교수의 글 /잡지 기고문, 연재, 논문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까지 교회 기초가 놓이다, 1895-1904

평양의 기독교 5 : " <기독교사상>, 2019년 3월호

청일전쟁 후 개신교인이 급증하면서 평양은 러일전쟁 이전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본의 승리로 조선을 지배하던 세계관인 중화주의가 무너졌다. 한반도는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장이 되었고, 평양에는 일본 상인들이 몰려왔다. 전쟁의 신 관우가 일본의 근대무기 앞에 항복하고 대한제국이 근대화를 추진하자, 난세에 영적 혁명을 경험한 서북인은 교회로 몰려왔다. 1895-1900년 6년간 북장로회의 경우 서울 선교지부에 5개의 교회가 신설될 때, 평양 선교지부에는 96개(평남 73, 평북 23)가 세워지면서 폭발적 교회 설립기가 시작되었다. 

| 북장로회의 발전 

1895년 1월 마페트와 리가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평양 선교지부가 개시되었고, 1896년 6월 리 가족의 합류로 영구적인 지부가 되었다. 마페트는 보통문(서문) 밖 경창리에 넓은 언덕을 구입하여 선교사 주택과 미래의 학교, 병원, 신학교 부지로 삼았다. 

마페트의 신념과 네비어스 방법: 평양 선교의 기초는 마페트의 신념과 네비어스 정책이었다. 마페트는 스승 해릭 존슨 교수가 말한 “복음 메시지의 신적인 실재에 대한 생생하고 지속적인 감각”을 선교의 원리로 삼았고, 지혜의 말이 아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고전 2:4) 전도했다. 죄와 회개, 그리스도의 대속, 죄의 용서와 중생의 복음 전파가 우선순위로 교육과 의료는 부차적이었다. 물질적, 교육적, 자선적 유익보다 복음 자체의 매력으로 전도하고, 신자가 확보된 후에 문명의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는 서구문명 대신 영적인 기독교를 전하는 원리는 네비어스 방법으로 구체화되었다. 삼자정책(자급, 자전, 자치) 추진의 배후에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서북인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공격적 전도와 함께 가짜 신자를 예방하기 위해 학습제도, 사경회, 치리를 강조했다. 교회, 학교, 병원, 신학교를 한옥 양식으로 짓고 한국인 조사를 양성하여 토착화를 추진했다. 

서울과 평양의 격차와 갈등: 평양 선교지부의 교세는 1899년 서울 선교지부를 추월했고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1898년 평양 선교지부는 교회 121개, 입교인 1,050명, 출석교인 5,950명, 헌금액 2,753.80엔이었으나, 1년 뒤인 1899년에는 교회 153개, 입교인 1,512명, 출석교인 6,433명, 헌금액 18,909.62엔으로 증가했다. 선교 정책에서도 서울(언더우드, 에비슨) 대 평양(마페트, 베어드, 리)의 갈등 구도가 형성되었다.(10엔=1달러. 당시 한국 화폐 변동률이 심해서 일본 은행을 이용하였고 선교 문서에는 엔화로 표시했다.) 

1897년 독립협회가 문명개화를 주장하고 대한제국이 근대화를 추진하자, 언더우드는 「그리스도신문」으로 기독교 문명론을 전개했다. 그러나 보부상의 행패, 천주교인의 교폐, 화적떼의 출몰로 정세 불안이 지속되자 평양 선교사들은 복음전도 우선과 정교분리를 고수했다. 1900년 병원 논쟁에서 서울의 대형병원/교파연합론은 평양의 소형병원/반기구주의론과 대립했다. 

1901년 5월 방한한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브라운 총무는 이런 선교회 내의 분열을 봉합하려고 노력했다. 9월 장로회공의회에서는 “치리와 교회와 정부와의 관계”를 토론하고 제사, 처첩제, 음주, 도박을 금지하는 기준을 제시해 교인의 정체성을 제고하고, 교회의 정치화를 막는 정교분리 정책을 강화했다. 게일은 「그리스도신문」 편집인이 되어 정치 기사를 금지하면서 평양의 입장을 반영했다. 병원 논쟁은 서울에 대형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하는 대신, 다른 지부에는 소형을 유지하는 선에서 타협됐다. 

