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성득, "1866년 평양 양란(洋亂)과 토마스의 순교, 그 해석사 (1) (2)," <기독교사상> (2018. 12) ; (2019. 1): 187-200.
평양 기독교 역사는 1866년(병인년, 고종 3년) 9월의 평양 양란(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Robert J. Thomas, 1840-66) 목사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지난 150년간 토마스 사건은 몇 번의 계기를 통해 재구성되면서, 신학교 교회사 교수 중심의 ‘선교사–순교설’과 일반대 한국사 교수 중심의 ‘제국주의자–처형설’이 대립하는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해방 이전에는 토마스의 죽음을 무모한 선교로 비판하다가 순교로 기념하는 쪽으로 바뀌었고, 해방 이후에는 찬양–비판–찬양이 교차하고 있다. 평양 교회사는 출발부터 논쟁사인 셈이다. 이 글은 자료 문제를 거론한 후, 지면 관계로 100주년이던 1966년 이전까지의 해석사를 정리함으로써 토마스의 순교 문제를 성찰하고자 한다.
둘째, 오문환(1903-62)의 『조선기독교회사의 일분수령인 평양양란』(평양 광명서관, 1926)과 『도마스 목사전』(도마스목사순교기념회, 1928)은 192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항하는 평양 기독교인들의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일부였다.1 그가 수집한 목격자 구두 증언은 중요하지만, 사건 발생 60년이 지난 시점의 부정확한 기억들이 혼재되어 있다. 역사가로서 훈련을 받지 않은 20대 초반의 교사가 신앙심으로 정리한 토마스의 전기는 제도 교회의 영웅전으로 학문적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 목격자들의 파편적인 기억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끼워 맞추기 위해 상상력에 의존했다. 오문환의 글을 인용하는 교회사가가 호교론적 순교사관을 경계하지 않으면,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 사학계나 일반 독자가 읽는 글을 쓰기 어렵다. 순교사관을 가졌던 오문환이 1938년부터 평양기독교친목회를 조직하여 신사참배와 친일에 앞장섰고, 해방 이후 서울에서 자신의 친일 행적을 덮기 위해 ‘순교’에 ‘반공’ 사관을 덧입혀 백령도 ‘선교’를 내세웠던 이유를 숙고해야 한다.
오문환은 이 소책자를 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와 장로회신학교 강당에서 모인 개신교선교회공의회에서 발표했다. 이때 평양을 방문한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스피어가 오문환의 작업을 격려했다. 결국 1925-26년 평양에서 한국인 목회자들, 선교사들, 숭실 졸업생 등이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이해하는 합의가 이루어졌고, 조왕리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오문환이 그 작업을 주도하는 장본인이 되면서 일약 유명 인물이 되었다.
평양 기독교 역사 02 1866년 평양 양란(洋亂)과 토마스의 순교, 그 해석사 (2) 50주년부터 100주년 이전까지 (1), 1916-45년 (지난 호에 이어) 사회주의자들은 평양 양란을 외국과의 경쟁에서 이긴 전투로 규정하고, 단순 통상 교섭을 넘어 평양까지 와서 중군을 욕보이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며 재산을 약탈하고 심지어 婦女子(부녀자)까지 凌辱(능욕)”했다고 비판했다. 1928년 「별건곤」의 한 기사는 양인들의 몰살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묘사했다. “주머이 속에 들은 窮鼠(궁서)와 가튼 洋人(양인)들은 그 凶暴(흉포) 頑慢(완만)하든 氣色(기색)이 다 어듸로 가고 船頭(선두)에 나서서 두 손을 싹싹 빌며 殘命(잔명)을 구하얏다. 그러나 그때가 어느 때라고 될 번이나 한 수작이냐. 彼等(피등) 일행은 속절업시 모다 朝鮮(조선)군에게 捕縛(포박)되야 亂刀之下(난도지하)에 大洞江口(대동강구)의 異域孤魂(이역고혼)이 되고 말엇다.”라고 묘사했다. 다시 말해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세간에 ‘최난헌(토마스의 우리나라식 이름) 사건’이라고 불리며 외국인과 상관이 없는 사건처럼 여겨지지만, 미국과의 전쟁인 신미양요로 연결되었으므로, 기고자는 통상을 위한 내륙여행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선장이나 토마스는 교섭 실무자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반면 총독부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일하던 이능화는 한국인이 쓴 최초의 한국교회사인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1928)에서 조선 패망의 원인이 양반 사회와 유교에 있었다고 보았으며, 신분차별과 지방차별을 철폐하고 사회를 개조하기 시작한 기독교의 공헌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22장 “병인 평양 양선사건”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9월 3일 화공선을 준비하여 셔먼 호 쪽으로 흘러내려가게 하니 곧 배가 화염에 휩싸이면서 연기와 불이 하늘에 닿았다. 