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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교수의 글 /잡지 기고문, 연재, 논문

1903 백범 김구의 개종과 초기 전도 활동

옥성득, "백범 김구의 개종과 초기 전도 활동,"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식> 47호 (2001): 27-31.


1. 서론

지금까지 김구(金九, 1876~1949)와 기독교의 초기 관계에 대해서는 선생이 1929년에 쓴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 상권에 나오는 사실을 그대로 수용해서 이해하였다. 그 내용은 그가 27세이던 1902년 친구 우종서(禹鍾瑞) 조사(助事)의 권유로 입교하기로 결심하였으며, 1903년 2월 황해도 장연읍 사직동에 이사한 후 예수교를 믿으며 교육에 전력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진남포 엡웟(Epworth, 懿法) 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 와서 상소운동 등 구국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백범일지》에 나오는 자술을 뒷받침해 줄 다른 사료들이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자료들은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발행하던 선교잡지 The Korea Field의 1904년 11월호와 1905년 8월호에 나오는 기사들로서,《백범일지》에 나오는 내용을 재확인 내지 보충하고, 일부 수정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이 자료들을 중심으로 김구의 행적을 연보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3. 가을 기독교로 개종

1903. 12. 31- 평양 장로교회 (장대현교회) 겨울 사경회 2주일간 참석

1904. 2월 해주에서 장연으로 이사

1904. 봄 장연에서 봉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오순형과 마을 전도,

            장연읍교회가 설립되고 주일 예배 시작, 교인 40여 명으로 성장

1904. 여름 오순형과 함께 평양 교사사경회와 영수사경회에 참석

1904. 여름 숭실학당 졸업생인 최광옥을 장연에 초청, 매일 밤 전도집회 개최, 오인형 일가 등 개종

1905. 7 장연읍교회는 영적으로 다소 침체, 봉양학교는 자급 가능


2. 자료 해석

이들 자료들이 새로 밝혀 주는 사실은 첫째, 김구의 개종이 1903년 가을이었다는 것이다. 즉 자서전에서 기억하는 1902년이 아니라, 1903년 가을에 김구는 개종하였다. 앞으로 김구 연구에서 이 부분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1903년 11월 한 달 간 헌트(W. B. Hunt) 목사가 황해도 지방을 방문하고 110명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 때 김구도 세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개종 이후 1903년 12월 31일부터 2주일간 열린 평양 겨울사경회를 비롯한 사경회들에 참석하여 여러 달 동안(1903년 11월에서 1904년 1월 사이) 성경을 공부하였다. 이는 그가 개종 이후 성경 공부의 필요성을 깨닫고 정식으로 기독교 교리와 성경을 공부하였음을 보여준다.


셋째, 해주에서 장연으로 이사한 시기가 1904년 2월이라는 점이다. 이 역시 자서전의 기억과 는 1년 시차가 있다. 곧 김구는 부친상이 끝난 뒤 약혼자 여옥(如玉)이 죽자, 진사 오인형(吳寅炯)의 권유로 1904년 2월 해주에서 장연읍 사직동으로 이사하였고, 그 아우 오순형(吳舜炯)과 함께 오진사 큰사랑에 봉양학교를 설립하고 동시에 마을 전도를 전개하였다. 오순형은 1903년 10월 1일 개학한 평양 숭실학당에 입학하였는데, 입학 당시 교인은 아니었으나 기독교에 관심은 있었다. 숭실학당에서 배우면서 예배에 적극 참여하여 곧 개종하고 평양 시내에 나가서 전도할 정도로 믿음이 자랐다. 아마도 1903년 12월말에서 1904년 1월초에 열린 평양 겨울 사경회에 김구와 함께 참석한 듯하다.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평양에 들어오자 학교가 휴교되면서, 장연으로 내려왔다. 그는 김구와 뜻을 같이 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적극적으로 마을 전도에 나섰고, 곧 주일 예배를 시작할 정도로 교인을 모았다.


넷째, 이처럼 1904년 봄에는 장연읍 사직동 오순형의 집에서 김구와 오순형에 의해 주일 예배가 시작되고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교인이 4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무렵 황해도에는 일종의 “전진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할 정도로 교세가 급성장하고 있었다.


다섯째, 김구와 오순형은 1904년 여름 평양에서 열린 교사사경회와 영수사경회에 최소한 한 달간 참석하여 집중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 지도자 훈련을 받았다. 이때 진행된 사경회의 통상적 순서를 보면, “새벽기도회, 아침 식사, 30분간 예배, 오전 성경공부, 점심, 오후 성경공부, 찬송 배우기(1시간) 혹은 가두 전도, 저녁 식사, 저녁 집회 혹은 토론회” 등이었다.


여섯째, 영수사경회를 마친 김구와 오순형은 숭실학당 졸업생인 최광옥(崔光玉)을 장연으로 초청하여 함께 사직동으로 와서, 매일 밤 집회를 열고 전도하였고, 그 결과 오인형 일가 5명이 개종하였다. 김구와 최광옥이 이때 관계가 깊어졌을 것이다.


일곱째, 최광옥은 평양에 와서 이 사실을 숭실학당 교장 베어드(W. M. Baird)에게 알렸고, 1904년 9월에 작성된 평양선교지부 보고서와 베어드의 숭실학당 보고서에 김구와 오순형의 기사가 실렸다.


마지막으로, 1905년 7월 C. E. Sharp 목사 보고에 의하면, 장연읍교회는 영적으로 침체되고 있었고, 봉양학교는 김구(혹은 오순형)에 의해 자급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하였고, 성경이 주된 과목의 하나였다.


교사 김구(뒷줄 맨 오른쪽)와 해주 광진학교, 1906년


그러나 이 무렵 김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진남포 감리교회 엡웟청년회에 가입하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항의하는 서울 상동교회 청년회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지는 더 조사해야 할 과제이다. 참고로 진남포교회 엡웟청년회는 1905년에 조직되어 있었던 듯하다. 곧 1905년 초에 평양에서 엡웟청년회를 중심으로 교육 구국운동이 일어나고 모금이 시작될 때, 진남포교회에서도 학교 설립을 위해 900원을 모금한 사실에서 이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진남포교회는 1903년 강인걸 전도사와 김성규 권사의 노력으로 기틀을 마련하였고, 1904년부터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1904년에는 강인걸 전도사와 이익모 전도사가 이 지역 계삭회를 맡아 목회하였고, 1905년부터는 이익모 전도사가 담당하였다. 1906년에는 교인이 454명으로 늘어나 새 교회당 건축 계획을 세울 정도가 되었다. 한편 안식교가 이 지역에 진출하면서 1905년부터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삼화-진남포구역은 평양지방 노블(W. A. Noble) 장로사 관할로서, 담당 선교사는 무어(John Z. Moore) 목사였다. 1905년 김구가 장연장로교회를 떠나 진남포 감리교회의 엡웟청년회로 갔다면, 이는 그가 1904-5년 당시 엡웟청년회가 가졌던 적극적인 민족운동 노선에 공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3. 자료 번역

각주와 자료 번역은 다음을 보라.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1081132