널다리교회에서 장대현교회로: 1893년 6월 6일 20여 명의 교인으로 첫 예배를 드린 널다리교회는 사랑방 학습반을 거쳐 1894년 1월 7일 첫 7인 세례식을 행했다. 1895년 9월 입교인 20명, 학습인 82명에서 1년 후에는 입교인 74명, 학습인 195명으로 증가했으며, 회중은 100명에서 500명으로 늘었다. 주일 오전에는 전 교인 성경공부, 오후에는 예배를 드렸다. 분기마다 세례식과 성찬식을 했는데, 50명 이상이 세례받는 경우도 있었다. 성수주일이 강조되어 세례문답에서 떨어지는 자가 많았다. 

널다리교회는 월 2회 모인 제직회에서 교회 일을 민주적으로 결정했다. 1898년 봄에 여성을 위한 사창골 창동교회를 분립했다가, 1901년 9월 장대현교회로 통합할 때 입교인은 510명, 학습인은 391명으로 교인은 1,200명이 넘었다. 1899년 4월 이신행과 신반석 등이 발기하여 국내 첫 여전도회가 조직되었다. 여자반 주일학교 교장 이정광은 40리 떨어진 곳에서 매 주일과 수요일 교회로 걸어다녔다. 한 부인은 8년간의 기도로 남편을 신자로 만들었다. 
장대현교회 예배당을 신축하기 위해 3년 기간으로 전 교인이 헌금을 작정했다. 큰 교회의 경우 필요한 경비의 3분의 2는 한국인이 부담해야 했다. 당시 조사 월급이 5엔이었는데, 4,000엔이 필요했다. 최치량이 200엔을, 한 초신자가 240엔을 작정했다. 400명이 헌금하여 3,000엔을 작정했다. 여성들의 연보가 가장 헌신적이었다. 은반지 연보도 있었다. 교인들은 절약하여 5,000엔을, 미국 교회와 선교사들이 2,000엔을 헌금했다. 

건축은 리 목사와 목수 경험을 가진 샤록스 의사가 감독했다. 1899년에 기공하여 1901년 6월 2일에 약 1,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 1902년 1월 번하이젤과 블레어가 계수해보니 남자가 863명이었고 여자는 약 500명이었다. 1903년 남문밖교회와 사창골교회가 분립되었으나, 1904년 말 교인은 1,500명에 이르렀다. 1906년 1월 제4교회인 산정현교회가 분립되었다. 

초기 지도자: 여섯 집단은 (1) 리, 마페트, 베어드 등의 선교사, (2) 의주 출신의 한석진 조사, (3) 일본 상인의 진출로 위협을 느낀 신흥 중산충인 상인들(최치량, 전재숙, 문홍준, 조상정, 한태교, 박정국), (4) 영수들(1894년 1월 첫 세례자로 첫 영수가 된 이동승, 1895년 이영언, 1898년 이영언 사망 후 선출된 박자중, 정익노, 길선주, 1899년 방기창)과 조사와 장로들(1900년 5월 첫 피택장로인 이동승이 사망하자, 조사 김종섭이 첫 장로로 안수를 받음), (5) 선도 수행자였던 김종섭(1894년 세례, 1895년 영수), 길선주(1898년 영수), 김찬성 등, (6) 전도부인 이신행과 1899년에 권사가 된 신반석, 이정광 등이었다. 

마페트: 마페트는 평양 개척을 위해 8년간 결혼을 연기하고 주택도 다른 선교사에게 양보했다. 교인들의 지속적인 기도로 1898년 11월 피시 의사와 약혼하고 1899년 6월 1일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희생과 지도력으로 평양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1년 6월 하노버대학은 이를 기려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주었다. 1901년 11월 아내가 병으로 미국에 돌아가자 그는 5개월간 매일 편지로 사랑을 표현했다. 

한석진: 1896년 11월 마페트가 미국으로 안식년 휴가를 가자 한석진도 평양을 떠나 대동군 율리면 소우물로 가서 장천교회를 개척하고 영수로 일했다. 그가 떠난 후 김종섭이 조사로 임명되었고, 마페트의 어학교사로서 1895년 5월 첫 영수가 된 이동승에 이어 방기창과 길선주 등이 지도자로 부상했다. 