외국인들이 뱃머리에 나와서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한국인들은 듣지 아니하고 그들을 육지로 끌고 와서 민중과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죽였다.” 곧 고종실록에 있는 내용을 대부분 수용했다. 1) 『도마스 목사전』, 1928년 1928년에 출판된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확정했고, 이후 한국교회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추모했다. 오문환은 2년간의 초인적인 노력으로 문서자료를 수집하고, 목격자 200여 명을 만나 증언을 수집했다. 이 책은 조선시대 인물전이나 한국 개화기의 영웅전 소설, 혹은 1910년대 전도문서인 ‘예수전’과 달리, 문서사와 구술사의 방법을 종합한 전기로서, 한국인이 쓴 학문적인 근대 전기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서적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 김익두 부흥회 반대 운동, 반선교사 운동이 고조되었기 때문에, 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 프로젝트는 호교론적 관점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교회 언론은 청년층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 사회주의와 기독교, 과학과 기독교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 주류는 토마스 담론으로 교회를 이끌었다.
오문환은 이 극적 광경을 목격한 인물로 외성에 거주하던 황명대(당시 약 20세, 1928년 조왕리교회 출석)를 제시하고, 대동군 거주자로 현장을 목격하고 성경과 포탄을 보관한 김정필의 아들 김진효(1928년 강서군 동진면 난포리교회 출석), 1892년 초기 전도 때 토마스의 최후에 대해서 들었다는 한석진 목사(1928년 1월 16일 자 편지)를 간접 증인으로 제시했다. 한석진의 편지처럼 토마스가 배에서 성경을 투척한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최후 기도나 처형하는 군인에게 성경을 주었다는 것은 지나친 미화 작업으로 보인다. 또한 부록에서는 한문 자료의 ‘최난헌’(崔蘭軒)을 ‘토마스’의 음역이 아닌 ‘제너럴셔먼’의 음역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오문환은 토마스의 성경 반포와 순교의 결실로 개종자들이 나왔으며,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처형에 참여한 박춘권이 초기 교인이 되었다; 12세 소년 최치량이 가지고 온 한문 성경을 벽지로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이 개종했다; 나중에 그 집을 사서 여관을 경영한 최치량은 개종 후에 여관을 널다리교회로 기부했다; 20세 부인 이신행이 성경을 받고 개종하여 장대현교회 전도부인이 되었다; 김창구도 성경을 받아 후에 개종했다고 연결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개종을 토마스의 성경 반포의 직접적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반포된 성경은 수거되어 불태워졌으며, 25년 이상 그 책을 읽고 개종한 자는 없었다. 오문환이 정리했듯이, 강서군 지포리의 천주교인들은 토마스를 만나고 성경을 받은 것이 발각되어, 1866년 9월 23일 9명이 체포되어 지달유는 옥에서 사망하고, 지달해와 지달수는 이듬해 1월 22일 보통문에서 참수되었기 때문에, 감히 양인과의 접촉 사실을 밝히거나 성경을 읽는 자는 없었다. 1893년 1월 최치량과 평양 장로교인 7명의 첫 세례는 마페트의 전도 결과였다. 10월에 학습교인 중에서 과거 토마스로부터 성경을 받았다는 증언이 있었으나, 그것이 개종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박춘권은 토마스 처형에 참여한 자가 아니고 목격자였으며, 사건 발생 후 33년이 지난 1899년에 77세 노인으로 세례를 받았다. 1928년 10월 서울 경신학교에서 선교사 쿤즈의 선교 25주년 겸 교장 15주년 행사가 열렸을 때, 특이하게 연극 ‘순교자’ 공연이 있었다. 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토마스의 순교를 주제로 한 연극으로 짐작된다. 그만큼 토마스 순교 담론이 한국교회에 수용되고 있었다. 1932년 3월 27일부터 4월 8일까지 소설가 김동인은 「동아일보」에 소설 <순교자>를 12회 연재했다. 