길선주: 도교 수행자였던 김종섭을 통해 개종한 후 1898년 영수가 된 길선주는 탁월한 설교자였다. 예화를 적절히 사용하며 회중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1901년 방기창과 함께 브라운 총무로부터 장로 안수를 받고, 일주일 중 사흘은 선교사를 도와 전도하고 사흘은 교인들을 가르쳤다. 1902년 조사가 되어 신축한 장대현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개종 동기에는 토지 문제도 있었다. 1896년 봄 피난에서 돌아온 길선주는 신축한 천주교 성당이 자신의 토지 800평을 차지하자 프랑스 신부를 상대로 소송에 나섰다. 일곱 번 재판 끝에 1907년에 가서 장대현교회 종각 부근 토지를 대신 받아 교회에 헌납하는 선에서 해결했다. 그런데 러일전쟁 때 보통문 땅을 일제의 경의선 철도부지로 빼앗겼다. 1911년에는 장남 길진형이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1년 이상 감옥생활을 했고, 그 후유증으로 미국 유학을 마치지 못하고 1917년 10월에 죽었다. 나아가 길선주가 소유한 칠성문 아래 넓은 토지가 평양 신사 부지로 징용되었다. 

이러한 개인적 피해와 민족적 수난이 합하여 길 목사는 1919년 3・1운동 선언서 서명자로 참여한다. 그가 선언식에 참여했으나 도망갔다거나 친일파가 되었다는 악의적 선전도 있지만, 사실 3월 1일 오후 6시에 서울역에 도착하여 바로 경무총감부로 갔고, 선언자들이 있는 영광의 처소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20개월 감옥생활을 했다. 

1901년 브라운의 방문: 1901년 5월 11일 평양을 방문한 브라운 총무는 12일 주일예배에서 방기창과 길선주를 장로로 장립했다. 15일 브라운은 한국인들과 대화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5년 전에는 한 마을에 교회가 없었으나, 3년 전에는 1개, 지금은 5개가 있다; 예수교 반대 계층은 관리와 양반과 천주교인이다; 예수교인들은 대개 중산층이고 농부이며 공인도 있다; 예수교의 매력은 죄에 대한 각성과 용서, 영혼의 구원, 하나님 예배 관념 등이다; 강조점은 죄와 회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름, 중생, 그리스도와 친구로 사귐, 사랑 등이다. 브라운은 이들의 신앙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학습제도와 권찰제도: 쌀 신자를 방지하고 공동체의 신앙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세례받기 전에 6개월 이상의 학습 기간을 두어 기본 교리, 주일성수, 예배, 헌금, 전도 등을 배우고 훈련하게 했다. 네비어스의 『위원입교인규조』(1895)를 교재로 사용했다. 1901년에 다섯 가정(10명)을 담당하는 권찰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안수집사 5인(각각 100명을 돌봄), 영수 2인(전군보, 박자중), 장로 3인(김종섭, 방기창, 길선주)이 교인을 돌보았다. 

노방전도와 순회전도: 선교사와 조사와 권서는 장날을 이용하여 장돌뱅이처럼 이동하며 전도했다. 마페트의 경우 1898년 평양과 순안, 영유, 숙천, 자작, 강동, 자산, 은산 시찰을 담당했으며, 김종섭과 김두형 조사를 감독했다. 한 선교사는 2명의 조사와 함께 여러 군에 걸쳐 있는 50-60개 교회를 맡아 순회했고 한 교회를 1년 1회 방문하여 세례와 성찬을 베풀었다. 따라서 조사와 영수가 각 교회를 실제적으로 자치했다. 

사경회 체계: 교회 성장의 동력은 사경회였다. 평안도 100여 개 교회 지도자들이 매년 설날이나 여름에 7-10일간 장대현교회에서 도사경회로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 정책을 토론했다. 1901년 여름 사경회에는 700명 이상이 참석했고 오후에는 ‘가정생활’과 ‘혼상례 풍속’을 토론했다. 1903년 겨울 사경회에 참석한 김구는 해주에서 전도와 교육 운동에 나섰다. 사경회는 전신자를 전도인으로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다. 
교육 선교: 마페트가 1893년 12월에 실험적으로 시작한 남학교는 1897년 널다리남학교로 발전했다. 계명륙, 장석주, 황준국이 교사였다. 1898년 보통문 안에 남학교를 시작하고 박자중과 김형찬이 교사로 일했다. 이 두 사숙은 남문 안 숭덕학교로 통합되었다. 1897년 10월 2일 평양에 도착한 베어드는 널다리 남학교에서 가르치면서, 1898년 봄 숭실학당(중학교)을 실험적으로 4개월간 운영한 후 1899년 3월 안식년 휴가를 떠났다. 스왈른이 대신 책임을 맡았으나 전도 일이 많아 한국인 교사가 가르쳤다. 숭실학당은 1899년 9월 4일 정식 개교하고 휘트모어, 웰즈, 마페트 부인이 13명 학생을 가르쳤다. 1900년 6월 안식년에서 돌아온 베어드가 가을부터 숭실학당을 정상 궤도에 올렸다. 한편 1897년 봄에 리 부인과 웰즈 부인에 의해 시작된 여학교는 1900년 봄 창동(교사 신영생)과 서문 밖(교사 송정신)에 건물을 마련하고 1903년 숭의여학교로 공식 개교했다. 
의료 사업: 1896년 마페트 가족이 보낸 기금으로 7월 1일 기공된 평양 제중원은 대기실, 수술실, 약제실, 암실을 가진 진료소와 입원실(일반 1동과 개인 3동), 사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웰즈 의사와 피시 의사가 맡아 효율적으로 운영했다. 특히 백내장 수술로 유명하게 되어 맹인도 눈을 뜨게 한다는 기적의 의사로 알려지면서 전도에 크게 이바지했다. 

| 북감리회의 발전 

1896년 6월 연회에서 평양 선교지부에 임명 받은 노블 목사는 8월 31일 평양에 도착했고 얼마 후 부인과 폴웰 의사가 도착했다. 노블 부부는 마페트가 제공한 집에서 두 달을 보낸 후 11월 3일 새 집에 이사했으나 병약한 아들은 이튿날 죽었다. 칠성문 밖에 선교사 자녀의 첫 무덤이 생겼다. 

남산재교회의 발전: 노블 목사가 도착하기 전 김창식 본처전도인과 교인들의 헌금과 노동으로 아영동 남대문 부근 남산재(남산현) 선교회 부지에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와집 예배당이 세워졌다. 당시 세례인 21명, 학습인 30명, 유아세례 9명이었다. 1897년 3월 18일 평양의 첫 오르간을 교회에 설치했다. 노블은 기초 신학반(사경회)을 개설해 속장 지도자를 양성하고 이들을 지렛대 삼아 전도했다. 1898년 5월에는 학습인 473명, 입교인이 52명으로 늘었다. 11월 22일 교인들의 투표를 거쳐 교회 의자를 처음 도입했다. 배재학당 예배실에 이어 두 번째 예배실 의자 도입으로 등받침이 없는 벤치였다. 1897년 봉룡동교회(후에 선교리교회)와 1899년 칠산교회를 개척했다. 1899년 학습인 461명, 세례 입교인이 74명으로 늘었다. 1901년 5월 1일 남산재교회 기공식이 열렸다. 작정헌금액은 1,200엔(600달러)이었다.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붉은 벽돌 예배당이 1903년 봄에 완공되었다. 

교육 사업: 홀 의사가 1894년 교회 부지에서 배재학당 졸업생인 통역인 노병선을 교사로 남학교를 시작했는데, 노블 부임 이후 오석형이 교사로 가르쳤다. 남산현소학교로 불리다가 광성소학교로, 나중에 광성고등보통학교로 발전했다. 1900년 초부터 직업 교육을 강조하면서 기독교인 사업가 양성을 목표로 했다. 1902년 등록학생 83명에서 1년 후 150명으로 증가했다. 1896년 11월 26일 개교한 여학교는 평양의 샤머니즘과 대항하는 좋은 도구가 되었다. 노블 부인은 교인 집을 돌며 주물을 모아 불태우고 기독교 가정을 만들었다. 
의료 사업: 1897년 2월 미국에 간 홀 부인이 보낸 기금으로 폴웰 의사는 서문 안 언덕에 기홀병원을 개원했다. 홀 부인은 1898년 5월에 다시 평양으로 와서 여성병원인 광혜여원을 설립했다. 홀 의사는 1894년 오석형의 눈먼 딸 오봉례에게 점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1898년 뉴욕 점자법을 도입하여 한글 점자책을 제작하고 평양맹아학교를 개설했다. 