이는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에 감명을 받고 이를 서간체로 극화한 것으로, 오문환의 서술을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 1932년 5월 오문환은 자신의 전기를 영어로 정리하여 왕립아시아학회 조선지부에서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는 토마스의 최후에 대해서, 선상에서 불에 타서 죽었다, 강에 익사했다, 군인의 손에 처형되었다는 세 가지 증언에 대해 조사한 결과, 앞의 두 내용은 소문에 불과하고, 세 번째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1927년 처형한 군인의 친척으로부터 이를 들었으며, 수많은 목격자의 증언이라고 말했다. 또한 토마스를 처형한 군인 전 씨는 선한 사람을 죽인 것을 후회하고 받은 성경을 가지고 집으로 갔으며, 그 처남의 증손자가 이재풍 목사의 두 아들로서 자신과 함께 숭실대를 다녔다고 보완했다. 1932년 3월 토마스기념예배당이 착공되어 7월에 완공되었다. 공사비 5,000여 원으로 T자형 평면에 고딕 양식으로 건축했는데 유물과 사료를 보관한 기념실과 연구실도 마련했다. 위치는 토마스의 무덤이 있는 봉래도 남쪽, 강 건너편 언덕 조왕리였다. 평양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 기간인 9월 14일 낙성식이 열렸다. 1927년부터 전국 교회와 선교사들이 헌금하고, 토마스의 유가족을 비롯한 스코틀랜드 회중교회가 동참했으며, 런던선교회, 영국성서공회도 기부에 참여했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NBSS)는 터툴리안의 말 “The blood of martyrs is the seed of the church.”를 새긴 머릿돌을 기증했다. 기념회는 기념엽서도 발행했다.
“조선예수교의 최초 순교자 토마스 목사와 그 기념예배당” 기념엽서, 1932년 9월 2) 선교 희년과 토마스, 1934년 1934년 9월 선교 희년대회가 평양에서 열렸을 때,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을 만든 ‘장로교회 목사’ 토마스를 ‘조선장로교회의 최초 선교자’요 교회를 세운 희생 제물로 ‘순직’했다고 부각시켰다. 로즈는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of Presbyterian Church, USA, 1884-1934(1934)에서 토마스와 관련된 항은 오문환의 전기를 바탕으로 썼다. 오문환의 전기와 달리 건조하게 토마스의 최후 기도와 성경 전달을 묘사했으며, 해밀턴을 따라 “한국의 첫 개신교 순교자”로 불렀다. 다만 처형한 군인의 조카가 이영태라고 잘못 서술했다. 마페트를 편집인으로 토마스목사순교기념전도회의 기관지 「殉敎者(순교자)」가 발간되었다. 9월 7일 창간호에 실린 “희년 기념과 초대교회 운동”에서 오문환은 “반도를 그리스도화 하도록 용주매진하여야 할지니 삼십만의 교우여! 형제자매여! 초대교회의 사랑, 초대교회의 열정, 초대교회의 전도로 도라가자!”라고 외쳤다. 이때 전도회가 추진한 5대 사업은 역 대합실 전도 간판 설치, 전도 씰 발행, 도마스호 건조, 낙랑 전도계획, 회보 발간이었다. 계획대로 1935년 7월 대동강 전도를 위한 ‘도마스호’가 진수되었다. 이때 한국을 방문한 영국성서공회의 템플 총무는 12세 때 토마스의 순교 장면을 목격한 장 씨를 만났다. 한편 일반 학계에서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지속적으로 평양 양란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문일평은 1934년 3월 31일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를 ‘米船燒破事件’(미선소파사건)으로 부르며 침략한 미국 선박을 전소시키고 파멸한 사건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은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 더 강화되었다. 연희전문학교 교수 케이블 선교사는 여러 해 동안 제너럴셔먼호 관련 자료를 정리하여 1938년에 The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 1866-1871를 출판했다. 그때까지 이용 가능한 다양한 1차 한문 자료도 번역하고 한국인들의 연구서까지 정리한 230쪽의 책이었다. 오문환이 토마스가 한국어를 배운 후 성경반포와 전도를 통해 개신교 선교회를 수립하기 위해서 평양에 왔다는 순수 선교적 동기를 주장한 것에 대해서 케이블은 “나는 그의 가설이 맞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평가했다.(8쪽) 선교사들 중에는 토마스의 순교를 수용하면서도 오문환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3) 오문환의 친일 행위, 그리고 토마스를 미제 침략의 선봉으로 만든 일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신사참배 문제로 숭의여학교가 폐교되는 위기가 닥치자, 34세의 야심가 오문환은 친일파가 되어 돈과 권력의 자리로 나아갔다. 그는 1938년 4월 평양기독교친목회를 조직하고 상임간사로서 신사참배를 지지하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했다. 또한 1938년 12월에는 평양의 목사와 장로 등 12명을 인솔하여 북중국 지역의 일본군을 위문했다. 1939년 총독부는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외국 선교사 기념사업을 중단시켰다. 토마스기념교회도 조왕리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교회에 세워졌던 NBSS의 기념비도 시멘트로 지워졌다. 오문환은 『비상시국과 기독교』를 저술하고 내선일체에 앞장섰다. 1940년 6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기관지인 「총동원」에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회전”을 기고했다. 12월에는 ‘기원 2600년 봉축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총무로 일했다. 1941년 4월 기독교서회 임원진을 조선인으로 재조직할 때, ‘松浦文雄’으로 창씨개명한 오문환은 영업총무로 선임되었다. 6월에는 양주삼, 정인과, 백낙준과 함께 일본 기독교 출판계를 시찰했다. 신궁참배도 겸했다. 당시 전 일본 개신교 교파 합동으로 ‘일본기독교단’(日本基督敎團) 창립 총회가 열렸으므로, 양주삼과 오문환 등은 단일 조선교단을 형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연극 <대동강>과 <낙랑>을 상연하고 토마스의 내한을 미제 침략의 선봉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오문환은 신사에서 일본의 승전을 기원했다. 그는 1942년 1월 재단법인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이사, 4월에는 기독교신문협회의 이사가 되었으며, 6월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대표로 일본군에 자동차 2대를 헌납했다.
50주년부터 100주년 이전까지 (2), 1945-65년 1) 해방 이후 오문환의 토마스기념사업과 반공 1945년 해방이 되자 친일파였던 오문환은 러시아가 북한을 점령하자 서울로 내려와 언론과 교육 사업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토마스순교기념사업에 반공을 더하여 과거를 지웠다. 2011년 오문환의 자녀들이 편찬한 부친의 논저 자료집은 신사참배 문제 등은 침묵하고, 대신 1944년 정방산 사건에 연루되어 간첩으로 몰려 평양 일본 헌병대에 검거되어 투옥되었으나, 해방으로 살아났다고 강조했다. 이는 오문환이 해방 직후부터 남한에서 생존하기 위해 주장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는 곧 「경성일보」의 초대 사장에 취임했고, 1946년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상임고문이 되었으며, 1946년에는 숭문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46년 8월 19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주기철, 최봉석, 최상림, 박관준 등 신사참배 관련 순교자 50명에 대한 추도회가 단체 새사람 주최와 「기독교신문」 후원으로 열렸다. 김구 등 기독교 민족 지도자와 교계 지도자들이 참석하여 우상숭배인 신사참배에 맞서 불멸의 투혼을 다해 죽음으로 항거하고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희생한 순교자들을 한국 개신교 60년 청사(靑史)의 꽃이요 선지자로 기념했다. 특히 주기철 목사가 “우리는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거짓 신에 절할 수 없고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더욱 거짓 신을 섬길 수 없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민족은 자주 독립해야 한다.”라는 결의를 이끌어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오문환은 1947년 토마스목사순교기념전도회를 조직했다.(총무 겸 사업부장 오문환, 전도부장 이승길, 교육부장 김낙수, 편집부장 정재면, 후생부장 박승원) 기관지 「백령」을 발행하고, 복음선 2척과 회원 15명으로 연안, 옹진, 연평도, 백령도에 전도하여, 황해노회를 설립했다. 1947년 9월 3일에는 토마스 목사 순교 81주년을 기념했다. 1948년 「기독공보」를 맡아 운영했으며, 1949년 흥사단이 발행하던 「한국일보」를 인수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간 오문환은 1950년 9월 토마스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부산에 본부를 설치하고 피난민 수송을 후원하는 시국봉사를 하는 한편, 친일파였던 김길창 목사와 손잡고 1951년 2월 도마스호를 진수하고 거제도 등 섬 전도를 계속했다. 그해 4월에는 『토마스목사기념 25년 약사』를 출판했다. 1951년 성탄절에는 어린이용으로 소설 『순교자 도마스 목사』(남향문화사)를 발간했다. 대화체로 주요 장면마다 삽화를 넣어 토마스에 대한 영웅적 이미지를 만들었는데, 마지막 기도와 처형 장면은 1985년 김학수 장로의 토마스 처형 장면과 유사했다.