여성 사업: 1898년 11월 노블 부인은 서울의 장로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부인성경학교를 시작했다. 1901년 3월에는 2주일간 부인 사경회를 열었는데 평균 35명이 참석했다. 아이를 업고 4일간 걸어온 여성도 있었다. 1900년 성탄절 이브에 노블 부인은 집에 성탄목을 설치하고, 한국인 전도부인들을 초청해서 파티를 했다. 전도부인 이사벨은 무당의 신목에 주물을 걸쳐 놓은 것과 유사하므로 성탄 나무도 미국에서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다. 

핍박과 위기: 1900년 7월 중순부터 의화단사건을 피해 만주에 있던 장로회 선교사들이 의주를 거쳐 평양에 오기 시작했다. 또한 선교사의 개입을 바라는 한국인들이 늘었다. 노블은 비록 관리들이 부패했지만, 정교분리를 내세워 소송에 간섭하지 않았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 가족들로부터 핍박받는 신자가 허다했으나, 역시 간섭하지 않았다. 
1902년은 위기의 해였다. 1894년에 버금가는 기독교인 대박해가 발생했다. 평양에 새 궁궐을 건축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새 감사와 감리가 주민에게 지나친 세금을 부과하면서 반기독교 감정을 조장했다. 감리회 조사 2명이 구금되고 태형을 심하게 당했다.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의 공동 노력으로 사태는 진정되었다. 

두 번째 위기는 8-9월에 발생한 콜레라였다. 의사들은 콜레라 퇴치단을 조직해서 예방하고, 죽은 자들은 잘 매장해주어 비신자들이 감동을 받았다. 교인들은 천국 소망을 말하며 의연히 임종을 맞았다. 여신도들은 많은 주민이 죽는 것이 귀신의 벌로 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세균에 의해 전염되었음을 알리면서 끓인 물을 마시게 했다. 귀신에게 바친 주물을 불태우고 부적이 있던 벽에 주기도문을 붙였다. 

세 번째 위기는 천주교와의 갈등이었다. 1902년 황해도에서 일어난 천주교 신자와 개신교 신자 간의 충돌로 빚어진 소송 사건인 해서교안(海西敎案)에서 개신교가 승리한 후, 평남에서 관리들이 천주교인을 구금하면서, 주민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김창식 집사목사 안수와 전도부인들: 1901년 북감리회 평양 선교지부는 노블 목사가 담당하는 평양 계삭회와 김창식 전도사가 맡은 삼화 계삭회로 조직되었다. 1901년 5월 3일 남산재교회 기공식이 연회와 함께 열렸고, 김창식과 김기범이 집사목사(설교목사. 세례와 성찬은 장로목사만 할 수 있음)로 안수를 받았다. 평양 신학반에서 김창식과 이은승이 성경을 가르쳤다. 1903년 11-12월 사경회에서는 등급별로 600명이 공부했다. 1904년 12월 첫 주에 평안남북도 연합 지방회가 남산현교회에서 열렸을 때 한국인 지도자 175명이 참석했으며 일주일간 사경회를 열었다. 

1900년 노블 부인의 지도하에 5명의 전도부인이 일했다. 도르가 강, 이사벨 리는 시골 전도에 나가면 300리를 걸었다. 헬렌은 남산현교회 여성 주일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대동강 주변 마을에서 매주 세 번 여성집회를 인도했다. 1896년에 개종한 도라 김은 부모의 핍박을 받았지만 믿음을 지켰고 노블 부인의 조사로 일하면서 여학교 교사로 지내다가 남포여학교 교장으로 파송되었다. 새디 김의 이웃에서 가장 많은 신자가 나왔는데 한의사 남편도 환자들에게 “은혜로 구원받은 이야기”를 전했다. 강서군에 사는 전도부인 전삼덕은 토요일에 70리 길을 가마를 타고 평양에 와서 하룻밤을 묵고 주일예배를 드렸다. 시련 속에서도 평양 교회에는 매주 구원받는 자들이 크게 늘어났다.

(다음 글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부흥운동, 구령운동, 105인사건 등을 살펴본다.) 

옥성득 |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였다. 저서로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등이 있다.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1901년 평양 북장로회 선교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