2) 토마스 순교 90주년(1956년)과 오문환의 친미 사관 오문환은 1953년 서울에 돌아온 후 광신상업고등학교를 재건했으며, 1954년 미군대한원조(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와 미국기독교아동복리회(Christian Children’s Fund)의 원조를 받아 영등포구 상도동에 남북애육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았다. 1958년 학교법인 계명의숙을 설립, 장안중학교와 남산고등학교를 재건했다. 오문환은 1956년 토마스 목사 순교 90주년 기념사업을 주도했다. 그는 소책자 The Cross at the Mouth of Taedong River(Seoul: Thomas Memorial Mission, 1956)를 발간하고, 토마스의 행방을 조사하기 위해 평안도 연안을 탐사한 쉐난도어호를 타고 방문한 마티어(William C. Mateer)의 한국 활동을 소개했다. 대동강 입구의 한 섬에서 마티어가 본 십자가를 토마스가 세운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제목으로 소책자를 영문으로 발간했다. 그러나 오문환은 마티어가 군함 선상에서 군인과 승무원 몇 사람과 함께 4월 19일과 26일, 5월 3일 주일예배를 드린 것을 육지에서 한국인과 예배한 것으로 오해했다. 오문환은 1961년 11월 1일 왕립아시아학회 한국 지부 서울 모임에서 이 소책자를 요약하여 쉐난도어호 사건과 마티어의 한국 방문을 소개했다. 1956년 10월에는 「조선일보」에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관련된 신미양요와 작약도에 대한 글을 연재했다. 오문환은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군이 “한국과 전쟁하러 온 것이 아니요 문호를 개방하고자 하였던 것이요, 양측의 이해와 연락의 불충분으로 충돌”한 것으로, 신미양요로 인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이후 서구 열강이 작약도에 정박하면서 조약을 맺었던 점, 그리고 1950년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때에도 작약도에 정박한 후 서울을 수복하고 공산군을 격퇴시킨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신미양요 때 사망하여 작약도에서 묻힌 미 해병대 3명을 애도하고 한미 간의 우호적 관계를 강조했다. 지나친 친미적 역사 이해였다.
결론 앞에서 우리는 1866년 평양 양란과 토마스의 순교에 대한 100년 간의 해석사를 살펴보았다. 1876년 개항 이전 개신교 선교사가 조선에 오려면 불법적인 방법밖에 없었다. 토마스는 정기 항로가 없는 상황에서 무장한 아편선을 타고 조선의 내륙 평양까지 침입해 들어오는 제국주의 시대 선교 방법론을 가진 인물이었다. 무고한 양민을 죽이고 평양 중군을 인질로 삼는 등 침략 행위를 한 이양선의 통역자요 대변자였기 때문에, 상선 파괴와 선원 몰살에 관하여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와 권서의 자격으로 대동강을 따라 여러 마을에서 성경을 전파했으며, 평양에서도 죽는 날까지 성경을 전했다. 비록 개종자는 만들지 못한 짧은 체류였고, 아름답지 못한 모습도 있었지만, 토마스는 순교자로서 죽었다. 만일 오문환이 1926-28년에 지나친 미화 없이 목격자들의 증언과 대담을 충실하게 기록한 구술 자료와 전기를 남겼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완벽한 순교자나 성자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20대 청년 선교사로서 성경을 전했던 토마스의 모습을 상반된 증언들까지 그대로 서술했더라면 오히려 토마스를 순교자로 보는 일에 대한 논쟁이 지금보다 줄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주교회가 병인박해 60주년을 맞아 순교자들을 복자로 시복하는 일에 자극을 받았는지, 오문환과 교회 지도자들은 개신교회와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의 장로교회에도 유사한 순교자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듯하다. 완벽하지 못한 시대적 한계를 지닌 순교자였더라도 좋았겠지만, 그들은 영웅을 만들었다. 토마스의 부족한 모습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서술할 수 없었던 청년 오문환의 시대적 한계도 아쉽게 생각한다. 토마스의 죽음이 순교인가에 대한 논의 외에 다음 몇 가지 생각을 추가하고자 한다. 첫째, 1866년 대동강에서 실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사실 규명 못지않게 그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했는지를 연구하는 해석사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지난 50년간 많은 학자들이 사건의 실체 규명을 위해서 많은 논문과 저술을 발표했다. 그러나 해석 작업이 더해지면서 이 사건에 대한 실체적 접근은 어려운 실정이다. 1860년대의 척양론, 그리고 1920년대의 사회주의의 반기독교론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순교론이 대립함으로 인해 사실, 증언, 기억이 왜곡되었다. 더욱이 북한은 주체사상과 김일성 우상화 작업으로 조작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교회사학자들도 지나친 호교론적 순교론만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관과 신학은 변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한 시대의 신학의 약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해석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의견이나 반대파 학자들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태도가 중요하다. 지난 150년간 정부(조선 1860년대 → 총독부 1940년대→ 북한 1980년대 → 남한 1990년대) 측은 민족주의 입장에서 평양 양란을 제국주의 침략으로 비판해왔고, 1920년대의 사회주의자들과 1930년대 이후 국사학계는 유사한 입장을 유지해 왔다. 반면 1920년대부터 보수화된 서북 기독교와 한국교회는 토마스의 순교를 기념하고 선양해왔다. 해방 이후의 상반된 견해가 해방 이전에 이미 강하게 존재했다. 따라서 보수적인 교회사학자들이 전자 측에 있는 사학자들을 종북 좌파로 매도하는 무례한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민족주의적 입장은 1860년대 이후 지속된 정치계와 학계의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한 사관이 진실을 다 보여주지는 못하고 진리를 독점할 수도 없다. 현 사학계는 보혁으로 양분된 구도도 아니고 좌우가 선명한 때도 아니다. 다양한 담론이 생산되지 않는 한국교회 사학계의 신학적 경직성과 학자들의 나태가 문제이다. 과거를 하나의 틀로 해석하려는 단선적 사고가 바로 과거라는 시공간을 식민지로 만드는 제국주의적 사고이다. 과거는 우리의 점령과 통치를 기다리는 수동태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경청하고 배워야 하는 능동태적 생태계이다. 셋째, 순교 담론을 생산하는 학자나 작가가 반드시 삶에서 순교 정신을 구현하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위에서 우리는 1926년부터 1962년까지 저술과 기념사업으로 40년 가까이 토마스 순교 담론을 생산하고 전파한 장본인인 오문환의 저술과 생애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우리는 그가 왜 그렇게 토마스의 순교에 매달렸는지 질문하게 된다. 1936년까지 10년간 순교를 강조한 그의 모습과 일제 말의 친일 행적, 그리고 다시 해방 이후 10년 이상 친미 노선에 서서 순교기념사업을 하면서 언론사업과 교육사업을 성공적으로 성취한 사실에서 석연치 않음을 느낀다. 기독교인의 모습은 선명한 사관이나 성공한 사업보다 일관된 인격과 깨끗한 삶에서 드러난다. 선교사 토마스의 순교를 순교답게 하는 것은 필자를 포함한 역사가들의 책임인 동시에 그의 순교를 기리려는 기독교 공동체의 삶이다. (다음 호에서는 평양 선교지부 설치를 위한 아펜젤러, 언더우드, 마페트, 홀 선교사들의 탐사 여행, 1886-1893을 다룰 예정이다.)
옥성득 |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였다. 저서로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등이 있다.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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